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제가 가겠습니다.”
공작의 일그러진 표정을 확인한 집사, 제클린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부탁하네.”
에드가는 제발 집사가 먼저 도착하길 빌며 저택으로 걸음을 뗐다.
제클린은 사용인들이 다니는 지름길로 빠르게 달려, 레이라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조금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레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클린은 재빨리 문고리를 돌렸다.
“아가씨.”
“제클린? 아버지가 돌아오셨나요?”
“예. 그런데 공작님과 함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아가씨를 찾고 계십니다.”
조급하게 이어진 집사의 말에 레이라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아르제오를 향했다.
“폐하께서 이리로 오고 계신다고요?”
“황제가 그대를 왜 찾아?”
“지금 그게 문제예요?”
레이라는 미간을 찌푸리는 아르제오의 등을 떠밀었다.
“제클린, 제오가 폐하와 마주치지 않도록 부탁해요.”
“예, 아가씨.”
“잠깐, 레이라….”
“나중에요.”
아르제오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순순히 물러났다. 그가 제클린을 따라나서는 걸 확인한 레이라도 곧 걸음을 뗐다.
만일 제 방으로 오고 있다면 이쪽에서 마중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럼 로이드가 아르제오를 발견할 확률은 더 없어질 테니.
복도를 따라 조금 걸으니 레이라의 예상대로, 하녀의 안내를 받으며 다가오는 로이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라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로이드를 마주하고는 곧 예를 갖췄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런 인사는 됐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린 채 묻는 말에 로이드는 심장이 지끈거림을 느꼈다.
“공작과 얘기는 끝났다. 마탑에 의뢰해서 만든 나무를 국경에 세우겠다고 했다지?”
“그것 때문에 절 찾으신 거군요.”
“…딱히 그렇지는….”
로이드는 말끝을 흐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차를 준비해 주렴.”
“예, 아가씨.”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폐하.”
로이드는 레이라와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다. 딱딱하게 앉아서 하는 일 얘기 외에 다른 소소한 얘기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밖은 겨울이니 날씨가 너무 춥지 않을까, 그로 인해 레이라가 감기라도 걸리진 않을까, 걱정되어서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지.”
결국 순순히 응접실로 향하게 된 로이드는 어쩐지 아쉬움을 느꼈다.
그와 다르게 레이라는 주변을 힐끔거리며 초조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 있었지만.
황제를 안내했던 하녀는 두 사람을 다시 응접실로 안내하고, 차와 다과를 내왔다.
레이라가 즐겨 마시는 차의 꽃 향이 응접실 안에 가득 퍼지자, 로이드는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이런 추운 날에도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겠지.’
말려도 정원에서 시간을 보낼 그녀였다. 그러니 자신은 따뜻한 곳에서 함께 하는 것이 새삼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저와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냉랭한 태도에 로이드는 한숨을 삼켰다.
“…전쟁을 반대한 건 당신 뜻도 있었겠지.”
“네.”
레이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황궁에 있을 적에도 전 계속 같은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늘 폐하께 말씀드렸었죠. 전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하니, 전쟁은 정말 피할 수 없을 때 쓰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군.”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람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겨지지는 않아요.”
가만히 얘기를 듣던 로이드는 덤덤히 차를 머금었다. 입 안에 퍼지는 꽃 향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랬지.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지.”
나직한 로이드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레이라는 이것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막도록 황제를 설득할 기회.
“폐하,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저도 도울게요.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설 겁니다. 그러니, 부디 전쟁은 재고해 주세요.”
“저쪽이 군대를 이끌고 와도 말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되묻는 로이드에게 레이라는 부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전쟁이 아닌 방법이 있다면, 폐하께서 그 방법을 택해 주시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로이드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스스로도 한심하고 비겁하게 느껴졌다.
‘이런 때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니.’
그럼 전쟁을 택하지 않으면, 제게 기회를 주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묻지는 못했다. 로이드는 스스로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더 이상 레이라에게 미움받을 짓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최대한 전쟁은 피하도록 하지.”
기회를 달라는 말은 못 했지만, 결국은 기회를 구걸하는 말을 했다.
레이라는 조금 놀란 듯이 로이드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 말에 내포된 의미를 알 것 같아서 금세 시선을 피했다.
묻는다면 그녀는 곧장 거절의 말을 뱉어 낼 걸 알고 있었다.
“미리 말하지만, 공작령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움직일 것이다.”
“…예, 폐하.”
잠시간 침묵이 맴도는 응접실에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로이드는 공작이나 헤레이스가 왔을 거라 예상하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선 이를 힐끔 바라본 레이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인의 차림으로 나타난 아르제오였다.
‘제, 제오?’
눈을 크게 뜬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홱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예상과 달리 공작이나 헤레이스가 아니자, 로이드가 서늘하게 물었다. 그러자 아르제오는 익숙한 듯이 예를 갖추며 레이라에게 다가섰다.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상체를 살짝 기울인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마탑에서 의뢰하신 씨앗을 가지고 사람이 왔습니다. 어찌할까요?”
눈이 마주친 아르제오는 레이라에게만 보이도록 슬쩍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사람이었지.’
레이라는 다시금 아르제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렸다. 병사들에게 쫓기면서도 새로운 경험이라며 신이 났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녀가 슬쩍 로이드에게 시선을 돌리자, 아르제오는 속 깊은 곳에서 그 찰나의 시선도 다시 빼앗고 싶다고 생각했다.
로이드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아르제오를 응시하고 있었다.
감히 황제와 대면 중인데 그깟 일로 찾아왔냐는 시선이었다.
난감한 기색으로 고민하는 레이라를 보며 로이드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내 줘야겠지.’
그녀는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것보다 저쪽이 더 기쁜 소식일 테니.
다 아는 사실인데도 입 안이 썼다. 이마저도 전부 자신이 자처한 일이었지만.
레이라가 눈앞에 없는 모든 시간이 아쉬웠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녀를 버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으니.
로이드는 손을 들어 제 눈가를 가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당신이 기다리던 소식이겠군. 식물이라면 뭐든 좋아하니 말이야. 그만 가 봐. 나도 갈 테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아르제오는 레이라가 로이드를 배웅하는데도 계속 그녀의 곁에 붙어 있었다.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묘하게 거슬렸다.
“레이라.”
“예, 폐하.”
“당신만 키울 수 있다던 그 나무는, 서둘러 심어 주면 좋겠군.”
“그렇게 할게요.”
어쩌면 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씨앗을 심어 나무를 기를 생각에 레이라는 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미소에 사르르 기분이 풀린 로이드는 곧 마차에 올라타 공작저를 나섰다.
“…너무 웃어 주는 거 아냐?”
줄곧 사용인인 척하고 있던 아르제오가 마차가 사라지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며 레이라를 흘겨보았다.
“마탑에서 사람이 왔다는 걸 알리러 온 거잖아요. 어디 안내해 보시죠?”
“그대는 여전히 나한테 매정해.”
“그런 편이죠.”
어깨를 으쓱이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픽 웃었다. 하지만 꽁한 마음이 완전히 풀어지진 않아서 슬쩍 입술을 비죽였다.
“황제가 그대는 왜 만난 거야? 나무로 국경에 벽을 세우겠다고 해서?”
“그렇죠.”
“그게 그대를 만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요.”
이게 굳이 자신까지 찾아왔어야 할 일이냐고 묻는다면, 그녀 역시 대답할 수 없었다.
일전의 대화로 로이드의 의중을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레이라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복잡한 그녀의 표정에 아르제오도 속이 복잡해졌다.
‘설마, 이제 와서 다시 마음이 생겼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겠지.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로이드의 태도는 그랬다.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며, 조금이라도 레이라의 마음에 들려는 듯이. 그게 아르제오의 눈에는 훤히 보이는 것 같아서 속이 뒤집혔다.
“그나저나, 정말 마탑에서 사람이 왔어요?”
다시 레이라의 방으로 돌아가며 묻는 말에 아르제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탑은 텔레포트 아티펙트를 그렇게 잘 내어 주는 편이 아니야. 아무리 유진이 유능해도 이렇게 빨리 오지는 못하지.”
“그럼 거짓말이에요?”
“그대가 황제와 단둘이 있는 게 싫어서.”
아르제오의 대답에 레이라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질투해요?”
“응.”
“…이런 건 꽤 솔직하네요.”
“그런 편이야.”
“그런 점이 좋지만요.”
“…그대도 그런 건 참 솔직한 편이야.”
“저도 그런 편이에요.”
싱긋 웃는 레이라를 보는 아르제오의 시선이 한없이 달콤했다.
이렇게나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걸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녀를 버렸던 로이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아르제오와 함께 방으로 돌아간 레이라는 곧장 씨앗 주머니를 챙겼다.
“이제 가요.”
“어딜?”
“폐하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씨앗을 심으러요.”
아직 숲이 조금 꺼려졌지만, 아르제오는 내색하지 않으며 싱긋 웃었다.
“그래.”
그렇게 방을 나선 두 사람은 국경의 숲으로 향했다.
중간에 황궁 병사들과 마주쳤지만, 그들은 레이라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그저 못 본 척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
“오늘도 수고가 많아요.”
“아가씨, 숲에 들어가십니까?”
숲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공작가 기사들에게 인사를 건네니, 그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레이라는 손에 든 씨앗 주머니를 슬쩍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네, 이것들 심으러요.”
“숲에 꽃이라도 심으십니까?”
“아직 비밀이에요.”
싱긋 웃는 그녀를 기사들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남긴 두 사람은 곧 숲 안으로 들어섰다.
이 씨앗들은 숲의 바깥 경계선에 전부 심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르제오가 미친 듯이 헤맸던 숲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이번엔 레이라가 함께 있으니 괜찮을 줄 알았던 아르제오는, 숲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목이 조이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눈앞에 반복되었던 끔찍한 광경이 현실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아르제오는 정신이 아찔해져 다급히 레이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