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덥석 잡아 오는 손에 레이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냥 손을 잡는 거라고 하기엔 아르제오의 손길이 다급하고 거칠어서.
“제오? 괜찮아요?”
“…응.”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라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답했지만, 눈에 띄게 얼굴이 창백하고 식은땀마저 흘리고 있었다.
곧장 걸음을 멈춘 레이라는 손을 뻗어 아르제오의 뺨을 어루만졌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요.”
“진짜 괜찮아.”
“이런 얼굴로요?”
속상하다는 얼굴로 되물으니 그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여긴 리히덴이 아니에요.”
“알아.”
“다른 건 다 솔직하면서 그런 건 솔직하지 못하네요.”
투덜거리듯 말하며 레이라가 아르제오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팔을 둘러 그의 허리를 안았다.
“숲에서 본 건 허상이에요.”
“…알아.”
“앞으로 일어날 일도 아니고요.”
“응.”
제대로 알고 있다고 중얼거리는 아르제오 때문에 그녀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좋아요. 손잡게 해 줄 테니까 이제 가죠?”
“…어린애 취급하네.”
“지금 제오는 어린애와 같아요.”
자신이 연상인데 아이 취급한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아르제오는 얌전히 레이라의 손을 잡았다.
단단히 붙잡고 걸음을 옮기면서도, 침묵이 맴돌면 아르제오는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참, 있잖아요.”
“응, 레이라.”
“제오가 준 이 나무, 마탑에서 이름을 지어 주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요.”
아르제오는 눈을 도르륵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네. 그냥 방풍목 정도면 되지 않을까?”
“바람막이는 아니잖아요.”
아르제오가 제시한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레이라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럼 뭐라고 짓고 싶은데?”
“음….”
턱을 매만지며 레이라가 고민에 빠졌다. 고민하는 얼굴이 귀여워 보였다.
보고 있으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수호목은 어때요?”
“수호목?”
“지키려고 만든 거니까요.”
눈을 빛내며 하는 말에 아르제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거.”
레이라도 자신이 생각해 낸 이름이 퍽 마음에 드는지 입술을 매만지며 나무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나무로 부디 전쟁을 막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며, 두 사람은 천천히 숲을 지났다.
아르제오는 참 신기한 기분이었다. 꼬박 하루를 헤매고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던 숲이었다.
그런데 레이라와 함께 걷는 숲은 마치 잘 아는 숲을 걷는 것 같았다.
전혀 헤매지 않고, 곧장 리히덴과 맞닿은 국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신기하네.”
깊이 숨을 들이마신 아르제오가 숲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뭐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레이라를 보며 그가 눈앞의 높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두렵기만 했던 숲인데, 그대와 있으니까 평범한 숲처럼 느껴져서.”
“그래요?”
“응. 게다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네. 그렇게 헤맸는데.”
“저희는 길을 헤매지 않거든요.”
“왜?”
“포레스티아의 이름을 가진 자는, 국경의 숲에서 헤매지 않아요. 그게 공작가가 국경을 지키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포레스티아의 이름을 가진 자는 국경의 숲에서 헤매지 않는다. 가문의 문장을 단 공작가의 기사들도, 정해진 길 외에는 다니지 못했다.
제대로 된 입국 절차 없이는, 절대 이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역시 근사한 이름이네, 포레스티아. 과연 국경의 수호자야.”
“그건 너무 거창해요.”
“맞는 말인데, 뭐. 아무도 돌보지 않아도, 멋지게 자리를 지키고 있기도 하고.”
국경의 숲 끝자락에 다다른 두 사람은, 일정한 간격을 띄우며 숲을 둘러싸고 씨앗을 심었다.
함께 씨앗을 심고 있자니 리히덴에서의 일이 떠올라,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왜?”
“리히덴에 있을 때가 생각나서요.”
“꽃을 피우면서 다니던 거?”
“네. 곁에서 함께 손에 흙을 묻힌 건, 제오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거 좋은 소식이네.”
그녀에게 무언가, 자신과 함께 처음 했던 것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게 좋았다.
자신과 함께 한 시간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으면 싶었다.
레이라는 그때 당시를 떠올리며 작게 키득거렸다.
“제오가 함께 씨앗을 심는 걸 보았던 유진의 얼굴은 지금 생각해도 웃겨요.”
“나도 씨앗을 심은 건 그때가 처음이니까.”
두 사람은 리히덴에서의 일들을 도란도란 떠들며 씨앗을 심었다.
국경을 둘러싸고 나무로 방벽을 세울 예정이었기 때문에 씨앗을 심는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무는 언제 키울 거야?”
“유진이 씨앗을 가지러 마탑에 갔다면서요. 유진이 오고 난 다음에요.”
그러냐며 다시 씨앗을 심는 아르제오를 레이라가 힐끔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오, 정말 괜찮은 거예요?”
“뭐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도 그렇지만, 리히덴의 정보를 이쪽에 넘겼으니까요.”
그 사실이 밝혀지면 아르제오는 리히덴으로 돌아가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황태자는 이미 그가 사라진 것을 알고 있을 테고.
아르제오는 입 안에 쓴맛이 도는 걸 느끼며 픽 웃었다.
“그러니까 망명하면 받아 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걸 알기에 그의 미소에 함께 어울려 주었다.
“어차피 자유로워지면 오기로 했잖아요. 저랑 같이 있을 거라면서요.”
부러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하니 아르제오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래, 그대가 날 받아 준다면.”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씨앗을 심으니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그리 힘겹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제오와 있으면 즐거우니까 어서 오기나 해요.”
마지막 씨앗을 심으며 레이라가 말했다. 아르제오는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내가 바라는 바야.”
“자, 이제 다 심었으니까 돌아가요.”
“조금만 더. 저택으로 돌아가면 보는 눈이 많잖아.”
“여긴 제가 보고 있는걸요?”
“그대는 봐야지.”
능글맞게 웃는 아르제오를 슬쩍 밀어낸 레이라는 그의 손에 깍지를 껴 붙잡았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해요. 너무 늦으면 숲이 어두워서 또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지도 몰라요.”
“쳇.”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리면서도, 아르제오는 순순히 레이라를 따라나섰다.
꼭 붙잡은 손이 퍽 마음에 들기도 했고, 끔찍한 광경을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기도 했다.
* * *
“군대를 꾸리고 계신답니다.”
제 보좌관의 보고에 루이스는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지.”
아르제오는 사라졌다. 그 태도가 달라진 시기로 보아, 포레스티아의 공녀에게 간 거라고 추측되었다.
그녀가 제국에서 발견됐다는 소문이 돌았을 즈음 이후, 제 아우는 이곳을 더욱 숨 막히게 여겼으니.
‘게다가 공작령을 노린다는 사실을 안 직후 사라졌으니, 아마도 그녀가 위험할까 걱정되어 그곳으로 간 거겠지.’
판단보다 먼저 몸이 움직일 만큼, 공녀가 제 아우에게 소중하다는 뜻이었다.
줄곧 갈피를 못 잡고 헤매던 아르제오에게, 선명한 선택지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루이스는 그걸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불안했다.
자신이 예측할 수 있는 일이라면, 로렌스 역시 예측 가능한 범위라는 것. 그리고 황태자가 어찌 움직일지 알 수 없는 게 불안했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전쟁을 일으켜 공작가를 손에 넣을 생각은 없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계약을 맺어, 황태자의 자리에 오를 생각이었다.
아르제오가 이렇게 갑자기 움직인 건 예상 밖이었지만 말이다.
픽 웃은 루이스가 다 적은 서신을 훑고는 곱게 접었다. 그리고 그걸 제 보좌관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걸 포레스티아 공작가로 보내 줘. 우린 정식으로 사절단을 보내 평화협정을 맺기를 바란다고.”
“예, 전하.”
“우리가 움직이면 형님께서도 곧장 출정하시겠지. 내가 거래를 택한다면 형님은 전쟁을 일으키실 테니.”
“하지만 그 군대를 막을 병력이 저희 쪽에는 없습니다, 전하.”
“안다. 그래서 서신을 하나 더 준비했지.”
그렇게 말하며 루이스는 서신을 하나 더 건넸다. 수신인은 아르제오였다.
그걸 확인한 보좌관이 놀란 눈으로 루이스를 바라보니, 그가 턱을 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아마 거기 있을 것 같아서.”
“3황자 전하께서 거기에 계시면 상황이 위험한 게 아닙니까? 황태자 전하의 명으로 그쪽에 있는 거라면….”
“괜찮아. 형님의 명으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니까. 부탁할게.”
“예, 전하.”
뒤돌아 나가는 보좌관의 뒷모습을 보며 루이스는 한숨을 삼켰다.
로렌스가 강경하게 나갈 건 예상 범위 내였다. 자신이 움직이는 것과 반대로 행동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전쟁을 일으키는 건 곤란했다. 병력 차는 확실하고, 국경의 숲도 건재한 이상 이쪽에 승산은 없으니까.
‘이쪽의 희생만 불러일으킬 거야.’
그러니 서둘러야 했다. 로렌스의 손에 제국을 맡길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는 피로 얼룩진 황위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야겠어.’
* * *
마탑에서 온 유진이 공작저에 도착한 직후, 레이라는 국경의 숲 너머에 수호목을 키워 냈다.
이를 발견한 루이스는 질린 얼굴로 웃었다. 로렌스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여서.
로렌스는 절대 웃을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수호목을 키우기 전 아슬아슬하게 루이스의 서신이 무사히 공작저에 도착했다.
에드가는 두 개의 서신을 발견한 즉시 아르제오를 찾았다.
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니, 에드가가 심각한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레이라까지 부르진 않았는데. 함께 있었나 봅니다.”
“예. 그리고 무슨 일이 있다면, 레이라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함께 왔습니다.”
에드가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공작은 여전히 아르제오를 깍듯이 대했다.
어쨌든 리히덴의 황족이었고, 아직 레이라와의 사이가 명확하지 않았으니.
“일단 앉죠.”
그리고 두 사람이 맞은편에 앉자 공작이 두 개의 서신을 소파 사이의 티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하나는 제 앞으로 온 거라 확인했습니다만…. 하나는 은인께 온 겁니다.”
황자 전하라는 호칭을 아르제오가 질색한 탓에 공작은 그를 여전히 ‘은인’이라고 불렀다. 마땅히 다른 호칭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아르제오는 눈에 익은 루이스의 글씨체에 쓰게 웃었다.
‘역시 알고 계시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마도 루이스는 이유까지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루이스는 아주 작은 힌트로도,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뛰어났다.
아르제오가 제 앞으로 온 서신을 집어 드니, 레이라가 공작의 허락을 구하고 공작가로 온 서신을 집었다.
두 사람은 한차례 시선을 주고받고는 각자 서신을 펼쳤다.
짧은 침묵 끝에, 두 사람의 표정은 극명히 나뉘었다.
레이라는 화색이 도는 얼굴이었던 반면, 아르제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레이라가 읽은 서신은 이미 공작도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니 에드가는 아르제오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확인한 공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쪽은 좋지 않은 소식이었던 모양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