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국경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리히덴의 군대가 국경에서 보이는 즉시 제게 연락이 오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 두었다.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으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라가 자신을 찾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밤늦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괜찮다고 말하는 로이드의 표정은 평온했다. 어차피 피곤함에 시달리면서도 잠을 청하지 못했다.
깨어 있던 덕분에 레이라를 곧장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못 보던 호위가 그림자처럼 레이라의 뒤에 딱 붙어 있는 것도 너그럽게 넘어갈 만큼.
레이라는 소파에 앉자마자 곧장 본론을 꺼냈다.
“리히덴에서 군대가 국경의 숲을 향해 진군하고 있어요.”
정말 만에 하나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녀가 자신을 찾을 이유가 국경 문제 외에는 없을 거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을 아주 조금, 저도 모르게 품어 버렸다.
그래서 레이라가 전한 소식보다 그녀가 저를 찾아올 이유가 그것 외에는 없다는 것에 입이 썼다.
로이드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지끈거리며 두통이 몰려오는 듯했다.
“어떻게 하길 바라지?”
반사적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로이드가 물었다.
“시간을 벌어 주세요.”
“그다음은?”
군대를 막는 건, 시간을 벌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번 후에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물음에 레이라는 공작이 받았던 루이스의 서신을 꺼내 들었다.
아르제오 앞으로 보냈던 것과 달리, 포레스티아 앞으로 온 이 서신은 황제에게 보여질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기에.
“전쟁을 원하지 않는 쪽이 있습니다. 전 이쪽과 거래하길 바라요. 아버님도 동의하셨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벌어 주신다면, 그들이 리히덴의 군대를 막을 거예요. 물론, 폐하께서 윤허하셔야 하는 일이에요.”
“거래라.”
레이라가 건네는 서신을 받아 훑으며 로이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필요하다면 제가 리히덴과 발루아를 오가는 사절이 되어도 좋아요. 평화협정을 원하니까요.”
“그 말은, 그대가 리히덴과 발루아를 자유롭게 오가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네. 전 그걸 원해요.”
망설이지 않고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로이드가 픽 웃었다.
‘그 말은, 황궁으로 돌아올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뜻이군.’
입 안이 썼다.
레이라는 이미 자신이 없는, 황궁 밖에서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스운 건, 여전히 포기가 안 된다는 거였다.
“그런데, 리히덴 상황을 유난히 자세히 알고 있군. 이에 관해서도 설명해 줄 수 있나?”
이어진 로이드의 질문에 유진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레이라가 리히덴과 내통했다는 얘기라도 나왔다가는, 평화협정이 문제가 아니게 될 테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곧 로이드를 똑바로 마주하며 되물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이라의 대답에 유진은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그건 리히덴과의 내통을 긍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색할 테니까.
“…그러지.”
하지만 로이드는 이미 레이라에게 다시 기회를 청한 상태였고, 이는 유진이 모르는 일이었다.
“시타델 섬에서 폭풍우에 휩쓸렸던 때.”
그때의 얘기를 꺼내니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는 정말, 그녀가 죽었을까 봐 엄청난 공포에 시달렸으니까.
“눈을 뜨니 리히덴 제국의 작은 해안가였어요.”
“뭐…?”
“제 목숨을 살려 주신 은인께서 주신 정보예요. 은인께서도 전쟁을 원하지 않으시니까요.”
로이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보고받은 건, 그저 사라졌던 레이라가 홀연히 나타났다는 것과 폭풍우부터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 전부였다.
‘…과연.’
리히덴 제국에 있었다는 걸 알면, 그녀에게 또 다른 죄목을 씌워 이번엔 정말 더 큰 형벌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작가가 숨긴 것이었다.
알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그러하다는 건 마음이 쑤셨다. 자신이 레이라를 그렇게 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아서.
“그렇군.”
로이드는 거기서 더는 캐묻지 않았다.
은인이 누구인지, 리히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는 평화를 원했다. 그리고 그 평화는, 로이드를 포함한 일부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모두가 원하는 것일 터.
“곧 공작령으로 가지.”
“감사합니다, 폐하.”
로이드의 대답에 레이라가 안심한 듯 미소를 머금었다.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당신은 시타델 섬에 가 있는 게 좋겠군.”
“네? 하지만….”
“시간을 끄는 것뿐이라도 위험하다. 그러니 피해 있는 게 맞아. 황명이니 섬으로 가 있도록 해.”
“…예, 폐하.”
로이드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레이라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배웅하지.”
“아니에요. 서두르셔야죠.”
“…그래.”
단칼에 거절하는 그녀의 태도에 로이드는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함께 집무실을 나선 그들은 곧 인사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로이드는 최정예 기사들을 이끌고 아티펙트를 이용해 국경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레이라와 유진은 그보다 한발 먼저 공작령으로 돌아왔다.
“역시 전하께는 공녀님께서 발루아의 황제 폐하를 직접 만난 걸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티펙트가 있는 곳에서부터 공작저까지 마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유진이 얘기를 꺼냈다.
“원한다면 제가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순 있어요. 하지만 평생 숨길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알아 두는 게 좋을 거예요.”
“이런 건 은근히 칼 같으시네요.”
“전 대체로 선이 뚜렷한 편이에요.”
“…정말 전하와 왜 장단이 잘 맞으시는지 좀 알 것 같네요.”
환상의 콤비가 따로 없다고 중얼거리는 유진을 보며 레이라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아르제오는 무사할까, 하고 생각하며 창밖을 응시하던 유진이 레이라의 목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제오와 연락했을 때 그랬죠. 유진을 공작령에 두고 혼자서 간 이유가 있다고.”
“…그랬죠.”
“그 이유, 물어도 되나요?”
유진은 누가 보아도 난감한 얼굴이었다.
대답하기 힘든 질문인 것 같았지만, 레이라는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어려워하긴 했지만, 유진이 안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니.
“뭐…. 공녀님의 특별 호위 기사 역할이죠.”
“얼버무리는군요.”
“거짓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말한 것도 아니겠죠.”
“적당히 넘어가 주세요.”
유진이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레이라는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알아야 할 일이라면 언젠가 알게 되겠죠.”
“정말 방심할 수 없는 분이시군요.”
“방심은 금물이니까요.”
어쩐지 농담마저 아르제오 같다고 생각하는 유진이었다.
마차를 타고 공작가로 돌아간 두 사람은, 황제가 움직일 거라는 걸 알렸다.
그들은 시간을 벌 것이고, 군대를 막을 지원군이 리히덴 내에서 올 거라는 것도.
공작과 헤레이스는 전투를 준비했고, 레이라는 공작 부인과 함께 혹시 그들이 숲을 넘을지 모르니 피신해 있기로 했다.
공작가의 하녀들과 공작 부인, 그리고 유진이 호위 겸 함께 시타델 섬으로 향했다.
그곳을 입구가 하나뿐이고 배가 아니면 길도 하루에 한 번 열리니 안전할 거라 여겼다.
국경에서 멀리 떨어질 필요는 없지만 안전한 곳.
유진은 처음부터 상황이 악화하면 레이라를 섬으로 데려가는 역할이었다.
로이드가 레이라에게 섬으로 피해 있으라고 말하며 황명까지 들먹였을 땐, 역시 마음이 남은 건가 싶었다.
“유진도 저쪽으로 가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여긴 안전하니까 우리만으로도 괜찮아요.”
섬으로 향하는 길, 레이라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전쟁터로 가라는 말이 아니라 아르제오가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공녀님께서 얌전히 섬에만 계시겠다고 약속하면요.”
“황명이잖아요. 그리고 전 전쟁터에서 도움이 될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도 공녀님에 한해서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서요.”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저도 약속은 못 하겠네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어서.”
“그것 보세요. 제가 호위로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윱니다.”
그런 유진의 태도에 레이라는 아르제오의 당부가 뭐였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 레이라가 설핏 웃었다.
“걱정 말아요. 여기서 제오가 돌아오는 걸 기다릴 테니까.”
* * *
국경의 숲까지 도달한 로렌스는 헛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숲은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끔찍한 환각을 보고 길을 헤매게 만드는 숲.
이런 유리한 지형을 두고도 발루아의 병사들은 숲 너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 있다, 이건가?’
숲을 이용하지 않고도 자신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처럼 보였다. 그게 로렌스에게는 모욕감으로 다가왔다.
병력 차를 지나치게 자만하고 있는 발루아라고.
하지만, 국경의 숲이 사라져도 과연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씩 입꼬리를 올린 로렌스가 입을 뗐다.
“첫 전투는 저들의 방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다. 잊지 말도록.”
“예, 황태자 전하.”
로렌스의 말이 끝나자 기사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기사단장을 선두고, 리히덴의 군사가 국경의 숲 앞의 발루아 군대와 맞부딪쳤다.
어쩌면 큰 전쟁으로 불거질지도 모를, 두 제국의 첫 전투였다.
* * *
포레스티아의 사람이 아니면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에, 수호목을 지날 입구를 만들었다.
첫 전투는 어쩐지 치열하지도, 끈질기지도 않았다. 양측 모두에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심각하지 않았다.
서로가 염탐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엇비슷한 타이밍에 양측 모두 퇴각을 명했으니까.
발루아의 병사들은 미리 만들어 놓은 통로를 통해 수호목 너머로 사라졌다.
리히덴의 병사들은 한참 물러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거대한 수호목을 보니 앞이 캄캄한 기분마저 들었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휴식을 취하던 깊은 밤.
“슬슬 움직이지.”
로렌스의 지시에 기사 하나가 은밀히 움직였다.
밤에 보는 수호목은 한층 더 검고 거대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수호목도 결국엔 나무였다.
어둠 속에 조용히 움직인 기사는 수호목 앞에 아티펙트를 설치했다.
일정 거리를 두고 수호목을 둘러싸며 아티펙트를 설치한 기사는 재빨리 리히덴 군대의 진영으로 복귀했다.
깊은 밤, 땅을 울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까만 밤하늘을 밝힐 정도로 거대한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마탑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대단한 수호목이라고 한들, 결국엔 나무.
로렌스는 국경의 숲을 포함한 그 거대한 벽을 불태우는 방법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