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늦는다고 뭐라 하시면 안 됩니다.
“시끄럽고 빨리 와.”
당장 최대한 빨리 움직이라고 전했다. 혼자 움직이는 게, 아무래도 군대가 전진하는 것보다는 빠를 테니.
-예, 예, 알았….
한숨을 내쉰 유진이 알겠다고 대답하는데, 도중에 목소리가 바뀌었다.
-제오.
곁에 있는 건 알았지만, 그녀가 말을 걸 줄은 몰라서 아르제오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레이라.”
-갇혀 있는 거예요? 괜찮아요?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아르제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일이 순탄히 끝나지 않을 거란 건 짐작했지만 말이다.
머리를 쓸어 올린 아르제오가 쓴맛을 느끼며 픽 웃었다.
“그렇게 됐네. 다신 못 해 볼 새로운 경험이야.”
레이라는 이런 상황에도 그런 소리를 하는 아르제오 때문에 따라서 작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걱정을 늘어놓는 대신, 다른 얘기를 꺼냈다.
-무작정 빠져나와서 군대를 쫓는다고 해도, 어쩔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는 유진도 동감했다. 지금 당장 그가 달려가 아르제오의 탈출을 돕는다고 해도, 군대가 이미 떠난 후이니 시간이 부족했다.
-어차피 부족한 시간이니, 지원군을 부르러 가요.
“지원군?”
-전쟁을 바라지 않는 사람요.
정확히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르제오는 그녀가 누구를 부르라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충돌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최대한 일을 빨리 끝낼 방법을 찾아야죠.
오히려 아르제오 보다도 더 이성적인 듯한 레이라의 말투에 그가 못 당하겠다는 듯 픽 웃었다.
-황자궁으로 곧장 돌아가는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죠?
“용케 기억하네.”
-제오가 한 말들은 기억해요.
이런 상황에도 훅 들어오는 말에 아르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설레게.”
-나중에 더 설레게 해 줄 테니까 지금은 움직여요.
“여전히 나한텐 냉정하네.”
-지금은 그런 편인데, 나중엔 더 너그러워질게요. 제오가 제 곁에 돌아오면요.
어느새 두 사람은 작게 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농담을 주고받는다며 유진은 질린 얼굴을 했지만.
“유진.”
아르제오는 품에서 아티펙트를 꺼내 들며 나지막이 유진을 불렀다.
-예, 전하.
“내가 널 왜 두고 왔는지는 기억하겠지.”
-예, 예, 기억합니다.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연락은 끊겼다. 작은 펜던트를 다시 안주머니에 넣은 아르제오는 손에 든 다른 아티펙트를 바라봤다.
로렌스가 황위를 이어받기 전까지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황태자를 막기 위해 루이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 일은.
당황하여 멍청하게 문만 내리쳐 엉망이 된 손을 내려다본 아르제오는 픽 웃었다.
그러고는 곧 문이 굳게 닫힌 탑 꼭대기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아르제오와의 연락을 끝낸 레이라는 곧장 공작을 찾아갔다.
헤레이스까지 불러 현 상황을 알리자, 이쪽도 군대에 맞설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아버님, 이 일은 폐하께서도 아셔야 할 듯합니다.”
헤레이스는 굳이 로이드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건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일이었다.
만일 리히덴에서 군대가 국경으로 향하고 있다면, 이는 황제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는 일이었다.
공작도 헤레이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문제가 커지면 그들 선에서 해결할 수 없었다.
“제가 갈게요.”
“예? 하지만 누님….”
“안 됩니다, 공녀님.”
헤레이스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유진이 다급히 레이라를 말렸다.
“영지민 피난은 마쳤어도, 이스도 아버님도 지금 공작령을 벗어나는 건 좋지 않아요. 사람을 보낸다고 해도, 폐하 알현까지 시간이 지체될 수 있어요. 제가 가면 빠르게 폐하께 지금 상황을 알릴 수 있어요.”
확실히, 폐위된 황후를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 황궁에 있을 리가 없었다.
지원군으로 병사들까지 두고 갔었으니 공작령이 어떤 상황인지도 중요 인사들이라면 알고 있을 터였다.
고집을 굽히지 않을 레이라를 예상한 공작이 검을 챙겨 들었다.
“그럼 레이라, 부탁하마.”
헤레이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
그녀가 가져온 소식에 의하면, 군대가 언제 국경의 숲에 도달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두 사람이 나선 직후, 레이라도 황궁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들 중 제일 안절부절못하던 건 유진이었다.
“꼭 공녀님이 가셔야겠습니까?”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이런 야심한 시각에 황궁을 찾는 것이니 더욱 자신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것보다, 레이라를 황제와 만나게 했다는 걸 나중에 아르제오가 알게 됐을 때가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유진이 레이라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 제가 호위로 동행하게라도 해 주세요.”
“불안하면 그렇게 해요.”
레이라는 유진을 대동하고 서둘러 공작저를 나섰다. 그리고 아티펙트를 이용해서 황궁으로 향했다.
“근데, 도대체 뭐가 불안한 거예요?”
황궁에 도착한 레이라는 아티펙트를 지키는 기사에게 황제궁 시종장을 불러 줄 것을 부탁했다.
가만히 그 자리에서 기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레이라가 묻자, 유진이 입술을 비죽였다.
“내가 폐하와 만나면 마음이 변할까 봐요?”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거 압니다.”
“그런데 왜요?”
“전하께서 기분이 상하실 테니까요.”
황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도, 상황이 이러하니 그녀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것도 안다.
그런 걸 다 알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싶었다.
“제가 직접 폐하를 만나러 온 걸, 제오가 몰랐으면 하는군요.”
“예, 예, 가능하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감춰도 언젠간 알게 될걸요.”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레이라를 보며 유진이 한숨을 푹 내쉬는데, 기사가 시종장과 함께 돌아왔다.
시종장은 레이라에게 예를 갖추더니 말했다.
“폐하께선 집무실에 계십니다. 포레스티아에서 사람이 오면 곧장 안내해 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시종장은 포레스티아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지만, 유진에게는 저게 레이라를 뜻하는 것처럼 들렸다.
물론 유진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로이드는 그런 속마음을 가지고 내린 명령이 맞지만, 국경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염두에 둔 터라 그런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시종장의 등장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이 났고, 집무실로 향하는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
‘아직도 이런 늦은 시각까지 집무실에 계시나 보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로이드를 걱정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들이 시종장을 따라 황제의 집무실에 다다랐을 즈음.
“어찌 제게 그리도 매정하세요?”
날이 선 가는 목소리가 집무실 밖으로 흘러나왔다.
앞서 걷던 시종장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낭패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레이라와 유진에게는 다행히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온 손님이 계시는군요. 다른 곳에서 기다릴까요?”
안에서 그리 좋지 못한 얘기가 오가는 것을 눈치챈 레이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공녀님. 포레스티아의 방문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리 말한 시종장은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무슨 일이냐.”
“폐하, 포레스티아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로이드는 찰나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만 돌아가시오.”
“폐하…!”
안쪽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지만, 레이라와 유진 모두 못 들은 척했다.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이 야심한 시각에 공녀를 만나시는 이유가 뭔데요!”
“황후, 그만 돌아가라 했다.”
두 사람이 기다리는 동안 로이드의 부름으로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가 선객을 끌어냈다.
“그만 황후궁으로 돌아가시지요.”
“내게 명령하지 마.”
시종장에게 끌려 나온 엘라는 죽일 듯이 레이라를 노려보았다.
“다른 남자를 만나는 듯하더니, 왜 다시 폐하를 뵈러 왔니?”
들으란 듯이 큰 목소리였다. 선명한 악의가 담긴.
엘라의 발언에 시종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곤란함을 드러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런 악의에도 덤덤한 얼굴로 레이라가 예를 갖추니 엘라는 더욱 열이 뻗쳤다.
싸움도 어느 한쪽이 받아 줘야 성립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열을 내도 저쪽이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하면 싸움도 되지 못한다. 그저 혼자 짓는 개나 될 뿐이지.
“다른 이를 마음에 담고 폐하를 뵈어서 무엇 하려고? 그자가 폐하보다 하찮으니 다시 폐하가 눈에 들어오니?”
다른 이들 앞에서는 그래도 나름의 예의를 지키더니, 지금의 엘라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무시하면 그만이겠지만, 아르제오의 험담은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황후께선.”
드디어 입을 여는 레이라를 보며 엘라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직도 제게 관심이 지나치시군요. 폐하께서 서운하시겠어요. 황후께서 폐하보다도 제게 더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서.”
바로 조금 전에 안에서 다투고 쫓겨난 것을 목격한 참이었다.
‘이게 일부러….’
레이라가 황후일 적엔 로이드의 관심이 제게 있다고 여겨 기고만장했었다. 한데 쫓겨난 차에 저런 말을 들으니 더욱 수치스러웠다.
주먹을 움켜쥔 채로 부들부들 떠는 엘라에게 시종장이 낮게 속삭였다.
“이 이상 지체하시면….”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리다 지친 로이드가 집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왜 들어오지 않….”
레이라가 왔다는 생각에 홀로 들떠 있던 로이드가 그 앞에 선 엘라를 보고 얼굴을 구겼다.
“아직도 안 갔나?”
로이드는 엘라의 앞에 선 레이라와 난감한 표정의 시종장을 살피고는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레이라에게 허튼소리라도 한 건가?’
나중에 시종장에게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로이드는 손을 휘휘 저었다.
한시라도 빨리 시야에서 치우고 싶었다. 레이라에게, 엘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데려가.”
“예, 폐하.”
앙칼진 눈으로 레이라를 노려보던 엘라는 곧 홱 몸을 돌렸다.
“들어오지.”
“네.”
엘라가 등을 돌리기 무섭게 로이드는 레이라를 집무실 안으로 들였다.
그녀를 따라 들어서는 유진을 조금 불만스럽게 힐끔거렸지만, 공작가의 기사복을 입고 있어서 잠자코 넘어갔다.
* * *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황후궁으로 들어선 엘라는 닥치는 대로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깨지고 떨어지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시녀가 달려왔지만, 엘라는 나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폐하께서 내게 이러실 순 없어. 이러실 순…!’
엘라는 씩씩거리며 침대 옆 서랍을 거칠게 뒤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쪽지를 찾아 꺼냈다.
일전에 병사에게서 받은 작은 쪽지였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