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우연히 여기 인질로 잡혀 있는 아이들을 구하러 온 것뿐이에요.”
레이라는 빅터가 오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친절히 말했다.
멀리서 지켜보았을 때, 아르제오와 함께 왔다가 이리로 나뉘어 들어갔으니.
“인질을…. 말입니까?”
빅터는 경계를 풀지 않으면서도 귀족 아가씨로 보이는 레이라에게 말을 높였다.
그러더니 슬쩍 시선을 돌려 배 난간에 칭칭 감긴 두꺼운 넝쿨을 확인했다.
“그건 뭡니까?”
“아, 배가 출항하기에 붙잡아 두려고요. 부두와 이어져 있어요.”
“예….”
그녀의 대답에 빅터는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돌렸다.
두 눈으로 확인한 넝쿨은 확실히 저 멀리 부두와 이어진 것이 보였다.
“이게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갑자기 넝쿨이 어디서 나서? 부두에서 이걸 감아서 들고 배에 탔다는 말인가?
그런 수상한 짓을 했다가는 금세 발각되었을 터였다.
이해할 수 없는 듯 요동치던 빅터의 눈동자가 다시 레이라를 향했다.
‘설마….’
그리고 그녀의 정체가 짐작되는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 * *
용병들을 전부 때려눕히고, 게링을 포박해 끌고 나온 아르제오는 제 눈을 의심했다.
빅터가 올라탄 배는 이미 부둣가에서 모습을 감춘 뒤였다.
하지만 부둣가에는 평범한 식물이 아닌, 두꺼운 넝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 멀리 배와 이어진 채.
그에 아르제오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정말 레이라가 있었단 말이야…?’
그저 자신을 놀리기 위해 필이 한 말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넝쿨을 보고 나니 왜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자책했다.
“…이, 이게 뭡니까…?”
뒤늦게 넝쿨을 확인한 유진도 아르제오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당겨.”
“예?”
“당장 당겨, 저 넝쿨.”
“아, 예!”
우렁차게 대답한 유진은 기사들을 이끌고 넝쿨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두꺼운 넝쿨을 장정 여럿이 매달려 부두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몇 사람이 끌어당긴다고 거대한 배가 움직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이건 무리야,’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르제오가 잔뜩 굳은 얼굴로 저 멀리에 떠 있는 배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그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즈음, 배가 다시 뱃머리를 돌려 부두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에 넝쿨을 당기던 기사들과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는 느릿한 속도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아르제오는 잠시도 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배가 점점 가까워져 오자 갑판 쪽에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백금발을 흩날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제오!”
얼굴을 확인할 수 있고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레이라가 손을 흔들며 아르제오를 불렀다.
“…이런 미친.”
낮게 중얼거린 아르제오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이런 상황에도 예쁠 일이야?’
한숨을 푹 내쉰 아르제오는 포박된 게링 백작에게 다가갔다.
“저를 데려가도 황태자 전하께서 제 돈을 쓰신 건 변하지 않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배신하셨다는 사실만 명확해질….”
퍼억! 게링을 걷어찬 아르제오는 살벌한 눈으로 쓰러진 백작을 노려보았다.
“이런 미친놈이 감히 레이라를 팔아넘기려고 했어…?”
“예? 그게 무슨…. 아악!”
게링은 당연하게도 레이라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아르제오는 어리둥절한 게링의 표정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배가 부두에 당도해서 레이라가 내리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 전하, 일단 진정하시는 것이….”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아르제오를 말리려고 하니, 유진이 그 앞을 막아섰다.
“아니, 저자는 지금 목을 쳐도 다 치죄하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 몇 대 맞고 끝나는 게 다행일 정도야.”
유진 역시 서늘한 시선으로 게링 백작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감히 누굴 납치해?”
“제, 제가 그런 게…! 엄연히 따지면 납치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게 그거지, 네놈이 시켰잖아.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으어억!”
게링이 어떤 변명을 하던, 아르제오는 멈추지 않았다. 백작은 쏟아지는 폭력에 그저 눈물만 머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배가 완전히 항구에 도착하자, 유진이 아르제오에게 다가섰다.
“배가 도착했습니다, 전하.”
그 말에 아르제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게링에게서 몸을 홱 돌렸다.
그는 배에서 막 내리는 레이라에게 다가서 단숨에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곧 다시 품에서 떼어 내며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괜찮아? 혹시 어디 다쳤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거기서 나와?”
그녀의 뺨을 매만지며 다급히 살피자, 레이라가 그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웃었다.
“하나씩 물어봐요, 제오.”
“어디 다쳤어?”
“아니요.”
“어떻게 된 일이야?”
하나씩 물어보라는 말에 순순히 하나씩 질문을 던지는 것이 우스워 레이라는 소리 내어 웃었다.
푸흐흐, 하는 웃음소리에 아르제오는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납치되었던 건…. 아니지?”
설마, 설마 하는 얼굴로 아르제오가 물었다.
“아니에요. 전 여기, 에반 경과 함께 정식 입국 절차를 밟고 왔는걸요.”
호위가 있었다는 말에 아르제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게링의 말대로 백작은 정말 레이라가 누군지 몰랐고 납치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몹쓸 짓을 하던 건 변하지 않으니 아르제오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에 게링이 분한 듯 부들부들 떠니 발로 또다시 걷어찼지만.
“그런데 리히덴에는 어쩐 일로 왔어?”
그렇게 물으며 아르제오는 레이라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혹시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러자 레이라는 아르제오의 옷깃을 붙잡고 떨어지지 못하게 당겼다.
“보고 싶었어요.”
아르제오의 얼굴이 곧 불이라도 붙은 듯 화르륵 달아올랐다.
매번 이렇게 그녀에게 당하면서도, 도발을 시도하는 것이 어쩐지 귀여웠지만.
순순히 그를 놓아준 레이라는 싱긋 웃으며 빙글 몸을 돌렸다.
“조금 귀찮은 일이 생겨서요. 잠시 피하기도 할 겸, 제국의 화친에 사절로 왔어요.”
“그런데 왜 황궁으로 가지 않고 여기로 왔어?”
“국경 부근에서 2황자 전하의 서신을 받았거든요. 제오가 이쪽에 있으니, 들러서 함께 돌아오라고요.”
그녀의 대답에 아르제오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도르륵 돌렸다.
‘수고했다는 말보다 이쪽이 훨씬 좋네.’
괜히 배려한답시고 다른 무언가를 해 주는 것보다, 레이라를 한 번 만나게 해 주는 게 훨씬 좋았다.
아르제오는 돌아가면 루이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며 픽 웃었다.
“이번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후에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아르제오를 바라보던 레이라가 발악하는 게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은 누군가요?”
“이 일의 주범.”
“그런데 왜 황태자 전하를 입에 담죠?”
“…….”
레이라의 물음에 아르제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확인한 게링이 또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제가 벌어들이는 돈을, 황태자 전하께 바쳐 왔으니까요! 그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누구신지는 모르나, 그 값어치는….”
레이라는 게링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당신은 1황자 전하의 명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건가요?”
“예?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제가 번 돈이 황태자 전하께….”
“그럼 나쁜 짓을 한 건 당신인데, 왜 황자 전하 핑계를 대나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으니 게링은 말문이 막혔다. 뒤에서 지켜보던 아르제오는 ‘풉’, 하고 비웃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게링을 보며 레이라는 의아해하며 다시 아르제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데 말이죠. 본인이 해 놓고 다른 사람 핑계를 대니, 구제 불능으로 보이네요. 가요, 제오.”
“그래.”
무언가 떠들려던 게링은 다른 기사들과 유진의 손에 붙잡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유진이 슬쩍 검을 검집에서 뽑으며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으니 말이다.
“그냥 조용히 지나갈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래요? 저도 저 나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은 아는데요.”
“싫은 소리 할 줄은 몰랐다는 뜻이야.”
“사실을 말했을 뿐인걸요. 그게 싫게 들렸다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거겠죠.”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손을 꼭 붙들며 씩 웃었다.
“그런 점도 멋있어.”
“제오에게만 그런 걸로 해요.”
배시시 웃은 레이라는 빅터가 배에서 인질들을 인도하는 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유진.”
“예, 전하.”
그 사이 아르제오는 그녀와 붙잡은 손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난 레이라와 천천히 올라갈 테니, 먼저 가 있어.”
“…이러시기 있습니까?”
“뭐.”
원망 가득한 유진의 눈망울에도 아르제오는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지금 그에게는 레이라와의 시간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어차피 공녀님의 호위도 있지 않습니까? 왜 굳이 저만 떼어 내십니까?”
“말 잘했다. 그럼 그 호위도 함께 데려가.”
“그건 안 될 말이죠.”
아르제오와 유진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레이라는 배에서 나오는 인질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안에서 확인했던 사라의 동생들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레이라? 어디 가?”
“부탁받은 일이 있어서요.”
그녀는 사라의 동생들에게 손을 뻗으며 빅터에게 물었다.
“이 아이들의 누나가 제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먼저 만나게 해 준 다음에 치안대로 제가 데려다줘도 될까요?”
레이라의 물음에 빅터가 슬쩍 아르제오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빅터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치안대에는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아르제오는 빅터와 함께 용병들과 게링을 치안대에 인계했다.
붙잡혔던 인질들도 일단은 경위 조사를 위해 치안대로 향하게 되었다.
그들 중 사라의 동생들은 미리 치안대에 알리고는 레이라의 숙소로 향했다.
유진은 아르제오의 말에도 기어코 고집을 부리며 함께 따라붙었다.
“지겨운 놈.”
“들립니다, 전하.”
숙소까지 가는 내내 서로 투덜거렸지만.
레이라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문을 열었다.
안에서 기다리던 사라는 두 손을 모은 채로 마지막으로 보았던 자리에 서서 기도하고 있었다.
제발, 동생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