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71)화 (71/122)

<71화>

당당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안내까지 받으며 배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

이 사건의 배후였다.

“아가씨, 아직 안 됩니다.”

금방이라도 배가 떠날까 봐 레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에반이 막았다.

“하지만, 이대로 배가 나서면 인질들은….”

레이라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배로 접근하는 다른 인영들이 보였다.

그들을 확인하자 불안함이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곧 미소를 머금으며 에반에게 말했다.

“…이제 저희도 가죠.”

“예, 아가씨.”

* * *

당당한 게링의 태도에 아르제오는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

입을 꾹 다문 채로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게링이 거들먹거리며 물었다.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까?”

“들으면 기분 더러워질 게 뻔해서.”

“예?”

눈살을 찌푸리는 게링이 귀찮은 듯, 아르제오는 대충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원하면 대충 들은 셈 쳐. 체포해.”

“예, 전하.”

기사들이 움직이자, 게링과 함께 모여 있던 이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 인원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곳에는 물건들이 아니라, 전부 용병들인데요.”

“그럼 인질들은 다른 배에 있겠네.”

빅터가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게링의 말은 넘겨들을 수 없었다.

“이미 출항을 마쳤겠지만요.”

아르제오가 멈칫하는 사이 게링이 고용한 용병들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면 돈을 두 배로 주겠다.”

“황족에게 검을 겨누다니, 이 정도면 반역 아닌가? 아니면 황족 모독?”

“이 인원이 전부 실종으로 처리되면 아무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자신만만하네. 건방지게.”

게링의 태도에 아르제오는 물론, 유진을 포함한 함께 온 기사들 전부의 심기를 건드렸다.

루이스가 보낸 최정예 부대나 마찬가지였는데, 고작 용병들 수십에 자신들을 깔본 것이었으니.

“이쪽은 빠르게 정리하고 인질 구출에 합류한다.”

“예, 전하.”

기사들과 유진은 바드득 이를 갈며 용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아르제오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껏 황태자 전하께서 사용하신 자금, 그게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날카로운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음들 속에서 게링이 크게 외쳤다.

용병들을 차례로 쓰러트리던 아르제오는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

“제가 바치는 돈을 그렇게 많이 받으시고도, 이 일의 책임에서 벗어나실 수 있으리라 여기십니까? 저 혼자 벌인 일이라고요? 전하께서도 모른 척해 주신 게 아니라고, 정말 확신하십니까?”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대답할 생각이 없었으니 아르제오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대답이 없자, 게링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입꼬리를 올렸다.

“하니, 저를 잡는 것을 망설이실 것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백작의 말대로 이 사태를 로렌스가 눈감아 주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건 추후에 처리할 일이지, 지금 이곳에서 고민한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르제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쓸데없는 생각을 밀어냈다.

“그렇다고 백작을 놓아줄 수는 없지. 사람이 생각이 없네.”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비웃는 아르제오의 말에 게링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얘긴 연행되어 형님 앞에서 직접 하지 그래?”

* * *

“양쪽으로 나뉘어 들어가자고 하면, 에반 경은 반대하겠죠.”

“물론입니다.”

“그럼 이쪽부터 들어가죠.”

레이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른 배를 훑고는 에반과 함께 몰래 배에 올랐다.

그런데 두 사람이 오르자마자 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움에 난간으로 다가서니 배가 항구에서 느릿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아가씨, 당장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훑은 에반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레이라는 즉시 허리춤에 멘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경, 절 한 번만 믿어 줄 수 있겠어요?”

곧장 그녀를 안아 배에서 뛰어내리려던 에반은 그 물음에 멈칫했다.

‘혹시 몰라 챙겨 오길 잘했어.’

레이라는 일전에 리히덴에서 납치 사건을 겪은 이후로, 항상 몸에 씨앗을 품고 다녔다.

주머니에서 씨앗을 꺼내 움켜쥔 레이라는 그대로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씨앗에서 넝쿨이 자라났다.

그녀는 다른 손으로 또 주머니에서 씨앗을 한 움큼 집어 넝쿨을 만들어냈다.

그 넝쿨은 배 난간을 휘감고는 부두를 향해 뻗어 나갔다.

잔뜩 씨앗을 움켜쥔 덕인지 뻗어 나간 넝쿨은 두껍고 단단했다.

넝쿨은 배와 부두를 단단히 이었고, 곧 배의 움직임이 멈췄다.

“야, 이거 뭐야!”

그와 동시에 배 반대편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배가 멈추자마자 곧장 알아챈 이가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반응이었다.

레이라와 에반은 숨을 죽이고 소란이 이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러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감춰졌던 그물이 어렴풋이 보였다.

항구를 둘러싼 절벽 사이사이에 그물이 쳐져 있었다.

아르제오가 준비한 그물이었다.

“이런 건 또 언제 생겼어?”

“이런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딨어!”

“칼 가져와. 급한 대로 째고 가야지 뭐 어쩌겠어.”

배를 가로막는 그물 때문에 몇 남자들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허둥댔다.

칼로 벤다고 해고 거대한 배가 빠져나갈 틈을 만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사이 레이라와 에반은 배 안을 수색하러 들어섰다.

어둠 속을 앞장서는 에반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갑판에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두 사람은 적막 속에서 걸음을 내디뎠다.

짐을 잔뜩 실은 창고와 식량고를 지나치고 나니, 갑판 위와는 다른 웅성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쪽인 것 같습니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조금 더 나아가니, 웅성거림의 정체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훌쩍거림과 흐느낌.

더 가까이 다가가니 공포에 질린 울음소리가 들려 레이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문인 것 같습니다.”

에반이 가리키는 곳에는 건장한 사내 둘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짐이나 식량을 실은 창고는 아무도 지키지 않으면서, 이곳만 문지기가 있었다.

“저 사람들을 제압하면 소란이 일겠죠?”

“길이 하나뿐이라 아무래도 저들이 먼저 눈치챌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제가 하죠.”

조용히 몸을 낮춘 레이라가 씨앗 두 개를 꺼내 손에 쥐고 바닥을 짚었다.

바닥을 타고 조금씩 자라난 넝쿨이 스멀스멀 위로 올라가더니 한순간에 문지기들 입을 틀어막았다.

그 즉시 에반이 나서 그들을 기절시켰다.

깔끔하게 문지기들을 해치운 두 사람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이익,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자 안에서 훌쩍이던 이들이 숨을 훅 들이켰다.

빼꼼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어스름한 불빛에 삼삼오오 모여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저….”

레이라가 안으로 들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여니, 사람들이 서로 끌어안으며 겁에 질렸다.

“아니, 그게….”

그들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던 레이라는 숨을 고르고 또박또박 이름을 불렀다.

“이브, 해리, 에릭. 거기 있니?”

아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자, 더욱 서로에게 꼭 붙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사라 누나의 부탁을 받고 왔어.”

사라의 이름에 아이들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레이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게링 백작의 사람이 아닌 건가요…?”

“네, 아니에요.”

“그, 그럼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도, 돌아가게 해 주세요, 가족에게 돌아가야 해요…!”

그 한 명을 시작으로 너도나도 레이라에게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에반이 앞으로 나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말했다.

“다들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그 위압감에 사람들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저희 말고도 기사님들이 와 계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살았다…!”

희망에 찬 사람들을 보며 레이라와 에반은 지금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다.

배를 다시 부두로 돌려야 하니 그때까지 이곳에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이다.

다시 문을 나서서는 에반이 레이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도 이곳에서 기다리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경의 얼굴을 모르니 제가 없으면 경은 의심받지 않을까요? 사람들을 납치한 쪽과 한패라고요.”

“…그렇게 되겠군요.”

“어서 가요.”

인질을 찾은 건 갑판 아래의 창고들을 지나서 있는 공간이었다.

넝쿨로 부두와 배를 이어 놓은 부분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두 사람은 갑판 쪽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조금 전과는 다른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웬 그물이냐며 투덜거리던 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마찰음과 날카로운 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였다.

전투가 벌어졌다고 여긴 레이라와 에반은 걸음을 서둘렀다.

아니나 다를까, 갑판 위에서는 기사들과 상인들이 싸우고 있었다.

“가세할까요?”

상황을 살핀 레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끼어들면 혼란만 줄 것 같았다. 거래상들이 아니라 기사들이 명백히 우세했고.

“저희는 넝쿨을 확인하러 가요.”

“예, 아가씨.”

레이라와 에반은 부두와 이어 놓은 넝쿨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탕, 탕.

“이건 또 뭐야!”

넝쿨 쪽에도 인기척이 있어서 에반이 먼저 달려 나갔다.

그곳에는 상단 사람 하나가 두껍고 단단한 넝쿨을 작은 단도로 찌르고 있었다.

보통 넝쿨이었으면 벌써 잘려 나갔을 테지만, 레이라가 가진 씨앗은 시타델 섬에서 길러 온 것이었다.

에반이 달려가 검을 휘두르니 남자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당신 뭐야.”

넝쿨을 등지고 선 남자가 에반을 경계하며 물었다.

그 사이 레이라는 다시 넝쿨에 다가가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청록빛이 흘러나오니 단도에 찔려 훼손된 부분이 다시 아물었다.

“뭐야! 뭘 하는 거야! 이거, 당신들 짓이야?”

“아가씨, 어찌 처리할까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에반이 물었다.

“치안대에 넘겨야 하니까 기절시키는 편이 좋겠네요.”

“예.”

두 사람의 대화에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거만한 태도가 무색하게도, 남자는 순식간에 에반에게 뒷덜미를 잡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또 사람이 올지도 모르니까 우린 넝쿨을 지키고 있는 게 좋겠어요.”

“예, 아가씨.”

에반은 남자를 꽁꽁 묶어 한쪽에 던져 놓았다.

곧 갑판에서의 싸움이 끝났는지, 빅터가 기사 하나와 함께 두 사람이 있는 쪽에 나타났다.

노예 거래를 하던 상단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두 사람을 보고선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들은 또 누구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