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 *
그저 돈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졌을진대, 고개를 젖히고 위만 보며 더욱 갈망하는 이들이.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도 특히나 지독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 외에는 모두 그저 도구로 여기는.
“물건들은 이른 시일 내에 넘겨.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한몫 단단히 챙겨야지.”
그렇게 말한 게링 백작은 서늘한 눈으로 철창 너머의 사람들을 훑었다.
그는 낮게 혀를 차더니 중얼거렸다.
“황태자가 바뀌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빨리 끝낼 필요는 없었는데.”
쓸모없는 것.
나직하게 덧붙인 말에 반박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돌아오는 건 매질뿐일 테니.
“꼬리 잡히지 않게 잘 감시해.”
“예.”
“혹시라도 낌새가 보이면, 미리 일러둔 대로 처리하고.”
백작의 지시에 사람들을 가둔 감옥 앞에 선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예, 주인님.”
* * *
“지겹다, 지겨워.”
필의 보고를 들은 아르제오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리히덴이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는 뜻이겠죠.”
곁에 함께 있던 유진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어딜 가나 어둠을 틈타 이런 짓을 벌이는 이들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귀족이 황족의 뒤에서 이런 짓을 꾸미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만큼 이 제국 곳곳이 곪아 있다는 뜻이니까.
“우리도 움직이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아르제오는 슬쩍 목에 건 펜던트를 힐끔거렸다.
유진이 포레스티아 공작가에서 떠나올 때 레이라에게 그와 연락할 수단인 아티펙트를 건네주고 왔다.
몇 번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게 얼마 전부터 뚝 끊어졌다.
청혼서가 빗발치는 와중에 연락이 되지 않으니 더 속이 탔다.
“아직도 소식이 없으십니까?”
“…넌 왜 이쪽에서는 연락할 수 없는 이런 아티펙트를 고른 거냐.”
“제 탓입니까?”
“네 탓이다.”
쓸데없는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필이 눈을 도르륵 굴리고는 덧붙여 말했다.
“그러고 보니, 게링 백작의 손에 최근 백금발을 가진 여인도 붙잡혔다고 했던 것 같네요.”
“……”
걸음을 떼던 두 사람이 고개를 홱 돌려 필을 돌아보았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지금 말씀드렸잖아요.”
“유진, 바로 간다.”
“예, 전하.”
두 사람이 무서운 얼굴로 온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필이 키득거렸다.
백금발을 가진 여자가 붙잡힌 건 사실이었다. 다만 그게 레이라가 아니었을 뿐.
“말도 끝까지 안 듣고 가시네.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오해라는 걸 알면서도 해명하지 않은 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곧 아르제오가 지시한 일을 위해 움직였다.
* * *
제도에서 한참 벗어난 레이라를 처음 발견했던 콜키 지역.
아르제오와 유진은 그곳의 항구도시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그 좁은 해안가 근처에 다다랐을 땐, 아르제오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느긋하게 그 해안가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필에게서 들은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한시가 급했으니까.
콜키 지역까지 향하는 도중, 유진은 필의 장난을 눈치챘다.
백금발이 흔한 머리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니, 붙잡힌 여자가 레이라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일 가능성은 오히려 희박했다.
하지만 덕분에 아르제오의 의욕이 하늘을 찌르니 유진은 잠자코 있었다.
항구도시에 도착한 두 사람은, 미리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이스의 기사들과 접촉했다.
“위치는? 파악했나?”
기사들을 보자마자 다급히 묻는 아르제오의 태도에 그들은 조금 당황했다.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했지만, 지금 당장 덮치기에는 도망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도 거래 날짜와 위치는 특정했으니, 놓치지는 않을 겁니다.”
루이스가 맡긴 일을 위해 이곳에 제일 오래 있던 것이, 이곳의 기사들의 책임을 맡은 빅터였다.
인질들 무사 구출이 최우선이었으니 빅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아르제오는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럼 인질들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거군.”
“송구합니다. 하지만 당장 인질들을 수색하면 배후가 도주할 우려가 있어서 조용히 움직여야 할 듯싶습니다.”
“그렇겠지.”
아르제오는 빅터의 말에 동의했지만, 그것과 초조함은 별개였다.
제 머리를 마구 헝크는 것을 보며 유진이 나섰다.
“거래 날짜와 위치는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조용히 인질을 추적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 보좌관님.”
서둘러 얘기를 마무리 지은 유진은 아르제오의 등을 떠밀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전하.”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만약 붙잡힌 게 정말….”
“발루아에 계실 분이 여기 왜 붙잡혀 있습니까? 놀리려고 한 말일 겁니다.”
“…….”
유진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생각을 정리한 아르제오는 이제껏 그것 하나 눈치채지 못했다는 생각에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레이라가 연관되었다고 생각하니 사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돌아가면 반쯤 죽여 놔야겠어.”
“동의합니다.”
유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진정이 되는지 아르제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일단 인질 추적을 계속하지.”
“예, 전하.”
사라진 사람들의 수는 총 열두 명이었다. 그것도 파악된 것이 그렇다는 것이지, 확인되지 않은 수였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있다면 더욱 긁어모으려 들 터.
실종, 혹은 연고가 없어 보이는 길거리의 사람들을 전부 데려갔을 것이다.
그들은 인질을 가둔 곳으로 추정되는 곳 근처를 신중히 감시했다. 기척을 죽인 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이 있는지 관찰했다.
게링 백작은 사람 장사를 해서 큰돈을 만진 작자였다.
주로 연고가 없는 이들이나 떠돌이, 납치한 이들이 그에게 붙잡혀 팔려나갔다.
노예 제도는 폐지된 지 오래였지만, 아직 존재하는 나라들도 있었다.
그 나라들에 노예를 팔아넘기면 큰돈이 되었고, 이를 암암리에 일삼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게링 백작처럼.
루이스는 인신매매를 제일 먼저 몰아낼 계획을 세웠고, 그를 위해 아르제오가 움직였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로렌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금 둘의 위치는 아주 모호했다. 정식 황태자로서 계승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로렌스는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러니 귀족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바삐 움직였다. 특히나 로렌스의 뒤에 숨어 헛짓거리하던 이들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기 전에 한몫 단단히 챙기기 위해.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르제오도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붙잡으려는 게링 백작은 배편을 이용한 거래를 주로 하는 사람이었다.
바다 건너에서 상인이 물건을 전하러 오는 것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들이 물건을 내리면, 그 배에 붙잡은 사람들을 태워 보내 버리는 것으로 끝이었다.
배를 타고 오는 상인은 중간 심부름을 하는 이라, 사람들을 넘겨받으며 돈을 지불하니 게링 백작은 불만이 없었다.
빅터와 기사들이 인질을 잡아 둔 곳을 감시하는 사이, 아르제오와 유진은 항구를 점령했다.
조용히 지켜보다가 확실한 증거를 잡으면, 그때 덮칠 계획이었다.
이 항구에서 그 어떤 배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면 인질들을 구출할 수 있을 테니.
* * *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기다리던 배가 항구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유진.”
“예, 전하.”
항구 쪽을 둘러보던 아르제오가 유진을 나지막이 불렀다.
“준비는 마쳤겠지?”
“말씀하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그래.”
상인의 배가 도착한 건 이미 확인했다. 인질들은 조금씩 일꾼으로 위장시켜 배에 태우는 것 역시 확인했다.
다만 그 인원을 한 번에 태운다면 의심을 살 테니, 소수로 나뉘어 태우니 시간이 조금 걸렸다.
물건 옮기기가 끝나면 반드시 게링 백작이 나타날 터였다. 돈은 직접 받는 것을 선호했으니.
그리고 아르제오와 빅터가 기다리는 것도 그때였다.
게링 백작은 낮에는 사람이 많이 다니니 밤 중을 노렸다.
인질이 잡혀 있는 걸로 추정되는 배는 두 척. 백작과 거래하는 상인이 일꾼들을 데려간 배들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의 예상대로 게링 백작이 나타났다.
명목은 항구 주변을 살피는 정기순찰이었지만, 실상은 거래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호위 기사와 함께 나타난 게링 백작은 다른 배들도 슬쩍 훑는 시늉을 했다.
어둠 속에서 게링 백작을 주시하던 그들은 백작이 배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고 움직였다.
“여기서 나눠서 움직이지.”
“예, 전하.”
두 척 모두의 인질을 구조해야 했으니 그들은 둘로 나뉘어 배로 향했다.
한쪽은 빅터, 그리고 다른 쪽은 아르제오와 유진이 가기로 했다. 나뉜 기사들을 데리고 어둠 속에서 각자 배로 숨어들었다.
아르제오가 향한 건, 게링 백작이 들어선 배 쪽이었다.
항구 외곽 쪽에는 그들을 연행할 치안대도 이미 대기 중이었다.
배 안쪽으로 들어서니 사람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것까지 진부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아르제오가 낮게 중얼거리니 유진이 앞으로 더 나서며 말했다.
“안내하겠습니다, 전하.”
인질이니 어딘가 으슥한 곳에 가둬두었을 것이 빤했다.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유진은 척척 배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꾼으로 위장하여 배에 오른 사람들과 게링 백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구냐!”
곁에 있던 게링 백작의 호위가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게링 백작님.”
유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백작이 중절모를 살짝 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벌써 눈치채고 쫓아왔군.”
“예상하셨던 모양이군요.”
“3황자 전하의 보좌관이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유진의 뒤에선 아르제오를 훑은 게링이 혀끝으로 제 입술을 핥았다.
탐욕이 가득한 자라고, 전부터 그리 생각했었다. 아르제오가 로렌스를 위해 제국을 떠돌 때도.
게링은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내가 온 게 다행이라는 건가?”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가만히 물러나 있던 아르제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으니, 게링은 그제야 예를 갖췄다.
그러면서도 불손한 시선으로 아르제오를 응시하며 미소를 드러냈다.
“3황자 전하께서 오신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만만하다는 거네.”
“그럴 리가요!”
게링은 부러 가증스럽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입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러나 3황자 전하시라면, 절 잡는 걸 망설이실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