<73화>
레이라의 말을 듣고 그 숙소에 남아 있으면서도 사라는 줄곧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만일 이대로 기다렸는데, 동생들을 구출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만 살아남은 꼴이 되지 않을까.
그런 불안함에 사라는 레이라가 돌아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기도했다.
제발 동생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지금이라도 다시 배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하고 수천 번도 더 고민했다.
하지만 레이라와 엇갈려 동생들과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라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레이라와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퐁퐁 눈물을 쏟아 냈다.
“이브, 해리, 에릭…!”
“언니!”
“사라 누나!”
레이라가 손을 놓자, 아이들이 사라에게 달려가 폭 안겼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무서웠다는 둥, 걱정했다는 등의 말들을 눈물과 함께 쏟아 냈다.
아이들은 한참을 기다린 끝에 겨우 진정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정말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사라, 제가 가기 전에 했던 말 기억하죠?”
“네, 그럼요!”
“그거면 돼요.”
부드럽게 미소 짓는 레이라를 보며 사라는 재차 제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곁에서 지켜보던 유진은 다시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재빨리 나섰다.
“자, 사건 조사를 위해서 너희도 간단한 조사를 받아야 하거든? 바래다줄 테니 그만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아, 네.”
고개를 끄덕인 사라와 아이들은 재차 레이라에게 허리를 숙였다.
유진이 아이들과 함께 치안대로 향하고 나니, 숙소가 조용해졌다.
“그쪽은 같이 안 가?”
“예. 전 아가씨의 안위가 최우선입니다.”
“…태도는 좋은데 눈치는 없네.”
“원하신다면 문밖에서 대기해도 됩니다.”
“다시 보니 눈치도 있네.”
생긋 웃은 아르제오가 어서 나가라며 눈짓을 했다.
에반은 허락을 구하는 듯 레이라를 응시했고, 그녀가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워서 차마 에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어서였다.
에반은 레이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숙소에 둘만을 남겨 놓고 문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
“네, 그래요.”
문을 힐끔거린 아르제오가 눈치를 살피며 슬쩍 레이라에게 바짝 다가섰다.
“왜요?”
“그냥.”
레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제오를 응시하다가 이내 미소를 감추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제오도 오늘 고생 많았을 테니까 일찍 쉬어요.”
“어? 지금? 지금 쉬라고?”
“그럼 지금 안 쉬려고요?”
“아니 쉬는 거지.”
그렇게 말한 아르제오는 냉큼 레이라의 손을 낚아챘다.
“이게 쉬는 거야.”
그러더니 그녀를 이끌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한 손을 허리에 두르고, 다른 손은 손을 잡고 있으니 레이라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굳이 움직일 필요 없이 편안했지만.
“그대를 향한 청혼서가 빗발친다던데, 그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어?”
가만히 그녀의 고운 손을 만지작거리던 아르제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가장하며 물었다.
표정을 썩 잘 감췄다는 건 그의 생각이었고, 손을 응시하는 시선이나, 슬쩍 비죽인 입술에서 그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글쎄요.”
픽 웃은 레이라는 아르제오가 매만지던 손으로 그에게 깍지를 꼈다.
“왜요? 알아본 바로는 괜찮은 사람이 있던가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다 성에 안 찰걸? 나 정도 된다면 모를까.”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아르제오가 거들먹거리며 웃었다.
“괜찮은 사람이야 어디에나 있죠. 저한테 딱 맞는 사람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괜찮은 사람도, 딱 맞는 사람도 나야.”
“염두에 둘게요.”
아르제오의 낮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레이라가 살포시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확실히, 청혼서는 그렇다 쳐도 찾아오는 건 피곤했어요.”
“그것들 얼굴 다 기억해?”
“어렴풋이요.”
“내가 다 찾아가서 반쯤 죽여 놓을 거야….”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속삭이자, 레이라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발루아의 황제는.”
“네?”
잠시 망설이던 아르제오가 이어 물었다. 진짜 묻고 싶었던 건 이쪽이었던 듯했다.
“황제는 별말 없어?”
“글쎄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는데요.”
이제 와서 황제가 레이라에게 다시 다가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르제오는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그저 청혼서를 보내거나 찾아오는 이들과는 달리 그녀에게 별다른 존재일 테니까.
차라리 그녀가 폐위된 일로 황제를 깊이 미워하고 원망했다면, 조금 덜 불안했을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보다는 지금처럼 무덤덤한 편이 더 나았다.
미워하는 것보다는 아무렇지 않은 쪽이.
그게 겉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 거라면.
“제오.”
“응?”
“내일 출발하면, 그 해안가를 들렀다 가고 싶어요.”
“우리 처음 만난 곳?”
“네.”
“그러자.”
아르제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으로 오는 길에 그곳에 들러보고 싶던 참이었다.
혼자 가서 추억을 회상하면 너무 청승맞아 보일까 봐 망설였는데, 레이라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제오, 밤이 늦었으니까 그만 쉬어요.”
“쉬고 있어.”
“에반 경을 계속 저렇게 문밖에 세워 둘 참이세요?”
뚱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아르제오는 그대로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레이라는 이제 그만 쉬겠다고 하니, 자네도 이만 쉬어.”
그 말만 하고 다시 문을 닫은 그는 몸을 빙글 돌려 ‘잘했지?’하고 묻는 듯한 얼굴을 했다.
레이라는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픽 웃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제오도 푹 쉬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
잠시 넋을 놓고 서 있던 아르제오는 곧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는 터벅터벅 문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가만히 이마를 문에 대로 기대어 섰다.
이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가야 잘 들어간 걸까. 그런 고민을 하는데, 곧 물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놀란 아르제오는 잠시 눈을 도르륵 굴리더니 얼른 저도 반대쪽의 방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고는 엄청난 속도로 씻고 잘 준비를 마치더니 다시 레이라의 방문 앞에 서서 이마를 문에 기대고 섰다.
“…레이라.”
나지막한 부름에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달칵, 문이 열렸다.
“제오? 안 자고 왜….”
의아한 얼굴로 레이라가 문을 열었고, 아르제오는 그 틈에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기울였다.
문에 기대어 있던 그가 스르륵 앞으로 쏟아지니,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그를 받쳤다.
아르제오는 그 틈에 얼른 그녀에게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제오?”
“같이 자자.”
“네?”
“잠만. 잠만 잘게. 손만 잡고 잘게.”
아르제오에게 안긴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라가 그 말에 시선을 도르르 굴렸다.
“불순한 생각을 한 모양이네요.”
“아니야, 잠만 잘 거야. 같이.”
“딱히 무언갈 할 거라고 추궁하지도 않았는데 제 발 저려서 강조하니까요.”
“…이런 건 그냥 넘어가 줘.”
레이라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픽 웃고는 방문을 닫았다.
그걸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아르제오는 그녀가 쫓아내기 전에 얼른 먼저 침대로 올라갔다.
“낯선 곳이니까 혼자 자면 외롭잖아.”
“제오한테는 낯선 곳이 아닐 텐데요?”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뭐가 사소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르제오는 얼른 오라며 제 옆을 톡톡 두드렸다.
레이라는 조금 빠르게 뛰는 마음으로 침대에 올랐다.
“오늘은 어쩐지 어린아이 같네요.”
“내가?”
“네, 분명 연상인데 말이죠.”
“하암, 피곤하다.”
아르제오는 못 들은 척하며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러고는 슬쩍 레이라를 바라보다가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켜 그녀를 끌어안고 누웠다.
그는 진심으로 그저 이것만을 바랐다. 얼마 전까지는 아직 이룰 수 없는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레이라, 리히덴에는 얼마나 있을 예정이야?”
“일단은 평화협정이 완전히 체결될 때까지는요.”
아직은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번에 정식으로 입국 절차를 받고 들어온 것이었다.
이전처럼 시간에 쫓겨 다시 발루아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르제오는 그에 만족감을 느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 줘야지.’
이곳에 더 머물 거라면, 앞으로도 계속 붙어 있으며 이렇게 함께 잠들고 싶었다.
씩 입꼬리를 올리는 아르제오를 응시하며 레이라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살포시 어루만졌다.
“어서 자요.”
“응, 그대도.”
“이렇게 같이 자는 건 오늘만이니까요.”
“…….”
금세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며 레이라가 키득거렸다.
“정말…? 진짜…?”
“잘 자요.”
“아니, 잠깐만…. 진짜…?”
레이라는 대답 대신 보란 듯이 눈을 감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어지는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와,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잠이 들었다. 그날, 잠을 청한 건 레이라뿐이었지만.
* * *
다음 날 아침, 레이라는 푹 잔 덕에 개운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아르제오가 보였다. 그녀는 절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이런 게 좋아서 결혼하는 걸까.’
잠들기 전까지 함께하고,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얼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꿈꾸는 건,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은 아직도 흔치 않았지만.
로이드를 만날 당시에는 이런 행복감 같은 건 몰랐다. 그의 위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이라는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충분히 마음을 쏟아 보았고, 자신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왔는지 선명하게 기억해서.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제 와 보니, 자신은 로이드에게 마음을 쏟은 적은 없었다. 그를 좋아했지만, 마음을 쏟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이토록 보고 싶고, 마음이 가고,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적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로이드와의 사이는 그 때문에 틀어진 걸지도 몰랐다.
서로 대화도 없었고,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지도, 내어 주지도 않았으니까.
레이라가 다른 생각에 잠긴 사이, 눈을 뜬 아르제오가 돌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