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 *
급한 서류들을 해치운 로이드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가십니까?”
승인받은 서류들을 챙긴 세실이 묻자, 황제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을 쉬이 내어 줄 수는 없지 않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언제든 출정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겠습니다.”
“그래.”
집무실을 나서는 황제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세실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마음이 바뀐 이유를 여전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세실은 제국을 번영시킬 자신이 있었다.
로이드가 진정 제어할 수 없는 폭군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세실이 오랜 시간 보아온 로이드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2황자와 태황후에 관해서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지만, 누가 뭐라고 떠들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부류였다.
민심이 2황자 쪽으로 기울어도, 로이드는 자신이 한 일을 생색내는 법이 없었다. 그런 건 질색이라며.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도 않았다. 절대로 감히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마음이 생기지도 않도록, 로이드는 그렇게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단호하고, 때로는 잔인하게.
마저 다른 일을 처리하기 위한 세실을 궁에 남겨두고, 로이드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지방 영지들과 황궁을 잇는 공간이동 아티펙트를 이렇게까지 유용하게 쓴 적이 있나 싶었다.
거금을 들여, 언제든 자신이 나타날 수 있다는 압박감을 위한 장치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물론 비상시에 일 처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폐하!”
공간 이동 아티펙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로이드가 엘라의 목소리에 멈춰 섰다.
세실이 그녀를 폐위시키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아직은 참아야 하는 때라는 걸 알면서도 로이드는 서늘한 시선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여긴 어쩐 일이지.”
로이드의 차가운 태도에 엘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어딜 가세요? 또 국경의 공작령으로 가시는 건가요?”
엘라는 부러 울먹이며 얘기했다. 공간 아티펙트가 있는 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덤덤한 로이드의 대꾸에 엘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도대체 이제 와서 그 여자를 다시 찾는 이유가 뭔데!’
어떻게 오른 자리인데. 이대로 순순히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또…. 또 공녀에게 가시는 건가요? 리히덴에서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없잖아요…!”
악에 받친 엘라가 로이드의 팔에 매달리며 울먹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로이드는 질색하며 그녀를 뿌리쳤다.
“감히 누구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가.”
“폐, 폐하…!”
지금은 엘라와 문제를 만들 시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국경에 있는 레이라가 걱정이 되어 한시가 급했다.
손을 들어 마른세수하며 한숨을 삼킨 로이드는 다시 걸음을 뗐다.
“그 여자! 더는 폐하를 사랑하지 않아요! 저희가 한 짓이 있는데, 당연히 미워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폐하를 제일 위하는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비명처럼 터져 나온 엘라의 말에 로이드가 우뚝 멈춰 섰다.
“뭐…?”
인상을 찌푸린 채 돌아보는 로이드의 살기 어린 눈빛에 엘라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위협하는 듯한 로이드의 태도에 엘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위압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설마, 나를 사랑하기라도 한다 말할 셈이던가?”
“폐, 폐하….”
“황후라는 권력을 쥐기 위해서였음을 내가 모를 거라고? 난 홀든 가의 무기 무역을 탐냈고, 당신은 황후의 권력을 탐냈지. 서로 얻을 것을 얻어 냈으니 그 이상을 탐내지 마시오.”
엘라는 바들바들 떨며 로이드를 노려보았다. 눈에 어린 독기에 황제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얼마 남지 않은 그 알량한 권력이라도 즐기든지.’
눈썹을 꿈틀댄 그는 그 말을 내뱉는 대신 그저 등을 돌려 걸음을 내디뎠다.
그 자리를 내놓기 싫다며 괜한 발악이라도 하려 하면 피곤해지니 말이다.
엘라는 눈물 맺힌 눈으로 로이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절대 그냥은 안 당해.’
주먹 쥔 손을 파르르 떨던 그녀는 곧 홱 몸을 돌려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국경의 숲에서 출발한 아르제오는 작은 마을 몇 개를 빠르게 지나쳤다. 중간중간 멈춰 서서 수호목이 보이는 걸 확인하면서.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로렌스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국경과 가장 가까운 영지의 영주성에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이 온 군대에 아르제오는 등골이 오싹했다.
루이스의 편지가 아니었더라도 로렌스의 출정 우려는 있었겠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후드를 쓰고 빠르게 말을 달리는 그를 발견한 보초병이 잔뜩 경계했다.
“누구시오! 이곳은 지금 통제되어 함부로 지날 수 없습니다!”
그 앞에서 말을 멈춘 아르제오는 후드를 벗으며 목에 건 목걸이를 끄집어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걸 알고 왔다.”
황족임을 증명하는 펜던트를 확인한 병사는 얼른 예를 갖췄다.
“황자 전하, 여긴 어떻게….”
당황하는 병사를 보며 아르제오는 서늘한 얼굴로 재차 말했다.
“내가 그걸 왜 설명해야 하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황태자 전하께 안내해.”
“예, 전하.”
강압적인 아르제오의 태도에 병사는 굽신거리며 얼른 걸음을 옮겼다.
말에서 내린 그는 말을 다른 병사에게 맡기고 안내를 받으며 로렌스에게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아르제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릴 적엔 이런 얼굴로 로렌스를 만나러 가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천진한 어린아이였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다만 그리 길지는 않았고, 루이스와 로렌스가 황위 다툼을 벌인 뒤로는 줄곧 이런 얼굴이었다.
로렌스를 만날 때도, 루이스를 만날 때도.
그걸 루이스는 서운하게 생각한다며 몇 번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로렌스는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황태자로서 위엄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병사는 아르제오를 성내의 긴급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냥 평범한 나무로 여기기엔 위험부담이 큽니다. 저쪽에는 그 유명한 공녀도 있지 않습니까.”
안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오자, 병사가 재빨리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회의를 진행하던 목소리가 뚝 멎고, 기사 하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지금 회의 중인 거 모르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 기사를 향해 병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3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그제야 기사의 시선은 병사의 뒤에 선 아르제오를 향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기사의 인사를 들은 로렌스가 안에서 회의를 잠시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곧이어 기사단장과 몇 기사들이 회의실을 나섰고, 그 뒤에 아르제오에게 들어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단둘이 남게 된 회의실에서 로렌스는 여전히 서류를 훑으며 아르제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나타난 게냐.”
잠깐의 침묵 끝에 로렌스가 물었다. 동생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걱정하지 않았으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루이스 형님께서 전쟁이 아닌 방법을 택하셨으니, 전하께서는 전쟁을 택하시는 겁니까?”
딱딱한 아르제오의 말에 로렌스는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로렌스는 다리를 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턱을 괬다. 아르제오를 훑는 시선에는 하찮다는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폐하께서 포레스티아령을 손에 넣는 이에게 선위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너 또한 이 지겨운 황위 다툼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래, 매번 미끼로 흔들어 대는 자유에도 지치겠지. 그러니 빨리 끝내려 일을 벌이는 게 아니냐.”
“옳지 않습니다.”
“늘 옳을 수는 없는 법이다.”
단호한 로렌스의 태도에 아르제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리히덴의 후계 다툼에 공작령을 끌어들이는가. 그 땅이 탐이 나도, 이건 좋은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발루아 제국에 명분을 제공하며, 명백한 병력 차로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게 뻔했다.
“끝이 빤히 보이는데, 어째서 그리 가려 하십니까?”
미간을 일그러뜨린 아르제오는 결국 오랜 시간 마음에만 묻어 둔 말들을 쏟아 냈다.
“대체 어째서 황위가 그렇게나 중요합니까? 형님 두 분께서 타협점을 찾으실 생각은 왜 안 하십니까? 형제를 괴롭히면서까지 그 자리에 올라서 무얼 하시려고요? 그게 그렇게 대단한 자립니까?”
울분을 쏟아 내는 아르제오를 보면서도 로렌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저 고요히, 어린 제 동생을 응시했다.
“황족으로 태어나, 황위를 고작 그 정도로 생각하는 건 너 하나일 거다. 아니지, 황족으로 태어나지 않았어도 너처럼 하찮게 여기는 이는 없을 거다.”
로렌스는 픽 웃으며 말했다.
아르제오는 어릴 적부터 권력, 자리보다도 중요한 게 많은 아이였다. 이건 가치관의 차이라 로렌스는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제 생각을 아르제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루이스와의 경쟁에서 아르제오는 자유롭지 못했다.
둘의 경쟁인데, 그사이에 끼어서 참고 감내하며 지냈다.
“넌 늘 자유를 원했지. 황족으로서의 긍지도 잊은 채 말이다.”
“현실을 일찍 직시했을 뿐입니다. 애초에 전 그 자리에 관심이 없었고, 그러니 자연스레 더 소중한 것들이 생긴 것이고요. 하지만 전하께선 무엇보다도 황위에 집착하셨습니다.”
“집착이라. 그래, 집착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
로렌스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웃음은 뚝 그치면서, 서늘한 시선으로 아르제오를 응시했다.
“그 자리는 본래부터 내 것이다. 집착할 필요가 있던가? 집착하고 있는 것은 루이스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려 애쓰는 꼴과 다를 게 없어.”
아르제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루이스는 누구보다도 제국을 생각한다.
로렌스도 제국을 위하는 마음은 있을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이 우선시하는 것이 너무나도 달랐다.
어느 한쪽이 잘못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 화가 날 뿐.
아르제오는 주먹을 꾹 움켜쥐고는 화를 눌러 참았다. 터지려는 한숨을 애써 삼킨 그는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은 안 됩니다.”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발루아와 정면으로 맞붙어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미 국경의 숲 너머에는 병사들이 깔렸습니다. 여기서 멈추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쪽의 희생만 낼 테니까요.”
로렌스의 눈빛이 한순간에 깊이 가라앉았다.
서늘하고 냉정한 시선은 똑바로 아르제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차갑기만 한 표정으로 로렌스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
아르제오는 얼굴에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젠장.’
이성적이지 못했던 제 탓이었다.
입술을 짓씹는 그를 보며 로렌스가 재차 물었다.
“공작령에 있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