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피곤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국경의 숲을 홀로 헤매는 건, 몸보다도 정신이 더 힘든 법이었다.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보고 싶었어.”
“저도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같이 있자.”
“하지만 제오는 쉬어야 해요.”
“이게 쉬는 거야.”
아르제오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친 숲이었어.”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레이라가 눈을 흘겼다.
“저 숲에 혼자 들어서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이제 알았죠?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덕분에 레이라, 그대는 이제 안전하니까.”
그거면 되었다는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흘겨보았다.
“제오도 제가 섬에 가 있기를 바라요?”
“글쎄.”
아르제오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대답을 피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안전이 보장된 곳에 있었으면 했지만, 그 대답은 레이라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제오는 오늘 쉬어야 해요. 피곤하죠?”
품에서 벗어나려는 레이라를 그가 순순히 놓아주었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게 손을 놓지는 않았다.
“그대가 눈앞에 있어야 안심이 돼.”
애틋한 아르제오의 눈을 보며 레이라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런 그의 태도에서 숲에서 본 것들이 어떤 건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다.
심한 경우 트라우마가 생겨 보통의 숲까지 피하게 되기도 했다.
레이라는 아르제오의 손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
“힘들면 숲에는 가지 않아도 돼요.”
“별로.”
아르제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가 옆에 있으면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아르제오는 은근슬쩍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 포옹의 제스처에 레이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못 이기는 척 안기려는데.
똑똑.
“아가씨, 손님방이 준비됐….”
헤레이스가 미리 일러둔 말 때문에 노크를 하고 곧장 문을 연 로라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척 봐도 분위기가 묘한 것이, 로라는 눈을 부릅뜨고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방이 준비됐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지만, 로라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런 로라를 눈치챈 레이라가 싱긋 웃으며 아르제오와 함께 나섰다.
“방까지 바래다줄게요.”
“그럴 필요 없어.”
“제가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요.”
직설적인 말에 아르제오는 귀를 붉게 물들이며 살짝 고개를 떨어트렸다.
경악한 로라는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며 앞장섰다.
소공작님께 알려야 할 중대 사항이라는 중얼거림에 레이라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쉬어요.”
“레이라, 지금 다시 숲에 들어갈 생각은 관둬.”
“이 부분은 저도 은인께 동의합니다. 아가씨, 공작님과 소공작님 모두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경계했었냐는 듯이 맞장구를 치는 두 사람을 보며 레이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알현 요청을 넣고, 설득하기 위한 자료를 준비한 에드가는 황궁으로 향하기 위해, 이른 아침 공작저를 나섰다.
그런데 텔레포트 아티펙트가 있는 곳에 다다른 공작은 어렵지 않게 로이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국의 주요 지방에는 대신들이 빠르게 오갈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었다.
황제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특히나 포레스티아에는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 같은 거였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결정은 했는가?”
“예, 찾아뵈러 황궁으로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알현 요청은 들었다. 하지만 지금 시기에 공작이 잠시라도 공작령을 비우는 건 좋지 않을 듯싶어 내가 왔다.”
로이드의 대답에 에드가는 남몰래 입을 떡 벌렸다.
그 말은 제가 뵙기를 청했다고 황제가 친히 만나러 와 준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
로이드는 그저 작은 기회라도 붙잡고 레이라를 볼 욕심에 그리 한 것이지만, 이를 모르는 공작은 등골이 서늘했다.
“얘기는 공작저로 돌아가서 듣지.”
“예, 폐하.”
그리하여 뜻하지 않게 공작저로 향하던 에드가는 마차에서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현재 공작저에는 이러한 사태를 불러일으킨, 국경의 숲에 홀로 들어선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함께 마차로 돌아가던 에드가는 차마 겉으로 티를 내지는 못하고 속만 태웠다.
“두고 간 병사들이 폐를 끼치지는 않았는가?”
“예…?”
아르제오의 존재에 식은땀을 흘리던 공작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제가 지금 무엇을 들은 건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감시 목적으로 병사들을 두려던 황제였다.
리히덴을 삼키기 위해 전쟁을 원하던 그였고, 그 끝에는 대륙 통일이라는 꿈도 있지 않을까 짐작했었다.
그런데 숲에 침입자가 나타났다며 공작저를 찾았을 때부터 황제의 태도가 이상했다.
공작의 결정을 기다리겠다는 둥, 원하면 숲 너머에서 리히덴의 군대를 맞겠다고까지 했다.
국경의 숲은 지나기가 까다로운 만큼, 이쪽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인데도 말이다.
“그, 혹시 몰라서 공작가 기사들과 함께 대부분 숲 근처에 대기 중입니다.”
“그렇군.”
간결한 대답에, 정말 병사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두고 가신 거라고 새삼 실감했다.
“결정은 내렸나?”
마차 안에 잠시 맴돌던 침묵은, 로이드의 물음으로 재차 깨졌다.
“…여기서 들으시겠습니까?”
“그러지.”
어차피 둘만 있는 공간, 지금 듣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것 같았다.
지금 모든 얘기를 끝내 놓으면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레이라와 조금은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꿍꿍이였다.
이를 알 리가 없는 공작은 준비해온 서류를 로이드에게 건네며 설명을 시작했다.
거대한 벽과 같은 나무에 대한 설명과 그걸 국경에 심으면 요새처럼 침입을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시간을 벌고 난 뒤에 나라 간의 타협점을 찾고자 하는 것까지. 그것이 포레스티아의 결정이라고.
서류에는 로이드가 리히덴을 탐내는 이유로 추측되는 것들을 얻을 방법까지 적혀 있었다.
가만히 서류를 살피며 얘기를 듣던 로이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무’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공작의 결정에 레이라의 의견도 있는 듯했다.
“…그럼, 공작이 말한 요새는 레이라의 힘으로 세우는 걸 테군.”
언급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에 에드가가 잠시 흠칫했다.
“마탑에 의뢰까지 해서 그런 식물을 만들어 낸 건, 날 견제하기 위함이었나?”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어진 로이드의 말에 에드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아이가 섬에서 키워 낸 식물입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나, 전과 같은 폭풍우를 피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아르제오의 존재도, 리히덴의 일도 밝힐 수 없으니 공작이 유연하게 둘러댔다. 그 얘기를 들은 로이드는 찰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군.”
제가 그녀를 그곳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녀는 그런 일을 겪어야 했다.
폭풍우에 휩쓸려 낯선 땅까지 흘러 내려가다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떠올릴수록, 다시 기회를 얻는 건 그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한심해질 뿐.
“공작은 이런 상황이 되고서도 전쟁을 반대하는군.”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내고자, 로이드가 화제를 돌렸다.
“군대를 이끌고 숲에 들어섰다는 것이었으면 저도 달랐을 겁니다.”
“하긴, 홀로 그 숲에 발을 들이는 건 자살행위지. 아직 그 침입자는 찾지 못했지?”
“…숲의 모든 입구를 기사들과 병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 이렇다 할 보고는 없었습니다.”
에드가는 속으로 침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설령 그냥 정신 나간 인간이 숲에 들어간 거래도, 이걸로 자네 말대로 리히덴에서 원하는 걸 얻어 낼 순 있겠군.”
“전쟁이 아닌 방법도 검토하시겠다는 뜻입니까?”
긍정적인 로이드의 반응에 에드가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로이드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임시방편으로 식물을 가져왔다는 건, 레이라의 뜻이었다는 게지.”
“……”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 건 그녀일 테고.”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포레스티아령은 위험한 국경에 자리한 만큼, 절대적 평화를 추구했다. 그건 굳이 ‘레이라’를 꼽지 않아도 모두의 생각이었다.
“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얻는 이득이 더 크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군요.”
“게다가 레이라의 뜻이라고 한다면 더욱.”
이어진 로이드의 말에 공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에겐 잘못한 것이 많으니까.”
갑자기 이제 와서 이리도 레이라를 신경 쓰는 이유가 뭘까. 다시 포레스티아의 지지가 필요할 일이라도 생긴 건가.
희미하게 미간을 좁힌 공작이 고민에 빠졌다. 그런 공작을 가만히 응시하던 로이드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못 미덥겠지.”
중얼거리는 듯했던 황제의 말에, 불충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공작은 입을 뗄 수 없었다.
이미 레이라를 상처입혔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아버지로서는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에드가의 태도에 로이드는 픽 웃어 버렸다.
“도착했군.”
그러는 새에 마차는 공작령에 도착했다.
황제가 다시 레이라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에 정신이 팔려, 아르제오의 존재를 그제야 다시 떠올렸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공작은 예를 갖추며 로이드에게 말했다.
“폐하,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공작은 혹여나 근처에 아르제오와 레이라가 있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서둘러 황제를 응접실로 모시고 아르제오를 숨길 생각이었는데, 로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공작과 나눌 얘기는 끝났으니, 잠시 레이라를 만나야겠다.”
“예…?”
로이드의 돌발 발언에 공작은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을 맛보았다.
“하지만….”
“잠시. 아주 잠시면 된다. 레이라가 돌아가라고 하면 가지. 그럼.”
그렇게 말한 로이드는 공작이 말릴 새도 없이 걸음을 뗐다.
그러고는 근처의 하녀 하나를 붙잡고 레이라의 행방을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황제를 보고는 깊이 허리를 숙이며 안내했다.
‘아, 안 돼…!’
눈에 띄게 동공이 요동치는 제 주인은 발견하지 못한 채.
한편, 레이라는 아르제오와 둘이 방 안에서 여유로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숲에 가려는 그녀를 막아선 헤레이스는, 아버지가 황제의 허락을 받아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 얘기에 아르제오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붙잡았다.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았으니, 그녀와 차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다고. 그리하여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여유로운 분위기에 레이라는 어쩐지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레이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돌아오셨나 보네요. 가요.”
“그래.”
레이라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며 아르제오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방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