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다른 건 좋은 소식입니까?”
서신을 내려놓는 아르제오의 물음에 공작은 레이라의 손에 들린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를 겁니다. 좋게도 나쁘게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작의 대답에 아르제오가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드러났다.
“그대는 어때? 좋은 소식 같아?”
레이라는 찰나 망설였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2황자 전하께 온 서신입니다. 전쟁 대신 거래를 제안하시기도 하셨고요. 혹시 어느 쪽에 손해가 나더라도, 전 전쟁을 피할 방법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는 루이스의 서신을 아르제오에게 내밀었다.
루이스는 평화협정을 원하고 있었다. 두 제국 간에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 주는 대신,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약속.
그러면서 루이스는 관계 회복의 의사도 밝혔다. 더 멀리 내다보았을 때, 관계 회복이 양쪽에 모두 이득인 것도 사실이었다.
‘형님은 애초부터 전쟁을 일으킬 마음은 없던 거야.’
하지만 루이스의 움직임으로 로렌스는 전쟁을 준비했을 터였다.
그 증거로 아르제오의 앞으로 온 루이스의 편지는 로렌스가 군대를 꾸리고 있음을 알렸다.
그 내용을 그가 알리니 공작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턱을 매만졌다.
‘힘들겠지….’
가까운 사람들이 싸우는 것도 마음이 불편할 터인데, 하물며 친형제끼리 황위에 목숨을 걸고 싸우니 오죽할까.
아르제오가 힘든 것이 레이라는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레이라는 주저 없이 2황자를 선택할 것이다.
전쟁을 바라지 않는 쪽과 거래하는 것이 그녀가 원하는 일이었으니까.
입을 꾹 다문 채로 루이스의 편지에 시선을 고정했던 아르제오가 이내 테이블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 군대는 수호목을 넘어설 수 없을 겁니다. 넘는다고 해도, 국경의 숲을 쉽게 빠져나올 수도 없고요.”
“하지만 그쪽의 군대가 움직인다면, 폐하께서 내리실 결정이 달라질 겁니다.”
“그렇겠죠. 공격당한다면, 그건 얘기가 달라지니까요.”
공작은 입술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황제는 이쪽에서 원한다면 숲 너머에서 적의 군대를 맞이해도 상관없다는 말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수호목을 넘어설 수 없을 거예요.”
가만히 얘기를 듣던 레이라가 말했다. 수호목은 시타델의 무지막지하게 큰 나무들만큼이나 거대했다.
게다가 가지가 촘촘하게 뻗어나 있고, 나뭇잎은 뻣뻣했다. 지나려면 베어내야 하겠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다.
처음 아르제오에게서 받은 씨앗은 시타델 섬에서 키웠다. 그 가지로 씨앗을 만들려던 레이라는 그게 평범한 나무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손으로 꺾어도 부러지지 않고, 검을 휘둘러도 단번에 부러지지 않았다.
그녀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어서 가지에 손을 뻗어 겨우 씨앗으로 만들었다.
그걸 지나고 또 국경의 숲을 헤매야 한다면, 압도적으로 리히덴의 군대에 너무나도 불리했다.
“확실히, 수호목은 보통 나무가 아닙니다. 마탑까지 가서 구해 온 보람이 있을 만큼요.”
레이라의 말을 들은 아르제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군대를 이끌고 숲에 접근한다는 그 자체겠죠.”
“맞습니다.”
설령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군대의 이동은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까지 알게 되면, 로이드가 절대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군대가 출정한다고 해도, 곧장 숲으로 오진 않을 겁니다. 수호목을 발견한 시점에서 멈춰서 대책을 세우겠죠.”
아무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공작은 군대가 출정한 시점부터, 전쟁을 막기는 힘들 거라고 예상했다. 다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뿐.
‘폐하를 설득한다고 해도….’
레이라 역시, 그들이 정말 수호목에 대한 대책을 세워 국경의 숲을 넘으면 전쟁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다.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아르제오가 이어 말했다.
“대책을 위해 군대가 멈춘 시점에, 제가 그들에게 가겠습니다.”
“네? 제오, 그건 너무 위험해요.”
눈썹을 늘어뜨리는 레이라를 보며 제오가 괜찮다며 웃었다.
“발루아 사람이면 위험하겠지만, 난 리히덴의 황족이니까 괜찮을 거야. 숲과 떨어져 있을 때 그들을 돌려보낼 수 있다면, 전쟁까지 번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의 대답에도 레이라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그게 제일 나은 방법 같습니다.”
레이라를 생각하면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더 나은 방법을 찾기는 어려웠다.
“형님께서 이 서신을 보낼 당시 출정을 준비 중이었으니까, 시간이 없을 겁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아르제오가 자리에서 일어서니, 레이라가 저도 모르게 따라 일어났다.
“지금요? 바로 움직이려고요?”
“어디까지 왔을지 몰라. 당장 움직이는 게 맞아. 먼저 가 보겠습니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시죠. 돕겠습니다.”
“예, 공작님.”
공작 집무실을 나서는 아르제오를 레이라가 따라나섰다.
그가 가야 하는 이유는 이해했다. 시간이 없어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무장한 군대로 간다는 건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저택 밖까지 따라나선 레이라는 아르제오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숲 너머까지 안내할게요.”
“위험해. 공작가 기사의 안내를 받으면 돼.”
고개를 젓는 아르제오에게 레이라도 단호히 말했다.
“수호목을 지나려면 내가 있어야 해요. 그러니 같이 가요.”
물러서지 않을 태도에 아르제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대로, 수호목을 지나려면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신 곧장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야 해. 알겠지?”
“네.”
공작은 아르제오에게 말을 한 필 내어 주었다. 조심할 것을 당부한 공작은 두 사람을 숲으로 배웅했다.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공작가의 기사 한 명을 대동하고 숲으로 들어섰다.
그가 리히덴의 군대로 가고 나면 돌아오는 길은 레이라 혼자 와야 하니까.
“…언제 다시 와요?”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숲을 지나던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내뱉은 질문이었다. 아르제오가 곤란해할 질문일 테니.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아르제오는 꼭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떨어지기 싫은 건 오히려 아르제오 쪽이었다. 다 내던지고 그녀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게 레이라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르제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보고 싶을까 봐?”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네.”
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도리어 당황한 건 아르제오였다.
‘이럴 땐 정말 거침없다니까.’
다른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법한 말도, 레이라는 똑바로 마주하며 전했다. 그래서 매번, 더 설레는 쪽은 그였다.
‘치사하네.’
먼저 마음을 내어 준 것도 그이거늘, 이렇게 거침없어서 자꾸만 더 빠져들었다.
이미 과거가 되었을 터인 황제가 곁을 맴도는 것마저 신경에 거슬릴 만큼.
픽 웃은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그러고는 조금 떨어져서 뒤따르는 기사가 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그대보다 내가 더 보고 싶어서 못 견딜 테니까.”
“알겠어요. 조심해요.”
“응.”
싱긋 웃는 아르제오를 따라 레이라도 마지못해 웃었다.
만남은 짧고 기다림은 길었다. 하지만 이번엔 전처럼 기한 없는 기다림은 아닐 터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마냥 그리움만 안고 있던 날에도, 아르제오는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났었다.
초겨울에 쫄딱 젖어서 나타났던 일을 떠올린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수호목에 다다른 레이라는 고개를 돌려 뒤따르던 기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예, 아가씨.”
기사는 잠자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레이라는 눈앞의 수호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수호목을 매만지는 그녀의 손에서 청록빛이 나무로 스며들자, 그곳에 지날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아르제오가 먼저 수호목을 지나고 그 뒤를 레이라가 따랐다.
“여기까지야.”
수호목을 지나자마자 아르제오가 조금 조급하게 말했다. 레이라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군대가 그렇게 빨리 수호목에 대한 대책을 세웠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르제오는 불안함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레이라를 그만 보내려는 아르제오의 손을 그녀가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쪽. 힘없이 이끌려 상체를 조금 숙인 아르제오의 뺨에 그녀의 입술이 찰나 닿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데, 레이라가 이번엔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조심해요.”
“…응.”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에, 아르제오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럼 갈게요.”
품에서 떨어져 나가는 온기가 한없이 아쉬웠지만, 아르제오는 붙잡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야.’
그 대신 수호목 사이로 다시 돌아가는 레이라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금방 돌아올게.”
“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레이라는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제오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로 수호목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레이라가 다시 지나자 수호목의 틈은 원래 없던 것처럼 다시 사라졌다.
굳게 선 높은 수호목을 한차례 올려다본 아르제오는 공작이 내어 준 말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곧장, 어디까지 왔을지 모를 군대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 * *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아르제오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침묵 속에서 국경의 숲을 지나던 기사가 못 참고 레이라에게 물었다.
포레스티아가의 모두 늘 자신을 지나치게 걱정했다.
레이라는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픽 웃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경. 하지만 전 괜찮아요.”
그녀의 미소를 보고 난 다음에야 기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는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여전히 레이라가 걱정이었지만, 숲속을 거니는 그녀는 그저 평온해 보였다.
아르제오의 일과 전쟁이라는 무서운 일 때문에 요 며칠 시타델 섬의 약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레이라는 국경의 커다란 나무들을 둘러보며 바빠도 시타델 섬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국경의 숲을 나서고, 기사는 레이라를 저택까지 호위했다.
국경의 숲 입구는 공작가의 기사들이 지켰지만, 숲의 근처에는 여전히 황궁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레이라와 기사를 발견한 병사 하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곧 제 동료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하곤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병사는 작은 쪽지에 짤막하게 자신이 본 것을 적었다.
「세 사람이 국경의 숲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왔을 때는 둘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