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갑작스러운 아르제오와 루이스의 등장에, 돌아가던 로이드가 걸음을 멈췄다.
루이스가 먼저 다가서 로이드에게 인사를 건넸다.
“발루아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리히덴의 2황자, 루이스 반 리히덴이라고 합니다.”
로이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루이스의 뒤에 선 아르제오를 향했다.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마치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로이드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길게 머무는 듯하자, 아르제오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3황자, 아르제오 반 리히덴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인사에 로이드는 그의 얼굴에서 관심을 거두었다. 아르제오의 인사가 더 큰 관심을 끈 덕이었다.
“황태자가 그리도 발루아에 내놓으라 요구하던 3황자가 아닌가.”
들으란 듯한 로이드의 말에 로렌스가 천막을 걷고 나왔다.
황태자의 뒤를 이어 막사에서 나온 레이라는 아르제오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어떻게….”
분명 자신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영주에게 가둬 놓으라고 지시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르제오가 이곳에, 그것도 루이스와 함께 있는 건지.
“여기서 멈추시죠, 황태자 전하.”
루이스의 나지막한 말에 로렌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엔 저 녀석도 널 선택했다, 이건가.”
그 말에 아르제오는 슬쩍 시선을 떨어트렸다.
“제 선택이…. 중요합니까?”
황위를 자신이 쥐여 줄 것도 아닌데. 오히려 하루빨리 제국을 벗어나 공작령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자신인데도 말이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루이스가 로이드에게 다가섰다.
“무례를 저질러 송구합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로이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3황자를 숨겨 놓고 이쪽에 내놓으라 요구하더니. 전쟁을 하자는 말과 다름없지 않나? 내가 왜 그쪽 얘기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까칠한 로이드의 태도에 레이라가 살짝 다가섰다.
“폐하, 얘기를 들어 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오니 로이드가 고개를 홱 돌렸다.
눈썹을 늘어뜨린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로이드는 손을 들어 눈가를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면서 이러는 것이 틀림없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저런 얼굴로 부탁하는데, 어찌 거절하겠는가.
아무런 감정도 없다면 모를까, 기회를 구걸하고 있는 처지에서 말이다.
“…그쪽 얘기는 알아서 정리하고 들어오지.”
“감사합니다, 폐하.”
“오래 기다리지는 않겠다.”
서늘한 표정의 로이드는 그 말을 남기고 먼저 막사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던 레이라는 슬쩍 아르제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다가오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아직은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아르제오는 슬쩍 웃으며 괜스레 더 장난스럽게 찡끗 윙크했다.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그를 확인한 레이라와 공작이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서니, 호위를 제외하고는 리히덴 사람만 밖에 남았다.
루이스가 눈짓하자 기사단장과 후작은 조금 거리를 두고 멀어졌다.
“그래, 이대로 발루아에 붙어 날 끌어내릴 셈이던가?”
서늘한 얼굴의 로렌스가 물었다. 그 물음에 루이스는 다른 질문으로 답했다.
“무슨 생각으로 숲을 훼손하셨습니까? 이러면 발루아 제국에서 병력을 보내기가 더 쉬워지지 않겠습니까? 포레스티아 공작이 반대해도 얼마든지 전쟁을 강행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얼굴을 굳힌 루이스의 말에 로렌스가 픽 웃으며 아르제오를 응시했다.
“포레스티아에는 독특한 공녀도 있지 않나. 포레스티아를 손에 넣으면 숲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지.”
물건 취급하는 말에 아르제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레이라가 숲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아마도 로렌스의 문제는 자신이 그래도 되는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황태자의 자리에서도 이러는데, 황위에 오르면 얼마나 더하겠는가.
“이 전쟁은 양국의 사이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숲을 망가뜨렸으니, 공작가의 호의도 얻기 힘들 겁니다. 이 자리는 완만히 정리하고 돌아가시죠.”
로렌스에 비해 루이스는 제대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도착이 이렇게 늦어진 건, 루이스가 제대로 된 명분을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루이스는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건넸다.
“폐하께서 제게 이번 평화협정을 맡기셨습니다. 이 이상의 불필요한 전투는 제가 용납 못 합니다.”
로렌스는 서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황태자를 지나쳐 루이스가 먼저 막사로 들어섰다.
하지만 아르제오는 쉬이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가만히 서신을 응시하던 로렌스는 이내 그것을 손 안에서 구겼다.
“안 들어가고 뭘 하느냐.”
그러고는 서늘한 시선으로 아르제오를 노려보았다.
“자유를 미끼로 흔들었더니, 결국은 목줄을 끊고 도망쳤구나.”
“…전하.”
“그러고 보니, 루이스는 늘 형님이면서 나에게만 전하라고 부르더구나.”
“……”
“그걸 이제야 깨닫는 것도 우습지.”
픽 웃은 로렌스는 아르제오의 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두어 번 그 어깨를 두드린 황태자는 그 길로 먼저 그곳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아르제오는 뒤늦게 막사로 들어섰다.
안에서는 루이스가 열심히 로이드와 서류를 주고받고 있었다.
리히덴의 황제에게 포레스티아령을 손에 넣은 자에게 황위를 물려달라 먼저 얘기를 꺼냈던 루이스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는 평화협정으로 거래하기를 원했다.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회유를 처음부터 목적으로 두고 있었다.
아르제오는 천천히 루이스의 뒤로 다가가 섰다.
로이드의 곁에 있던 레이라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를 향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 그리 긍정적인 대화가 오간 건 아닌 듯했다. 게다가 황태자는 돌아간 것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누가 황위를 잇든 아르제오는 마음이 좋지 않을 터였다.
둘 다 형제이니, 누가 황위를 잇든 한 명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이다.
가만히 루이스의 뒤에 서 있던 아르제오는 걱정하는 레이라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싱긋 웃었다.
로이드와 루이스가 얘기를 주고받는 내내, 레이라는 아르제오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루이스는, 국민들이 불안에 떨지 않도록 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양국 간에 전쟁이 없을 것임을 서로 약속했고, 서로 원하는 것을 제시하며 거래 조건을 덧붙였다.
그들의 대화 결과 달라진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입국 절차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포레스티아 사람만은 가벼운 절차만 밟고 양국을 오갈 수 있도록 했다.
그녀가 키우는 시타델 섬의 약초를 받기 위해서도.
“숲이 이렇게 된 것은 정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복원에 인력이 필요하시다면 리히덴 쪽에서도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마친 루이스가 덧붙였다. 그 말에 로이드는 레이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일은 그녀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레이라는 루이스를 마주하며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숲에 관한 것은 포레스티아에 맡기시면 돼요.”
“역시 듣던 대로 대단하시군요.”
“과찬이세요.”
루이스를 향해 싱긋 웃는 레이라를 보며 로이드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지. 정식으로 서류를 보내겠다.”
“예, 감사합니다.”
로이드 없이 그 자리에 혼자 남아 있을 수도 없어서 레이라도 뒤를 따랐다.
막사를 나서며 레이라는 아르제오를 힐끔 바라봤다.
‘아쉬운데.’
이제 양국 사이의 일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어 가니, 리히덴 내부의 일만 해결하면 아르제오를 마음껏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도 지금 당장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마지막 연락이 갇혀 있다는 것이었으니.
슬쩍 아르제오를 훑는데, 양손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줄곧 손을 뒤로 감추고 서 있어서 이제야 발견한 것이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멈춰 서자, 앞서 걷던 로이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라.”
그 부름에 아르제오와 루이스까지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로이드에게 아르제오를 보고 있던 것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홱 돌렸다.
“예, 폐하.”
“왜 안 오는가.”
레이라는 곧장 걸음을 떼려다 다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로이드를 마주하며 물었다.
“혹시, 저는 숲을 복원시키고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지금?”
“네.”
놀라 되묻는 로이드에게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숲을 벗어나시면요.”
로이드는 한차례 불길에 망가진 검은 숲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황폐한 그 모습은 확실히, 레이라가 보기에 마음이 편치 않을 터였다. 식물을 그리 좋아하니 말이다.
“그대가 원한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로이드를 보며 레이라가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하여 그녀의 요구대로, 로이드와 공작은 호위를 데리고 먼저 숲을 벗어났다.
루이스도 레이라에게 가볍게 예를 갖추고는 호위들과 함께 떠났다.
“너무 늦지 않게 와라.”
아르제오의 어깨를 툭 두들기며 나지막한 한마디를 남겨 놓고.
모두가 떠나자 아르제오는 곧장 레이라에게 다가섰다.
“손은 왜 이래요?”
그녀는 인사보다도 더 먼저 붕대가 칭칭 감긴 손을 살포시 붙잡으며 물었다.
“아, 그냥…. 좀.”
드물게 얼버무리는 그를 보며 레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도 눈을 못 떼겠네요.”
“어? 나?”
“그럼, 제오죠. 여기 다른 누가 있어요? 잠깐 떨어졌는데 이런 상처를 달고 나타나니 말이에요.”
조심스럽게 붕대를 쓰다듬는 손길에 아르제오가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나 제시간에 왔지?”
고개까지 옆으로 기울이며 묻는 말에 레이라는 슬쩍 그를 흘겨보며 대답했다.
“네, 아슬아슬하게요. 손은 왜 이랬어요. 정말 말 안 해 줄 거예요?”
“말하면 너무 멋없어지잖아. 그냥 좀 다쳤어. 별거 아니야.”
“앞으로는 조심해요.”
“그럴게.”
아르제오의 대답을 받아 내고서도 걱정스러운지 레이라는 그의 손을 놓지 못했다.
“…다시 리히덴으로 돌아가야겠죠?”
“그렇게 됐네.”
“잘될 거예요.”
“그렇겠지.”
아르제오는 제 손을 잡은 레이라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더니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가기 싫다.”
“하지만 가야 하죠.”
“이럴 땐 붙잡아 주는 거 아니야?”
“왜요? 피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레이라의 표정에 아르제오가 질린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가차 없다니까.”
“제오에게는 그런 편이죠. 자, 이제 그만 가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등을 떠미는 그녀를 보니 서운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레이라가 싱긋 웃으며 아르제오의 뺨을 어루만졌다.
“서둘러서 해결하고 돌아와요. 이 숲은 제가 원래대로 돌려놓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