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아르제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이미 확신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가 더욱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일전에 리히덴 제국에서 포레스티아 공녀가 발견되었다던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전하.”
무언가 말하려는 아르제오의 말을 로렌스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즈음, 아르제오의 태도는 분명 평소와 달랐다. 병사들에게서 도망쳤다는 보고도 받았고, 무언가를, 또 누군가를 숨겼다.
알면서도 로렌스는 넘어가 주었다. 너무 목줄을 꽉 조이면, 개는 목줄을 끊고 도망쳐 버릴 테니.
로렌스는 진짜 포레스티아 공녀일 거라 여기지 않았었다.
그저 아르제오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누군가를 만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걸 자신에게 숨기고 싶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웠을 테고.
그러니 그 정도 일탈은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짜였다니.’
아무도 몰래 리히덴에 나타난 포레스티아 공녀라니. 발루아 제국의 폐위된 황후이자, 국경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가문의 사람.
‘걸작이군.’
그 상황이 우스워 로렌스는 피식거리다가 이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웃는 건 로렌스뿐이었다. 그 앞에 선 아르제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니.
소리 내어 웃던 로렌스는 돌연 웃음을 뚝 그치며 광기 어린 눈으로 아르제오를 응시했다.
“우리가 먼저 출정했으니 명분이 저쪽에 있다고 했지?”
“…….”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아끼는 아우를 빼앗기지 않았나.”
이어진 로렌스의 말에 아르제오가 숨을 멈추며 눈을 부릅떴다.
“멜튼 경!”
“예, 황태자 전하.”
로렌스의 부름에 회의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 하나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더니 로렌스의 눈짓에 재빨리 아르제오를 붙잡았다.
“3황자가 포레스티아 공작에게 납치되었으니, 명분은 이쪽에 있다. 우리는 황자를 되찾기 위해 공작령으로 진군한다.”
“예, 황태자 전하.”
“잠깐, 전하! 이거 놓아라! 안 됩니다! 전하!”
아르제오가 발버둥 치자, 곧 회의실 안으로 기사들 몇이 우르르 들어오더니 그를 붙잡았다.
“가둬 놔. 영주에게 말해서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잡아 두도록 해.”
“예.”
로렌스의 지시로 기사들은 아르제오를 끌고 회의실을 나섰다.
그가 안 된다며 울부짖었지만, 로렌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다들 죽고 싶은 거야?! 이거 놔! 전하! 안 됩니다!”
아르제오가 발버둥 칠수록 기사들은 더욱 강하게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성의 제일 높은 탑 꼭대기에 있는 방에 그를 가뒀다.
유일한 입구이자 출구인 문은 굳게 잠겼고, 너무 높아서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그건 그냥 자살행위가 될 테니.
쾅쾅!
주먹을 움켜쥐고 문을 두드린 아르제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면 로렌스는 자신이 나타날 걸 예상했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자신이 사라진 시점에서, 로렌스는 이쪽에 명분이 있다고 확신했는지도.
뭘 어쩔 작정으로 진군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젠장!”
열리지 않는 문을 거칠게 걷어차며 아르제오가 씩씩거렸다.
이럴 순 없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야만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게 숨을 내뱉은 아르제오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차분히 방 안을 훑었다.
그는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로렌스가 향하는 국경의 숲 너머에는,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하고픈 레이라가 있으니까.
* * *
아르제오를 보내고 저택으로 돌아온 레이라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부러 바쁘게 보내려 시타델 섬도 다녀왔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안했다.
똑똑.
괜스레 발코니 쪽을 서성이던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잠시 시간 좀 있으실까요?”
문 너머의 목소리는 유진이었다. 레이라는 얼른 문을 열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불안한 얼굴로 묻는 그녀를 발견한 유진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그게….”
그러고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일단 들어와요.”
레이라는 유진을 안으로 들이고는 베티에게 차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차가 준비되는 동안 레이라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르제오가 떠난 지 이제 고작 이틀이었다.
베티가 차를 내오고, 유진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멋진 일을 하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약초 공급을 하고 계신다고요.”
조금 여유를 찾은 듯한 유진의 목소리에 레이라도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신기한 힘을 가지고 계셨죠.”
리히덴에 있던 짧은 시간, 레이라는 무척 즐거웠다. 예상치 못한 일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며 소소하게 얘기를 주고받던 유진은 이내 본론을 꺼냈다.
“전하께서 이곳에 남으라고 해서 염치 불고하고 남았습니다만, 상황이 좋지 않으면 움직여야 할 겁니다.”
“상황이 좋지 않을까요?”
“아마도요.”
유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라가 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가 안내할게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감사합니다.”
“이쪽에서 제오 상황을 알 수 있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손바닥 크기의 동그란 아티펙트를 꺼냈다.
“전하께서는 조심성이 부족하신 편이셔서요. 제가 마탑을 다녀온 보람이 있죠.”
유진은 아르제오가 떠나기 전, 그의 품에 몰래 이것과 연결되는 손톱 크기의 펜던트를 넣어 두었다고 했다.
어쩜 이렇게 용의주도한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오늘 저녁에 전하와 연락을 취해 볼 생각입니다.”
“상황이 나쁘지 않기를 바라야겠군요.”
레이라의 말에 유진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아마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지 않을까 속으로 생각하며.
“공녀님께서는….”
본론이 끝났다는 생각에 레이라가 찻잔을 집어 드는데, 유진이 운을 뗐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유진이 잠시 고민하며 말을 골랐다.
“모든 일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는 가정하에요. 계속 공작령에 남아 계실 건가요?”
유진의 질문에 레이라가 잠시 입을 꾹 닫았다.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을 때. 지금은 그저 허상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평화가 정말 찾아오긴 할까. 당장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얕은 한숨을 내쉰 레이라는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그 미래를 그리며 대답했다.
“약초를 키우는 일을 계속하겠죠. 계속하고 싶거든요. 필요한 사람이 있는 한.”
그리고 유진은 그 대답을 예상했던 듯 난처하게 웃었다.
“역시 그러시군요.”
“그건 왜요?”
“공녀님께서 이곳에 계시면, 전하께서도 이리로 오시려고 할 테니까요.”
“안 되나요?”
덤덤히 되묻는 그녀를 보며 유진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라도 아르제오 만큼이나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리히덴 제국에는 불리한 일이죠.”
“하지만 유진의 가정은 모든 것이 평화롭게 끝났을 때잖아요.”
“그래도요.”
유진은 살짝 고개를 떨어트려 가만히 찻잔을 바라보았다.
“리히덴에는 발루아와의 관계 말고도 아직 문제가 많으니까요. 전 제국에 전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 말에 레이라는 리히덴에서 보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피난민들의 마을이나, 횡포를 부리며 조각가들을 압박하던 영주.
유진이 말하는 문제란, 아마도 나라를 병들게 하는 부정부패일 것이다.
하지만 유진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문제에 왜 제오가 필요하죠?”
“그야….”
“누가 황위에 오르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지금 그 자리를 위해 싸우시는 두 분의 일이 아닌가요?”
맞는 말이었다. 유진은 쓰게 웃으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누가 황위에 오르셔도, 전하를 그냥 놓아주지는 않으실걸요.”
“자유를 약속하면서, 목적 달성 후에 아무것도 내어 주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나라를 바로잡으려면 군주부터가 제대로 된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똑바로 마주쳐 오는 레이라의 시선에 유진은 어쩐지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과연, 꼭두각시였다고는 해도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던 사람이라고 할까.
“공녀님의 양국 출입이 자유로웠으면 좋겠네요. 리히덴도 공녀님의 약초를 공급받으면 좋겠어요.”
픽 웃은 유진이 화제를 돌리며 하는 말에 레이라도 표정을 풀었다.
“꿈같은 얘기네요.”
두 제국 사이에 평화만 자리한다면 그리하고 싶었다.
“언젠가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아르제오가 나고 자란 제국이니, 그곳 사람들도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 * *
깊은 밤, 아르제오는 상처투성이가 된 손을 늘어뜨리고 창가로 다가섰다.
굳게 닫힌 문은 아무리 몸을 부딪쳐도 부서지지도 않았다.
‘뛰어내리면 죽겠지.’
그럼 의미가 없었다.
아무것도 막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고 죽을 테니.
방 안의 온갖 천들을 뜯어다 이어 봤지만, 길이는 턱없이 부족했다.
수도의 황자궁으로 이동하는 아티펙트가 있었지만, 거기서부터 다시 국경까지 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제게 레이라와 같은 힘이 있다면. 그랬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스스로의 무력감에 자괴감마저 들고 있었다.
그때. 지직거리는 소음이 찰나 들리고, 곧장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들리십니까?
“유진?”
아르제오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제 몸을 더듬으며 살폈다.
-이 시간이면 혼자 계시겠죠? 상황은 어떱니까?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진 끝에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빛을 발하는 작은 펜던트를 찾아냈다.
“이게 뭐야.”
-혹시 몰라서 넣어 뒀죠. 제가.
일단 추궁을 뒤로한 아르제오는 문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며 목소리를 낮췄다.
“상황이 좋지 않아, 유진.”
-예? 왜요,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군대가 진군한다고 했어. 벌써 반나절은 갇혀 있었으니 현재 상황은 몰라.”
-예에? 갇혀 있다고요? 괜찮으세요? 그것 보세요, 제가 같이 가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
아르제오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펜던트 너머에서 레이라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 무어라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레이라의 목소리였다.
이미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해 버린 아르제오는 작게 혀를 찼다.
‘이 자식, 왜 레이라가 있는 곳에서 내게 연락한 거야.’
걱정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그의 상황은 오히려 걱정만 불러일으키니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알아 버렸으니 어쩌랴, 일을 빨리 끝내고 그녀에게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르제오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유진, 지금 당장 이쪽으로 좀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