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64)화 (64/122)

<64화>

* * *

“아직도 저쪽에서는 3황자를 내놓으라는 말만 합니다.”

“그쪽 3황자를 도대체 왜 발루아에서 찾나.”

국경의 숲을 완전히 망가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리히덴의 요구에 로이드는 황당함만 표출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헤레이스와 공작은 간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때문에 유진의 만류에도 레이라가 기어코 앞으로 나섰다.

사절이라 여기라는 그녀의 말에도 로이드는 끝끝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래도 레이라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리히덴의 3황자를 왜 발루아에서 찾냐는 의문이 퍼지고 있었으니, 더 늦기 전에 일을 수습해야 했다.

계속 고개를 젓기만 하는 로이드를, 레이라는 몇 번이고 찾아갔다.

“저를 보내 주세요, 폐하.”

“안 된다.”

국경의 숲 근처에 임시로 마련한 로이드의 막사에서 레이라는 이번에야말로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주위를 미리 물린 로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레이라를 마주했다.

실은 이 일을 이유로 자신을 찾는 횟수가 늘어서 그 부분만은 좋았다.

찾는 이유가 그렇지 못해서 안타까웠지만.

“저들의 요구는 말도 안 된다. 없는 황자를 여기서 찾는다는 건, 전쟁을 하겠다는 말과 같다. 게다가 국경의 숲까지 망가뜨렸다. 이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지.”

로이드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요구였다. 당연했다, 아르제오가 공작령에 왔던 것을 모르니.

그렇다고 아르제오가 공작저에 있던 것을 알릴 수도 없는 레이라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 시타델 섬에서 기른 약초를 대륙 곳곳에 나누고 싶어요.”

“안다.”

“전 도움이 되는 사람이길 바라요. 약초는 절 그렇게 만들어 주고요. 정원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보낸다 생각하는 이도 없어요.”

“…….”

이는 황궁에서의 생활을 꼬집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 얘기를 꺼내면 로이드는 매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전 리히덴 제국과의 평화를 원해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이건 제가 원하는 일이니, 제가 도움이 되고 싶어요. 보내 주세요.”

그녀와는 계속 같은 대화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로이드는 슬슬 자각하고 있었다.

레이라가 이리도 간곡히 부탁하면, 자신은 곧 백기를 들고 말 것이라고.

“…평화협정을 원한다면 자리를 마련하지. 하지만 당신만 저들에게 보내지는 않겠다.”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한 로이드는 한걸음 레이라에게 다가섰다.

“이건 그대가 내게 빚을 진 거로 알지.”

물론 한발 물러나더라도 그냥은 물러나지 않는 로이드였지만.

황제의 허락이 떨어진 뒤, 두 제국은 다 타고 황폐해진 국경의 숲 너머에서 만남을 추진했다.

양측 모두 전쟁을 계속한다고 해도 이득보다 실이 더 컸다.

게다가 발루아가 먼저 평화협정을 제안하니, 로렌스로서는 이득이었다. 루이스가 바라던 일을 제가 해 버리면 될 테니.

그렇게 포레스티아를 일부라도 이 손에 쥐게 되면, 황제의 자리는 그의 것이 되는 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만남의 날, 황폐해진 국경의 숲에 들어서는 레이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한차례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숲의 모습은 끔찍했다.

전부 죽어 버린 것 같은 모습. 빨리 일이 일단락되고 숲을 되돌리고 싶었다.

발루아 제국에서는 로이드와 기사단장, 레이라와 포레스티아 공작, 그리고 호위가 둘.

리히덴에서는 황태자인 로렌스와 기사단장, 그리고 후작과 호위가 셋 나타났다.

죽어 버린 국경의 숲 부근에, 급히 만든 자리였다.

작은 막사를 치고 호위들은 그 주변을 둘러쌌다.

“이렇게 또 뵙습니다, 발루아의 황제 폐하.”

로렌스가 먼저 서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를 보니 리히덴의 장래가 밝군.”

로이드 역시 싱긋 웃으며 대답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제국을 대표하는 이들이 자리에 앉자, 기사단장들이 각 나라의 요구가 적힌 서류를 교환했다.

서류를 훑으며 힐끔 자리에 함께한 레이라를 바라본 로렌스가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쪽이 말로만 듣던 포레스티아 공녀인가 보군요. 이런 자리까지 나온 이유라도 있습니까? 폐위되셨다 들었습니다만.”

로렌스의 비아냥에 얼굴을 굳힌 건 로이드였다. 레이라는 그런 말에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듯했지만.

“제가 관심이 많아서 폐하께 간곡히 부탁해서 왔어요.”

“관심이 많다, 라….”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서류를 훑던 로렌스의 눈에 띄는 항목이 있었다.

“관심이 많은 건 이것 때문인가 보군요. 전 황후께서 키우신다는 약초.”

“네, 맞아요.”

“의외네요. 전 그게 3황자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씩 입꼬리를 올리는 로렌스의 시선을 레이라는 덤덤히 받아 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서류를 훑던 로이드가 듣다 못해 말했다.

“아직도 그쪽 황자를 이쪽에서 찾고 있군. 가출한 아우라면 리히덴 내에서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리히덴에 있었으면 못 찾을 리가 없죠. 발루아에 붙잡혔다는 정황을 파악했으니 이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붙잡은 적 없는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니, 곤란할 뿐이오.”

두 사람의 신경전이 오가는 와중에 레이라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숨겨야 했다.

로렌스가 알아볼 테니 유진은 놔두고 왔다. 차분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아르제오가 공작가에 있던 것이 알려질까 불안했다.

하지만 아르제오가 어디에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 로렌스의 시선이 레이라를 향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더욱 불안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예상대로, 로렌스가 말을 꺼냈다.

“폐하께선 모르셔도, 이쪽의 전 황후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로이드가 눈에 띄게 인상을 굳혔다.

괜히 레이라를 걸고 넘어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꼬박꼬박 ‘전 황후’라고 부르는 게 제일 거슬렸다.

“황태자, 엄연히 공녀라는 호칭을 두고 계속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뭐지?”

“아, 이런. 공녀님이셨죠, 그러고 보니. 제가 잠시 깜빡했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것이, 누가 보아도 알고 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도발에 넘어가선 안 됐다. 물론 로이드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그런데, 제 질문에서 신경 쓰이시는 부분이 그뿐입니까?”

로렌스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쪽 황자를 왜 이쪽 공작가에서 찾는지 모르겠군.”

“이유를 전혀 궁금해하지 않으시는 게 신기하군요.”

레이라는 무표정했지만, 로렌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불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로렌스는 별일 아니라는 태도로 말했다.

“포레스티아 공녀가 리히덴 제국에 있던 때, 3황자와 친분을 쌓았다 들었습니다.”

로렌스의 말에 로이드는 반사적으로 레이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서 폭풍우에 휩쓸렸던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리히덴에서 눈을 떴던 것도, 그리고 그곳에서 다행히도 은인을 만나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도.

하지만 그 은인이 리히덴 제국의 3황자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로이드의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레이라는 동요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이럴 때마저….’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것 같은 그 표정이 불만이었다. 그녀가 제게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아서.

그리고 지금의 레이라도 여전히 그런 얼굴이었다.

로이드가 표정을 굳히자, 그걸 노렸던 듯 로렌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뭐, 그렇게까지 숨기고 싶으시다면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대신, 리히덴에서는 포레스티아의 중립을 요청합니다.”

다 까발려 놓고는 너그러운 척하며 로렌스가 말을 꺼냈다.

줄곧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공작을 힐끔거렸지만, 그는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포레스티아는 줄곧 중립적인 태도를 지켜왔습니다.”

듣다 못한 기사단장이 대신 답했다.

이제껏 전쟁을 반대하고 막은 것도 공작이었다. 그런데도 중립을 요청한다니.

발루아 쪽 사람들이 듣는다면 코웃음을 칠 얘기였다.

“국경의 숲을 소유한 포레스티아가 발루아의 공작이니 당연히 발루아에 유리한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저, 리히덴의 제국민들이 더는 불안에 떨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레이라는 이어진 로렌스의 말에 저도 모르게 반박할 뻔했다.

그렇게까지 국민을 위하는 사람이, 전쟁이라는 선택을 했을까.

그것도, 이쪽에 아르제오가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 자유를 미끼로 여태 부려 먹던 제 동생 핑계를 대며.

로렌스의 말에 로이드의 시선은 공작과 레이라를 향했고, 두 사람은 덤덤히 그 시선을 받아 냈다.

공작은 이 일이 밝혀져 그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아르제오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르제오가 정말로 평생 감사해야 할, 레이라를 구한 은인이었으니.

말이 없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둔 로이드는 슬쩍 훑은 서류를 다시 기사단장에게 넘겼다.

“포레스티아 공작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 무슨 짓이지?”

서류를 다시 건네받은 기사단장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국경의 수호자라는 이름답게, 말 그대로 국경을 ‘수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데 그 수호자가 발루아 제국의 공작이면, 리히덴에서는 국경의 괴물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있지도 않은 3황자를 내놓으라고 하더니, 이제는 국경의 공작령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했다.

전쟁하자고 부추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먹을 움켜쥔 로이드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선 레이라의 불안한 시선을 마주한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상 참아 줄 수는 없다. 이건 제국을 기만하는 일이다.”

레이라 역시 로이드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적대적이니 이 이상 설득할 수 없었다. 자신 혼자라면 계속 설득을 이어 갔겠지만, 로이드를 앞에 두고 저런 태도라면 그럴 수 없었다. 기사단장들도 각자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렇게까지 전쟁을 원하면 잘 알겠다.”

“전쟁을 원한다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만.”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로렌스를 보며 로이드는 혀를 차고 홱 등을 돌렸다.

“돌아간다.”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 전투가 시작될 터였다.

결국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레이라는 눈을 지그시 감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자리를 뜬 로이드를 따라 기사단장도 그곳을 빠져나갔다. 뒤이어 공작과 레이라도 걸음을 떼려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로렌스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공녀였겠군.”

그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레이라가 로렌스를 돌아보았다.

“테론에서 황족의 문장을 들고 나타났던 의문의 여인. 설마 타국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야.”

로렌스가 아니라, 아르제오가 말한 2황자라면 더 얘기가 통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황태자를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이라는 서늘한 얼굴로 로렌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국민을 그렇게나 위하신다면, 자신의 동생에게 그런 짓은 하지 않죠. 국민을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위하시는 것 아닌가요?”

레이라의 말에 로렌스는 입매를 비틀었고 그녀는 다시 등을 돌렸다.

당장의 전투를 막을 수 없을 거라고 단념했을 즈음, 그 자리에 그녀가 애타게 기다리던 이가 도착했다.

“기다리시죠.”

든든한 지원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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