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 *
콰앙, 아주 멀리서 날아온 작은 소음에 레이라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귀가 밝은 편인 탓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소리지?’
평소에도 잠에서 잘 깨어나는 편이었지만, 아마도 국경의 숲 너머에서 이미 한차례 전투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다시 잘까 싶었지만, 묘하게 신경 쓰여서 눈을 감아도 잠들 수 없었다.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숄을 둘렀다. 그러고는 시타델 섬의 저택을 천천히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훅 끼쳐 오자, 조급함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시타델 섬은 폭풍우가 휩쓸기 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허름한 집 대신 근사한 저택이 생겼고, 엉망이 된 꽃밭도 새로 만들었다.
섬의 거대한 나무들도 다시 생기를 되찾았고, 새로 약초밭도 생겼다.
모두가 잠들어 고요한 시간이어서 그런지, 홀로 유배를 왔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상처는 덤덤히 덮고, 이곳에서 나름의 해방감까지 느꼈던 그때가.
‘설마 폭풍우에 휩쓸려서 리히덴까지 가리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물론 그 덕분에 아르제오를 만날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한 시라도 서둘러 일이 일단락되어 아르제오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레이라는 천천히 섬을 살폈다. 소리의 근원지는 섬 내부가 아닌 듯했다.
평소라면 확인을 마쳤으니 저택에 돌아갔을 테지만,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레이라는 해변가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너무 늦어지면 제가 사라진 것을 알고 다들 걱정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잠시만 섬 밖을 살피고 돌아가야겠다고.
해변으로 나간다고 한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지만, 그래도 어쩐지 눈으로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이,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듯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섬의 유일한 입구를 따라 나온 레이라는 어둠에 잠긴 해변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뚜렷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불빛을 발견했다.
밤하늘도 밝혀 버릴 기세로 솟아오르는 불길을.
“…저, 게 무슨….”
레이라는 제가 뭘 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국경의 숲이 있는 방향이었다.
저렇게 불길이 높게 치솟는 걸 보면, 아마도 수호목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불길은 수호목만 태우고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숲이….”
국경의 숲까지 불길이 번지면 큰일이었다.
국경을 수호하는 존재여서라는 생각보다도, 그저 숲이 위험하다는 생각에 레이라는 절로 나아갔다.
첨벙첨벙.
얼 듯한 바닷물에 발이 잠기는 것도 모르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공녀님!”
그녀의 시선은 치솟는 불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공녀님, 정신 차리세요!”
첨벙거리며 달려든 유진이 강하게 레이라를 붙잡았다.
“죽으려고 작정하셨어요?! 겨울 바다에 뛰어들어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아….”
유진이 억지로 레이라를 바다 밖으로 끌어내자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느끼지 못했던 찬 기운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왔다.
“유진! 당장 가야 해요! 불이 붙었어요, 숲이 위험해요!”
“정신 차리세요, 공녀님!”
유진이 힘껏 소리친 뒤에야 레이라는 긴 숨을 토해 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숲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저 가야 한다고 느꼈다.
“아마 리히덴 쪽이 한 일일 겁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시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유진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불길은 수그러들 기미 없이 점점 더 치솟았다.
“가야 해요, 유진.”
“일단 진정하셔야 합니다. 길도 없고, 배로 건너야 하는데 밤은 위험합니다.”
언뜻 보면 진정한 듯 보이지만 레이라의 시선은 여전히 불길을 향해 있었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시죠. 옷이 젖었습니다. 이대로면 몸 상하십니다.”
당장 건널 방법이 없다는 유진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동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혼자 헤엄쳐서 건널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일단 유진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분명 한밤중인데, 돌아가니 저택에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자신이 모두를 깨웠다는 생각에 레이라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가씨! 세상에.”
저택 앞을 서성이던 로라가 질겁하며 달려왔다. 그리고 젖은 레이라의 옷을 보고 더욱 울상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
“깨워서 미안해.”
“지금 그런 게 중요해요!”
안으로 들어선 레이라는 모두가 일어난 것을 발견하고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니, 레이라.”
공작 부인마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레이라는 대답 대신 집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클린, 지금 당장 배를 띄울 수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제클린은 슬쩍, 유진의 안색을 살폈다. 그 역시 발치가 젖어 있었다.
시선은 불안해 보였고, 얕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묻기에는 듣는 귀가 많았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괜한 불안감만 불러일으킬 테니까.
“해가 뜨지 않아서 힘들 겁니다. 일단은 날이 밝기를 기다리시죠.”
그렇게 말하며 제클린은 모두 돌아가 쉬라고 말했다.
로라는 레이라를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새 옷을 꺼내 왔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난 뒤에는 따뜻한 물을 받아와 그녀의 발을 담갔다.
그즈음, 옷을 갈아입은 유진과 제클린이 레이라를 조심히 찾아왔다.
똑똑.
“아가씨, 제클린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따끈한 물에 발을 녹이며 마음을 좀 진정시킨 레이라가 차분히 두 사람을 맞이했다.
“무슨 일인가요?”
“밖의 상황을 살피고 왔습니다. 어두워서 배를 띄우기는 힘들겠지만, 불길이 거세서 그걸 길잡이 삼아 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바람도 거세지 않고요.”
“…불길이 아직도 거센가요?”
“예, 아가씨.”
불길이 쉬이 잡히지 않는다. 그 말에 레이라는 다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국경의 숲이 사라질 위기였다.
주먹을 움켜쥔 레이라는 눈을 지그시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어렵지만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예, 아가씨. 하지만 공작 부인께서 아시면 반대하실 테니, 따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말은, 제클린은 제가 가야 한다고 판단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숲에 문제가 생겼다면, 아무래도 아가씨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집사의 말에 레이라가 물에 담갔던 발을 빼내자 곁에 있던 로라가 재빨리 물기를 닦았다.
“갈게요.”
레이라의 대답에 유진이 이마를 짚었다.
“역시 그렇게 되는군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약속하지 않기를 잘했네요.”
“뭐, 상황이 이러니 따르겠지만요.”
몸을 일으키는 레이라를 보며 로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가씨.”
그러더니 날이 춥다며 레이라를 단단히 입혔다.
“다녀올게, 로라.”
“마님 걱정은 말고 다녀오세요. 제가 잘 설명해 드릴게요.”
“고마워.”
어스름한 새벽, 제클린의 도움으로 배를 띄워 레이라와 유진은 시타델 섬을 빠져나왔다.
불길은 점점 거세졌고, 그 불길을 이정표 삼아 배는 앞으로 나아갔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할 것 같네요.”
“…네.”
불길을 바라보는 유진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클린은 아마 제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판단한 듯했지만, 레이라는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힘은 식물을 키우는 것. 불을 끌 수 있는 힘은 없었다.
비라도 내리길 바라는 수밖에.
* * *
레이라와 유진이 국경에 다다를 즈음, 날은 완전히 밝았다.
하지만 불길은 꺼지지 않았고, 국경의 숲 부근 하늘은 새카만 연기가 뒤덮고 있었다.
발루아의 병사들은 모두 숲을 벗어나 불을 끄려 애쓰고 있었다.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고, 수호목을 전부 태운 불은 결국 국경의 숲까지 옮겨붙었다.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 레이라가 나타나자 제일 먼저 알아챈 건 로이드였다.
“레이라…!”
군대를 통제하던 로이드는 그녀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고 곧장 달려갔다.
“위험하니 섬에 있으라고 하지 않았는가!”
미간을 찌푸린 로이드가 빠르게 주변을 훑으며 레이라의 손목을 잡았다.
곁에 있던 유진이 나서려는 것을 그녀가 재빨리 제지했다.
“자리를 옮기지.”
“아니요, 전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레이라! 지금 이곳은 위험해. 국경의 숲이 사라지면 당장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질 거다. 당장 여기를 벗어나.”
레이라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로이드의 손을 떼어 냈다.
“숲은 사라지지 않아요.”
“지금은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다. 이곳은 당신한테 너무 위험해.”
로이드는 드물게 다급해 보였다. 혹시라도 레이라가 위험해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보내려는 로이드와 가지 않으려는 레이라가 대립하는 사이, 공작과 헤레이스의 귀에도 그녀가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공작 대신, 그녀를 찾은 건 헤레이스였다.
실랑이를 벌이는 듯 보였던 두 사람에게 다가선 헤레이스는 은근슬쩍 로이드에게서 레이라를 떨어트렸다.
“누님, 여긴 왜 오셨습니까?”
“숲에 불이 난 게 보여서 왔어.”
그녀의 대답에 헤레이스는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숲을 태우는 불길은 쉬이 잡히지 않았다.
“그보다, 누님….”
다시 고개를 돌린 헤레이스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더니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저쪽에서 납치해 간 3황자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합니다.”
“뭐?”
함께 얘기를 들은 유진도 미간을 찌푸렸다.
“전하를요?”
“예.”
“하….”
유진이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아르제오가 감금된 시점에서 이럴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걱정 말아요, 유진.”
“하지만 이대로는 공녀님 입장이 불리해집니다. 전하께서 사라졌던 것을 빌미로, 전쟁의 명분을 저쪽으로 가져갈 셈입니다. 그렇다면 공작가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헤레이스도 그 부분을 걱정하는 듯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하지만 레이라는 평소와 같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걸 막기 위해 지원군을 부르러 간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는 팔을 걷어붙였다.
“그보다 지금은 불을 끄는 게 우선이에요.”
호스를 끌어다 물을 뿌리고, 그마저도 부족해서 양동이로 퍼 나르기까지 했다.
국경의 숲을 완전히 망쳐 버린 불길은, 갖은 노력에도 꺼지지 않다가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 후에야 사라졌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국경의 숲은, 그 불길로 인해 죽음의 숲이라 불러도 좋은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