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66)화 (66/122)

<66화>

그 미소와 이 접촉은 반칙이라고 생각하며 아르제오가 제 눈가를 덮었다.

“너무 멋있잖아. 또 반했어.”

“어머,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하네요.”

“부끄러운 말을 듣는 사람 표정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손가락 사이로 레이라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를 보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래도 더 큰 전쟁을 막았어요. 희생자를 최소화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희생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이미 몇 차례 전투가 벌어졌던 터라.

그래도 이번에 평화협정이 불발됐다면, 더 큰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야말로 어느 한쪽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 전쟁.

“잘 해결될 거야.”

“그래야죠. 그러니까 어서 가서 해결해요.”

레이라의 말에 아르제오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엔 정식 절차를 밟고 만나러 갈게.”

“기다릴게요.”

아르제오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걸음을 뗐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멈춰 서더니 빙글 몸을 돌려 다시 다가왔다.

그러더니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 레이라에게 바짝 다가서 입을 맞췄다.

놀라서 동그랗게 떴던 눈은 서서히 감겼고, 찰나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다녀올게.”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를 남긴 아르제오는 그대로 멀어져갔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레이라는 가만히 그곳에 서 있었다.

불길이 망가뜨린 숲속 한가운데에.

그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을린 나무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천천히 나무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지켜 주지 못해서.”

비가 내리기 전까지 며칠이나 불길 속에서 괴로웠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잠시 나무를 매만지던 레이라는 다시 몇 걸음 물러났다.

이쯤 시간이 지났으면 모두가 숲을 빠져나갔겠지.

‘시작해 볼까.’

국경의 숲 역사는 길었다.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역사보다도 더 길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국경의 숲은 굳건히 그 자리 지켜 왔다.

단 한 번도 훼손된 적 없었고, 덕분에 공작가는 국경을 수호하는 존재로서 자리했다.

숲에서 길을 잃지 않는 건 포레스티아의 이름을 지닌 이들뿐이었으니.

시간이 지나며 포레스티아의 문장을 단 기사들도 정해진 길로는 다닐 수는 있게 되었다.

그리 긴 시간 동안 포레스티아를 지켜 주었는데, 정작 자신들은 숲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레이라는 더욱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해 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가 해야만 했다.

크게 심호흡한 레이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기도하듯 양손을 모았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담은 레이라는 천천히 몸을 숙여 땅을 짚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청록빛이 땅으로 스며들었다.

조용히 땅에 스며들던 그 빛은, 웅덩이처럼 레이라의 주변을 물들였다. 그러다가 이내 넓게 퍼져 나갔다.

그 빛은 느릿하게 숲을 뒤덮었는데, 숲 밖에서도 빛이 보였다.

숲을 벗어나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로이드와 아르제오는 각각 그 빛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시간을 거스르듯, 청록빛이 감싼 숲에는 느릿하게 싹이 트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나무는 서서히 제 본래의 색을 되찾았고, 땅에서는 풀이 자랐다.

한 사람의 힘으로 복원시키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는 방대한 국경의 숲.

그곳은 느릿하게 청록빛 속에서 본래의 제 모습을 되찾아 갔다.

나무가 다시 거대하게 자라나고, 푸르른 숲으로 돌아갔다.

청록빛은 그 후에도 잠시간 숲을 감싸고 있다가 이내 서서히 사라졌다.

숲이 복원되는 내내 자리에 박힌 듯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르제오는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이제 그만 가자. 숲도 복원됐으니.”

움직이지 않는 아르제오 때문에 복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루이스가 그를 재촉했다.

하지만 아르제오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숲을 응시했다.

“제오.”

루이스가 재차 불렀을 때가 되서야 아르제오는 고개를 돌렸다.

“먼저 가시죠.”

“뭐?”

“전 잠시 확인 좀 하고 가겠습니다.”

“숲에 들어가려고?”

루이스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국경의 숲이 포레스티아의 이름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위험한 이유를 알고 있어서였다.

“예. 확인만 하고 가겠습니다.”

“안내자 없이 숲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는 건가?”

“압니다.”

“알면서도 가겠다고?”

루이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지만, 아르제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레이라가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숲의 무서움은 그 누구보다도 아르제오가 잘 알았다.

다시 그 끔찍한 광경 속에 갇힌다고 생각하면 손끝이 떨려왔다.

그런데도, 레이라가 무사한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이런 방대한 숲을 복원시키는 것이 쉬운 일일 리가 없으니까. 이렇게 끝도 없이 힘을 소모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먼저 가세요.”

그래서 아르제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루이스에게 말하고는 곧장 숲으로 들어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루이스는 얕은 한숨을 흘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아하나 보네.’

줄곧 갈피를 잡지 못하고 로렌스와 자신 사이에서 힘들어했었다.

그런 그에게 무엇보다 지켜야 할 또 다른 대상이 생기며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홀로 공작령에 갔던 것만으로도 의외였는데,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국경의 숲마저 홀로 들어서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루이스는 이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만 가지.”

* * *

숲으로 들어선 아르제오는 금세 발에 납덩이라도 달린 것처럼 걸음을 떼는 것이 어려웠다.

손은 눈에 띄게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호흡도 거칠었다.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 제 눈앞에서 수백, 수천 번 피를 흘리고 쓰러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두려움에 발이 땅으로 꺼지는 기분이었지만, 아르제오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조금 지나니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숨통을 조이던 손도 어느 정도 느슨해진 기분이 들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뚜렷해지니, 길을 찾기가 수월해졌다.

아르제오는 다급히 레이라와 헤어졌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포레스티아의 이름이 없는데도,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른 채로.

고요한 숲은 본래의 제 모습을 찾으니 공기가 서늘했다.

짐승도 없는 숲을 조금 더 걸어 깊이 들어가니, 레이라의 고운 백금발이 보였다.

“레이라!”

그녀는 잔디 위에 백금발을 흩트려 놓고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다급히 달려간 아르제오가 조심스럽게 레이라를 안아 올렸다.

“레이라, 괜찮은 거야? 레이라!”

그녀를 살짝 흔들어 보았는데, 그의 품에 안긴 레이라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잠든 것뿐인가?’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아르제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찰나, 그녀와 함께 이대로 멀리 달아나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순간 그런 충동이 들었을 뿐, 금세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대는 내게 화를 내겠지.”

게다가 그 역시 리히덴에서 벗어나 포레스티아령에서 그녀와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은 레이라를 공작령으로 데려다주는 것이 맞았다.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안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안내 없이 이 숲을 빠져나가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레이라를 안고 있어서 그런가.’

끔찍한 환영도 보이지 않았고, 내딛는 걸음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정말로 아르제오는 발루아 쪽으로 숲을 빠져나왔다.

그 앞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던 공작과 로이드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레이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레이라를 받는 공작에게 아르제오가 말했다.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에 쓰러진 모양입니다.”

그 모습을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던 로이드가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숲이 복원된 후에 혹시 몰라 찾아보니 쓰러진 뒤였습니다.”

레이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하는 아르제오를 보며 로이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숲이 되돌아온 것을 보고도 숲에 들어섰다는 건가? 혼자? 그저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그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되묻는 와중에 황당함이 밀려오는지 로이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로이드의 눈에 가득 찬 살기에 아르제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겨우 얘기가 좋게 흘러가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 자신의 한마디에 일이 틀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런 방대한 숲의 복원을 혼자 힘으로 해내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여전히 아르제오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로이드는 몸을 틀었다.

“폐하, 송구하지만 먼저 자리를 비키겠습니다.”

“같이 가지.”

레이라를 안은 공작이 다급히 말하자, 로이드는 아르제오를 뒤로했다.

아르제오는 뒤쫓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거기까지는 황제의 앞에서 제가 침범해도 될 범위가 아니었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르제오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러자 근처를 지키던 공작가의 기사가 그에게 다가섰다.

“아가씨께서는, 줄곧 정신을 잃은 상태셨습니까?”

“발견했을 때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그렇군요.”

기사는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걸음을 떼는 아르제오의 앞으로 나섰다.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지.”

공작가 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아르제오는 다시 숲을 지나 리히덴으로 넘어갔다.

다들 경황이 없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르제오는 포레스티아의 안내를 받지 않고 숲을 빠져나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레이라가 함께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으니.

이는 목격한 사람들이 공작과 헤레이스에게 알렸고, 혹시 모르니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했다.

숲을 빠져나간 아르제오는 곧장 황궁으로 돌아갔다.

* * *

공작가로 옮겨진 레이라는 꼬박 이틀을 잠들어 있었다. 추운 겨울날 숲속에 쓰러졌던 탓에 열까지 올랐었다.

그동안 로이드는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급한 일은 세실에게 가져오게 하고는 줄곧 레이라의 곁을 지켰다.

공작과 헤레이스는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인가.

두 사람 모두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로 꺼낼 수는 없었다.

잠든 레이라를 보는 로이드의 표정을 보니 차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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