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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70)화 (70/122)

<70화>

* * *

시타델 섬에서 공작저로 돌아간 레이라는 로이드에게 서신을 보냈다.

아직 평화협정 조정 중이라는 걸 알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서신을 드린다고. 부디 그녀의 리히덴 행을 허락해 달라고 말이다.

레이라는 그 이유로 빗발치는 청혼서와 무작정 찾아오는 이들을 들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로이드는 당장 국경을 넘는 것을 허락한다고 답했다.

청혼서는 물론이요, 그녀를 찾는 모든 이들이 무척이나 거슬리던 참이었으니까.

그녀 혼자는 절대로 허락할 리 없으니, 호위 기사인 에반과 동행하게 되었다.

리히덴 쪽에도 입국 절차를 밟으니, 무슨 일인지 2황자 루이스가 무척 그녀를 반겼다.

숲을 되돌린 이후로는 자신을 반기는 이들을 경계하게 되었지만.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국경의 숲을 넘어 리히덴 제국으로 들어서자 에반이 레이라에게 물었다.

“본래라면, 제도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말끝을 흐린 레이라는 입국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2황자에게 받은 서신을 떠올렸다.

“콜키 지역 쪽으로 먼저 가죠.”

“예, 아가씨.”

에반은 곧장 마차를 구해, 콜키 지역으로 가 줄 것을 부탁했다.

국경의 숲에서 곧장 콜키 지역으로 향한 레이라는 익숙한 풍경이 보이자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땐 정말이지 앞이 캄캄했다.

폭풍우에 휩쓸리고 겨우 살았다, 싶었더니 리히덴 제국이었으니까.

항구도시로 곧장 간 레이라는 에반과 함께 느긋하게 도시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마음 편히 보내는 휴가가 얼마 만인지.

저를 찾아오는 이들도, 파티 초대장도, 청혼서도 없으니 평온했다.

“아, 예쁘다.”

걸음을 옮기던 레이라는 바다 빛으로 빛나는 장식품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깊고 푸른 심해를 닮은 색이 아르제오의 머리칼을 떠올리게 했다.

싱긋 웃은 그녀는 곧 다시 걸음을 뗐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좋죠. 이렇게 여유로운 건 오랜만이라서요.”

그리고 오랜만에 리히덴에 다시 오니 퍽 기분이 좋았다.

다시 아르제오를 만날 생각에 들뜨기도 했지만.

“이곳에는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겁니까?”

주변을 살피던 에반이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레이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거슬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눈물이 잔뜩 고인 아직 앳되어 보이는 여자를 붙들고 지나던 사람.

“어….”

한눈에 보아도 두려움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은 곧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레이라가 걸음을 멈추자 에반이 서늘한 시선으로 골목을 훑었다.

“뒤쫓을까요?”

“네.”

“아가씨는 여기 계세요.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에반은 다급히 골목으로 달려갔다.

떨어지면 호위를 할 수 없게 되겠지만, 그 앞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에반의 모습은 금세 보이지 않았고 레이라는 근처 상점 근처에 서 있었다.

에반을 기다리며 지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는데, 조금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만히 서서 특정 위치를 줄곧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 시선을 따라 그녀도 고개를 돌리는데, 에반이 돌아왔다. 울먹이며 끌려가던 여인과 함께.

“에반 경, 괜찮아요?”

“예, 아가씨. 일단은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요.”

두 사람은 여인을 데리고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잡은 숙소로 데려갔다.

“다른 곳도 괜찮겠지만, 누가 들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무래도 여기 같아서요. 괜찮나요?”

“네,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여자는 훌쩍이며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자신을 구해 준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조심스러운 레이라의 질문에 여자는 불안한지 손끝을 잘게 떨었다. 요동치는 눈동자를 보며 레이라는 슬쩍 에반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씀하시기 힘드시다면….”

“아니, 그게 아니에요…. 막상 말하려니 조금 긴장해서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레이라가 설핏 미소 지으며 손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자, 여자의 마음이 천천히 진정됐다.

“저는, 이 항구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조심스럽게 입을 연 그녀는 자신을 사라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 도시가 고아들에게는 얼마나 살아가기 힘들고 험악한 곳인지도.

그녀는 다행히도 좋은 시설 원장을 만나 무탈하게 자랐다고 했다.

좁고 허름하지만, 머물 곳도 마련해준 고마운 분이시라고.

하지만 가난으로 시설은 와해하였고, 도움을 받아 일찍이 자리를 잡은 그녀가 동생 몇 명을 맡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끌고 가던 사람은 꽤 오래전부터 이 도시에 자리를 잡은, 인신매매범이라고.

“……”

표정을 굳힌 레이라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며 사고팔다니.

“동생들이 붙잡혀 있어요. 그래서 제가 도망칠 수 없는 걸 아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사라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래서…. 아까는 동생들을 빌미로 제게 몹쓸 짓을 하려고 끌고 가던 거예요.”

동생들을 두고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라의 얘기를 들은 레이라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일전에 리히덴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아르제오의 말대로 이곳은 너무나 병들어 있었다.

“치안대의 도움도 받지 못할까요?”

설마 하는 생각에 레이라가 묻자, 사라가 눈물을 그렁그렁 맺고는 고개를 저었다.

“다들 알아요, 이 장사를 하는 사람이 누군지…. 이런 변방은, 치안대도 아무런 힘이 없어요. 치안대는 황태자 전하께서 관리하시지만, 이런 먼 곳은 가까운 귀족이 더 무서운 법이거든요.”

억울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뜻이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레이라를 보며 에반은 이마를 짚었다.

리히덴의 상황이 이렇게 눈으로 보니 예상보다 심각했다.

황권이 강하지 않으니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 터다.

점점 자신만 알고 돈이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고통받는 건 백성들뿐이었다.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팔려 나갈 처지라도, 그런 몹쓸 짓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만 가 보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사라를 보니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구해 달라고도 하지 않아서.

그녀는 이미 자신의 처지를 체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라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이곳에, 아르제오가 와 있다고 2황자가 말했으니까.

“인질들이 잡혀 있는 곳은 어디죠?”

인질들을 구출하러 가기에는 턱없이 인원이 부족했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다고는 하나, 호위 기사 한 명에 귀족처럼 보이는 아가씨 한 명.

인질들의 위치를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높은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녀의 명령으로 치안대가 움직여 준다면.

아마도 이번 장사가 실패로 돌아가도 장사는 계속될 터였다.

그래도 지금 도움을 받는다면 제 동생들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레이라에게 말했다.

“거래하는 상인이 이미 이 도시에 당도해 있어요. 지금은 사람들을 조금씩 배로 몰래 옮기고 있고요. 하지만 그것도 거의 끝나서 곧 거래를 마치고 출발할 거예요.”

“배로 옮기고 있다면, 항구로 가면 되겠군요.”

턱을 매만지는 레이라를 보며 에반이 걱정스러운 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가씨, 하지만 이 인원으로는….”

“괜찮아요.”

에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이라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지금 이 항구도시에는, 아르제오가 와 있을 테니까. 분명 이 일을 해결하려 움직이고 있을 테고.

그뿐만 아니라, 레이라는 지금 ‘그릇’이 늘어난 상태였다.

마냥 걸리적거리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냥 거기에 우리도 같이 움직이자는 거니까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레이라는 아직 앳된 얼굴의 사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배 위치만 알려 주고, 일단은 여기 숨어 있어요. 동생들은 우리가 가서 구해 올 테니까.”

“…구해 주시겠다고요…?”

부드러운 레이라의 목소리에 사라의 눈에는 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왜요…?”

그리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제게 상냥했던 어른은 시설의 원장님뿐이었다.

이곳에서는 선하면 빼앗기고, 착취당했다.

고아는 이용하기 쉬운 도구에 불과했다. 제게 친절을 베풀 때는 다 이유가 있었다.

불안함이 담긴 표정에 레이라는 살포시 사라의 손을 붙잡았다.

“전 사라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몰라요. 하지만 앞으로 남은 수많은 날 중에, 사라도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할 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줘요. 그럴 수 있죠?”

“정말…. 그런 이유로 절 도와주신다고요…?”

쉬이 믿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인생을 살아온 건가 싶었다. 아직 젊은데 말이다.

“이유가 필요하다면 알려 줄게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리히덴 제국을 무척 아끼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 제국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싶어서요.”

사라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 레이라는 몸을 돌렸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가서 동생들을 데려올 테니까요.”

사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레이라와 에반은 숙소를 나섰다.

아직 날은 밝았다. 숙소를 나서자마자 레이라는 멈춰 서서 생각에 잠겼다.

“어쩌시겠습니까?”

“제오가 이곳에 와 있어요. 저 아이 말대로, 그런 일이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다면, 아마 그 일을 해결하러 왔을 거예요.”

“아가씨의 은인 말씀이십니까?”

“네. 그쪽과 먼저 접촉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지만….”

말끝을 흐린 레이라가 주변을 훑었다.

“이 도시를 뒤져 찾을 시간은 없어요. 그러니까 곧장 항구로 가죠. 그쪽에 인질들이 있다면, 그리로 올 테니까요.”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제겐 아가씨의 안위가 최우선입니다.”

단호한 에반의 말에 레이라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먼저 걸음을 뗐다.

“그럼 에반 경을 믿고 전 인질 구출을 최우선으로 할게요.”

두 사람은 먼저 항구로 향해 배들을 살폈다. 어느 배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항구의 상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다음은, 상황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자, 배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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