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폭신한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레이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잠은 푹 잔 기분이었는데,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레이라, 정신이 들어?”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레이라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곁에 가까이 다가선 로이드가 보였다.
“폐하…? 여긴 어떻게….”
“숲에 쓰러져 있었다.”
로이드는 그녀를 데려온 것이 아르제오라는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쓰러진 자신을 발견하고 숲을 지나 데려다주었다는 것을 안다면, 분명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할 테니.
로이드는 아르제오가 어딘지 꺼림칙했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기분도 들고, 로렌스가 했던 말도 거슬렸다.
그러니 레이라와 아르제오 사이에 아무런 접점도 없기를 바랐다.
로이드의 말에 레이라는 잠시 혼란스러운 듯 눈을 도르륵 굴렸다.
“숲은 당신 덕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행이네요.”
복원을 시작했을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이후의 기억이 모호했다.
잠시 기억을 되짚으려던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어디가 좋지 않은가?”
“아, 아니에요. 폐하께선 어찌 여기에 계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로이드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그대가 괜찮은 걸 확인해야 일이 손에 잡힐 듯해서.”
그 대답에 레이라는 곤란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곧 나지막이 로이드를 불렀다.
“폐하.”
“그럼 이만 가지.”
레이라의 표정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읽은 것인지, 로이드가 급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폐하, 잠시만요.”
그런 그를 붙잡으려 레이라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니, 로이드는 그냥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그녀를 살짝 붙잡으며 다시 침대에 앉혔다.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의사도 안정을 취해야 한다더군.”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중에.”
“지금 말씀드릴게요.”
“꼭 그래야겠나?”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라를 보며 로이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그러진 표정이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런 얼굴을 보니 더욱 말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레이라는 더욱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말했다.
“황궁에 황후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
로이드는 그 물음에 긍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작 제 상태가 궁금하여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으시면 황후께서 마음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로이드는 지금 이 순간만큼 엘라를 황후를 들인 걸 후회한 적이 없었다.
홀든가를 집어삼키기 위함이었고, 문제가 된다면 치우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 자리를 비우기 위해 준비 중이기도 했고.
하지만 레이라가 저렇게 말하니 마음 깊이, 엘라를 황후로 들인 것을 후회했다.
거슬러 올라, 애초에 그녀를 버린 것부터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신경 쓰지 말란다고, 그럴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저는 이 이상 그분과의 마찰을 원하지 않아요.”
레이라의 말에 로이드는 입술을 짓씹었다.
일전에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던 때, 엘라와 나누었다는 대화를 떠올려서였다.
엘라가 레이라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대화에서 제일 충격이었던 건, 레이라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고 했던 엘라의 발언이었다.
이후 로이드는 초조함에 시달렸다.
처음부터 제게 기회가 다시 올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마저 사라지는 것이었다.
레이라에게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대답을 듣는 게 두려웠으니.
“…앞으로 황후와 마찰이 생길 일은 없을 거다.”
로이드가 겨우 내어놓을 수 있는 대답은 그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레이라는 거절의 말이었지만, 로이드의 대답은 곧 엘라가 황후의 자리를 내려놓게 될 것을 뜻했다.
“이만 갈 테니, 푹 쉬도록.”
레이라가 예를 갖추는 것을 보며 방을 나서려던 로이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숲 복원도, 수고했다. 덕분에 국경의 숲을 잃지 않게 되었으니. 그럼.”
로이드는 도망치듯이 방을 나섰다.
그녀는 자신이 한 일에 ‘잘했다’, 혹은 ‘고맙다’라는 인사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매년 잠을 못 자는 그를 위해 꽃을 말리면서도.
물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을 뿐.
하지만 그게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는 도구로 이용당했을 땐, 그저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것을 이제껏 붙들고 있었구나, 싶어서.
로이드가 방을 나서자 곧이어 헤레이스와 공작 부부가 뛰쳐 들어왔다.
“괜찮은 거니?”
공작 부인, 데이지가 울먹이며 레이라의 뺨을 매만졌다.
정말 괜찮은 것인지 먼저 확인한 세 사람은 그녀가 싱긋 웃으니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요, 설마 제가 잠든 내내 폐하께서 여기 계신 건 아니죠?”
가슴을 쓸어내리던 세 사람은 찰나 숨을 멈췄다.
서로 눈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레이라는 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 그게….”
에드가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아니에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숲은요? 괜찮죠?”
“그럼요, 누님 덕에 국경의 숲은 안전합니다.”
그 길고 긴 숲의 역사가 끊기지 않은 것을 진정으로 다행스럽게 여겼다.
숲의 일은 해결되었으니, 어쨌든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약초는요?”
“누님, 그건 지금 신경 쓰지 마시고 조금 더 쉬세요.”
시타델 섬의 상황을 묻는 레이라를 헤레이스가 침대에 눕혔다.
“열이 났었으니 의사가 당분간은 푹 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추운 날 숲에 쓰러져 계셨으니 열이 나지요.”
“이스가 날 데려온 거야?”
“아니요. 은인께서 누님을 모시고 나타나셨습니다.”
“제오가?”
얘기를 들은 레이라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 숲을 그럼, 제오 혼자 지난 거야?”
“그런 셈이죠. 누님께서는 쓰러져 계셨으니까요.”
헤레이스의 대답에 레이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포레스티아의 안내 없이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숲이었다. 악몽과도 같은 환영에 시달릴 테니까.
게다가 아르제오는 그 끔찍한 환영에 시달린 경험도 있었다. 숲에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로.
눈썹을 늘어뜨리는 레이라를 보며 헤레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후에 곧장 다시 돌아가셨고, 리히덴으로 향하실 때는 저희 기사가 안내했다고 합니다.”
“이제껏 무사히 숲을 빠져나온 이가 없었으니 일단은 그 일을 본 이들의 입단속은 해 뒀다.”
에드가가 덧붙인 말에 레이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아무 생각 말고 쉬렴.”
데이지는 레이라를 토닥이며 다른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고는 푹 쉬라며 세 사람은 방을 나섰다.
아르제오가 홀로 숲을 건넜을 걸 생각하면 걱정이 앞섰지만, 지금은 그가 리히덴의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걸 기다려야 했다.
* * *
리히덴은 타국과 교류가 많은 나라였다.
상인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타국의 소식을 빨리 접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리히덴으로 돌아간 아르제오는 일이 모두 해결될 때까지 자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정리된 뒤에 공작령으로 떠나야겠다고.
그런데 필을 통해 묘한 소문을 접한 것이다.
국경의 숲이 불길에 삼켜져 완전히 망가졌던 소식은 빠르게 대륙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 방대한 숲을 혼자 힘으로 되돌린 것이 레이라 포레스티아라고.
국경의 숲의 존재가 알려진 만큼, 그녀의 존재가 주목받았다.
폐위되었다고는 하나, 황후였던 사람. 게다가 그런 능력을 가진 공녀.
대륙 곳곳에서 그녀를 향한 청혼서가 빗발쳤다.
그러니 리히덴에 머물던 아르제오는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애가 타서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 전부였지만.
“오늘은 제르바 왕국에서 청혼서가 도착했다던데요?”
“시끄러워.”
“기분 탓일걸요? 전 딱히 시끄럽게 말하지는 않아서.”
아르제오는 키득거리는 필을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노려보는 것보다 피로감이 더 커서 눈을 감기로 한 것이었다.
이 이상 놀렸다가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것 같아서 필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그렇게 초조하시면서 왜 안 가세요?”
필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한 번 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도에 있는 필의 온실에 늘어져 있는 중이었다.
“땅 꺼지겠어요.”
“꺼져 버렸으면.”
“저요? 저한테 하는 말 아니죠?”
“…….”
“땅 말한 거죠?”
“좀 조용히 해.”
“그러게, 왜 안 가시냐니까요?”
필은 온실을 관리하러 온 직원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자리를 비우게 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턱을 괴며 말했다.
“역시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으십니까?”
“아직 안정되지 않았어. 유진도 내가 이곳에 필요하다고 하고 있고.”
“이렇게 절 찾아오셔서 빈둥거리고 있는데요?”
“…….”
입을 꾹 다무는 아르제오를 보며 필이 픽 웃었다.
국경의 숲이 불탔던 일로부터 벌써 수일이 지났다.
결과적으로 평화협정으로 포레스티아의 호의를 얻은 건 루이스였기 때문에, 로렌스는 황태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 아르제오는 리히덴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건 압도적으로 로렌스였다.
게다가 오랜 시간 아르제오를 이용해서 민심도 어느 정도 사로잡은 상태였다.
반면 루이스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를 지지하는 평민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힘이 없었다.
루이스의 강점이라고 한다면,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기사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귀족 중에서는 기사 가문만이 로렌스 대신 루이스를 지지했다.
이런 상황에 자신이 떠나면 루이스가 너무 불리해질 터였다.
“하지만 2황자님께서는 가라고 하셨죠? 아, 이제 황태자 전하라고 불러야 하나?”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지금은 못 가.”
하지만 상황이 그런 것과 별개로, 아르제오는 애가 탔다.
매일같이 여기저기서 레이라에게 청혼서를 보내 대고, 발루아의 황제 역시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와서 뻔뻔하게 말이지.’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머리를 헝크는 아르제오를 보며 필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그렇고. 안부는 이 정도면 됐으니까 이제 슬슬 본론을 말씀하시죠?”
그 말에 아르제오는 테이블에 턱을 괴며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나한테 할 말은 네가 있는 거 아냐?”
도르륵 눈을 굴린 필이 다시 어깨를 으쓱였다.
아르제오는 표정 변화도 없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고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