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68)화 (68/122)

<68화>

“네, 네, 알겠습니다.”

“‘네’는 한 번만 해.”

“예, 예, 알겠습니다.”

“죽을래?”

“살고 싶습니다.”

영양가 없는 말씨름에 아르제오가 귀찮다는 내색을 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귀족들의 움직임은?”

“예상하신 대로죠, 뭐. 황태자…. 1황자 전하만 믿고 설치다가 상황이 바뀌니 꼬리를 자르고 있던데요.”

“썩은 놈들은 도려내야지. 리스트 작성해서 올려 줘.”

“전하께서 나서시면, 1황자 전하는 더더욱 전하를 적대시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필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 말에 아르제오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반발하는 귀족들을 그가 나서서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로렌스의 뒤에 숨어, 몰래 헛짓거리를 하던 이들은 치워야 했다.

로렌스는 그의 권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그들을 모른 척 그냥 두었다.

하지만 루이스의 제국에서 그런 이들은 사라져야 했다.

“…어차피 떠날 텐데, 뭐.”

“정말 공작령으로 가시려고요?”

필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내 자리는 이제 거기야.”

나지막한 한마디를 툭 내던진 아르제오는 곧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빨리 가져와. 일을 서둘러 끝내야 하니까.”

“공녀님이 새로운 신랑감을 들이기 전에 말이죠?”

“그 주둥이가 이제는 쓸모없는 모양이지? 꿰매 주랴?”

“그럴 리가요.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전 전하의 보좌관이 아닌데 말이죠. 이렇게 당연한 듯이 일을 시키시니….”

주절주절 떠드는 필을 보며 아르제오가 테이블에 툭, 돈주머니를 올려놓았다.

“간다.”

“예, 살펴 가세요!”

신이 난 얼굴로 주머니를 받아드는 필을 뒤로하고 아르제오는 온실을 나섰다.

걸음을 옮기던 그는 자꾸만 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움직이면, 로렌스가 더욱 자신을 적대시하지 않겠냐고.

‘…적대시라. 그것만으로 끝나면 다행이지.’

그리 긴 시간, 로렌스와 루이스 사이에서 고민했었던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여전히 로렌스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본래 그의 자리라고 주변은 늘 그렇게 떠들었다.

로렌스 역시 그 자리를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루이스가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후로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나빠졌고, 그 사이에서 아르제오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그에게는 형제였으니.

루이스와 로렌스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가치관의 차이라서 어느 한쪽이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필의 말대로, 아마 이후로 아르제오가 어떤 움직임을 취하든 로렌스는 그를 적대시할 터였다.

하지만 아르제오에게는 이제 더욱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저 황위 다툼을 벌이는 형제들의 사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망설임 없이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생각이었다.

물론 매일 레이라를 향해 빗발치는 청혼서는 거슬리기 그지없었지만.

숲을 되돌린 힘을 탐내는 것이 너무나도 빤해서 울화가 치밀었다.

그런 것들에 레이라가 넘어갈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초조해지는 건, 과연 청혼서만 달랑 보내고 마는 놈들뿐이냐는 거였다.

분명 제국까지 방문해, 그녀를 찾아가는 놈들이 있을 터였다. 그걸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저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에 한숨만 나올 뿐.

* * *

아르제오의 걱정처럼 레이라에게는 청혼서가 빗발쳤다.

그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그녀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 진정하지 못하고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폐하.”

로이드의 시선은 서류를 향해 있었지만, 내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폐하.”

세실이 두 번째로 그를 불렀을 때에서야 로이드가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지?”

“조금 되었습니다.”

“그렇군.”

로이드는 어쩐지 머쓱해서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일전에 말씀하셨던 일, 처리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보고하는 세실의 표정은 평온했다.

이야기를 듣는 로이드의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처리해.”

“예, 폐하.”

두 사람의 짧은 대화로, 엘라의 앞날이 결정되었다.

로이드의 뜻대로 세실은 황후의 자리를 비울 것이고, 엘라는 황궁에서 쫓겨날 터였다.

발악할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결국엔 로이드의 뜻대로 될 터였다.

하지만 엘라는 그의 뜻대로 될지 몰라도, 레이라는 아니었다.

로이드는 그게 제일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벌인 일이니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 * *

“아가씨, 오늘도….”

아르제오의 예상대로 레이라는 정말이지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청혼서가 매일같이 날아들고, 무턱대고 저택을 찾아오는 무례를 저지르는 이들까지 넘쳐났다.

레이라가 시타델 섬으로 가기 위해 저택을 나서면, 그들이 앞을 가로막고 제발 한 번만 만나 달라 애원했다.

또다시 청혼서를 한가득 들고 나타난 로라를 보며 레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라도 질린 얼굴로 테이블에 청혼서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우리 아가씨가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슬쩍 테이블 위를 힐끔 바라본 레이라는 곧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이제부터 섬에 가시나요?”

“응, 그러려고.”

“그…. 음….”

방을 나서려는 레이라를 보며 로라가 난감한 듯이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 얼굴에 레이라는 이마를 짚었다.

“또 있니?”

“네…. 또 있습니다.”

“후….”

로라의 대답에 레이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혼서만으로도 질리는데, 최근에는 저택까지 찾아오는 이들이 늘어났다.

레이라는 단호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그들 역시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어쩌시려고요?”

“저들이 안 가겠다면, 내가 가야지.”

“네?”

“일단은 섬에 다녀올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라를 뒤로하고 레이라는 공작저를 나섰다.

“공녀님,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번만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저리 비키시오! 제가, 제가 더 오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디 저희 왕자님을 한 번만 만나 주세요!”

그녀가 탄 마차가 공작저를 나서니, 너도나도 소리치며 들러붙었다.

이렇게 매일같이 공작저 앞으로 몰려오는 이들은 대부분 제가 모시는 이들을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이 힘이 뭐라고.’

저들이 원하는 바는 빤했다. 불타버린 국경의 숲을 혼자 힘으로 되돌렸으니, 그 힘을 탐내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국경에도 그녀의 힘으로 같은 숲을 만들기 위해.

하지만 레이라는 그런 게 정말 가능한지도 알지 못했다.

“위험하니 저리들 비키시오!”

“공녀님! 답을 주실 때까지 저희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마부와 저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목소리에 레이라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차분한 얼굴로 마차 문을 열었다.

“아가씨.”

곁에 있던 호위가 말렸지만, 레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부디 한 번만…!”국경의 숲만 있다면 자신들의 나라 역시 발루아 제국처럼 강대국이 될 거라는 믿음.

덤덤한 얼굴로 애원하는 그들을 훑은 레이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 무례인 것은 아시는 건가요?”

“오죽 간절하면 이러겠습니까! 무례인 것을 알면서도 찾아온 겁니다!”

“찾아오면 뭐가 달라지나요?”

서늘한 그녀의 물음에 애원하던 이들이 전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분들을 제가 만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그건 만나 보시기 전에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만나서 달라지는 일이 없으면요? 거기에 할애한 제 시간은 어떻게 보상하실 거죠?”

“그건….”

“전 약초 일로 바빠서 먼저 가 볼게요. 앞으로도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공녀님…!”

포기를 모르는 그들을 보며 레이라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지 않으신다면, 포기를 모르시니 찾아오실 수 없는 곳으로 제가 가는 방법도 있어요. 그럼.”

그렇게 말한 레이라는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처음에는 난감한 얼굴로 상냥하게 돌려보냈던 그녀지만, 찾아오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레이라의 태도 역시 단호해졌다.

레이라가 다시 올라타자 마차는 가차 없이 출발했다.

한참을 기다렸던 그들은 허망한 얼굴이었지만, 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매일 섬으로 가기 위해 저택을 나서면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에, 레이라는 지쳐 있었다.

이마를 짚은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네.’

매번 아무리 단호하게 말해도 저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마도 그만큼 간절히 그녀의 힘을 원하는 걸 테지만.

국경의 숲은 긴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 그녀의 힘으로 만든 곳이 아니니, 저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녀의 힘으로 숲을 만든다고 한들, 국경의 숲처럼 안내자가 필요한 곳이 아닐 테니.

마차에서 배로 갈아타고 시타델 섬으로 들어선 레이라는 열심히 약초를 돌보았다.

그리고 레이라는 섬의 저택에서 지내며 약초를 돌보는 일을 하던 정원사를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호엔, 당분간 내가 없어도 혼자서 약초들을 돌볼 수 있나요?”

“약초들이 이제는 이 섬에 적응해서 단기간은 괜찮을 겁니다. 새로운 약초를 늘리는 건 어렵지만요.”

“그럼, 당분간 약초는 호엔에게 맡길게요.”

“아가씨 어디 가세요?”

“잠시 자리를 비우려고요.”

도대체 어딜 가신다는 말인지 의문이었지만, 호엔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공작저에 알려 주세요. 연락 수단을 남겨 놓고 떠날 테니까요.”

“예, 아가씨.”

호엔의 대답에 싱긋 웃은 레이라는 떠나기 전, 다시 약초밭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몸을 낮춰 땅을 짚어, 청록빛을 듬뿍 흘려보냈다.

당분간 자신이 돌보지 못할 테니 잔뜩 생명 가득하도록 힘을 머금도록.

시타델 섬 전체에 힘을 잔뜩 쏟아 낸 레이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 손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역시.’

국경의 숲을 되돌린 이후로 확실히 제힘에 변화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릇이 조금 더 커진 느낌이랄까. 전엔 이만큼의 힘을 쓰면 금세 체력이 떨어져 어지러웠는데 말이다.

어쩐지 한 단계 더 나아간 기분이라서 퍽 괜찮았다.

싱긋 웃은 레이라는 가뿐히 몸을 돌려 천천히 섬을 벗어났다.

‘자, 그럼 이제 가 볼까?’

자신을 보면 깜짝 놀랄 모습을 상상하며, 그녀는 가볍게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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