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갑작스럽게 나타난 알 수 없는 인물에 당황스러웠지만, 로라는 일단 레이라의 말대로 했다.
그녀의 방으로 모인 공작과 헤레이스는 그저 입을 떡 벌릴 뿐이었다.
“레이라? 이, 이게 무슨….”
정원에서 너무 오랜 시간 있는 것 외에는 말 잘 듣는 딸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낯선 남자를 소개하겠다니, 에드가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놀란 것은 헤레이스도 같았지만, 공작보다는 침착했다.
시타델 섬에, 은인이 찾아왔었던 사실을 알고 있으니 조금 덜했다. 지금 그녀가 소개하려는 이의 정체를 조금 짐작하기도 했고.
물론 공작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해서 더욱 당황한 것이었다.
로라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아르제오를 노려보고는 방을 나서자, 네 사람만 레이라의 방에 남았다.
레이라는 그 자리에 부르지 않은 어머니에게 조금 미안함을 느꼈지만, 전쟁 얘기가 오가는 걸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개할게요, 이분이 제 은인이에요.”
“은인?”
놀라는 공작과 달리, 헤레이스는 역시 그런 거라고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다가 곧 고개를 숙였다.
“이 아이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정말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인사를 듣던 아르제오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아르제오 반 리히덴이라고 합니다.”
공작은 예를 갖추며 감사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들고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리히덴의 성을 쓰시는군요. 혹, 요전 밤에 국경에 숲에 나타난 침입자가 은인이십니까?”
리히덴의 성을 쓴다는 의미는 리히덴 제국의 황족이라는 뜻이었다.
“예, 접니다.”
덤덤한 아르제오의 대답에 헤레이스는 이마를 짚었다.
레이라의 은인이었지만, 그가 나타난 영향으로 발루아 제국의 황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태도는 바뀌었지만, 이쪽은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자, 아르제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상황이 좋지 않은 거, 잘 압니다.”
“…그럼에도 움직일 수밖에 없던 일이라는 거군요.”
그의 의도를 짐작한 헤레이스가 뒷말을 잇자,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히덴에서는, 황태자 자리를 걸고 포레스티아령을 손에 넣으려 합니다. 어느 쪽이든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요.”
“그걸 알리기 위해서 혼자 국경의 숲에 들어간 겁니까…?”
공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황위 다툼은 리히덴의 내부 사정이었고, 전쟁의 위협을 이쪽에 알리는 건 매국 행위가 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홀로 들어선 그 숲은, 혼자 무작정 나아가기에는 너무도 위험한 곳이었다.
공작의 질문에 내포된 것들을 잘 알고 있는 아르제오는 슬쩍 시선을 레이라에게 돌렸다.
“레이라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미 숲에 있었습니다.”
아르제오의 대답에 공작과 헤레이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그 말은, 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의미를 알 만큼 적나라했다.
레이라가 슬쩍 뺨을 붉히니 헤레이스가 픽 웃어 버렸다. 에드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지만.
황제와 만남을 이어가고 황태자비가 되었을 때와는 레이라의 표정이 달랐다. 헤레이스는 그 부분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제가 온 탓에 이쪽도 상황이 좋지는 않겠죠.”
이어 덧붙인 아르제오의 말에 헤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야말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죠. 리히덴에서 먼저 국경에 접근했으니, 명분은 이쪽에 있으니까요.”
굳은 표정으로 고민에 빠지는 그를 보며 헤레이스가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래도 누님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오신 건 감사드립니다.”
“대신 나중에 망명하면 받아 주시죠.”
“예…?”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헤레이스와 공작을 보며 레이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네요. 리히덴 제국의 황위를 잇는 일에 대한 정보를 적국에 넘겼으니, 나중에 여기로 망명해야겠어요.”
별일 아니라는 듯 얘기하는 두 사람 때문에 헤레이스와 공작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뒤 금세 대화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영지민들의 대피는 그대로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레이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루아의 군대가 숲 너머에서 리히덴의 군대를 맞이한다고 해도, 위험부담이 컸다.
“레이라, 넌 섬으로 피해 있는 것이 어떠냐? 이분도 네가 위험할까 봐 여기까지 오셨으니.”
헤레이스도 공작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이라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꼭 전쟁만이 답일까.’
리히덴 제국에서 황위를 두고 공작령을 탐내니 아마도 그럴 터였다.
그쪽은 공작령만을 탐내고 있을 테지만, 로이드는 명분이 생긴다면 리히덴 제국을 삼킬 생각일지도 몰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걸 목적으로 공작가를 압박했었으니까.
하지만 물리적으로 두 나라 사이를 막아 버린다면?
마침 아르제오에게 아주 좋은 물건을 받기도 했다.
“제오. 그거, 쓰면 되지 않을까요?”
고민하던 레이라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거라니?”
무언가 방법이 있는 걸까, 싶어서 공작이 조급하게 물었다.
“제오가 마탑에 의뢰에서 어떤 인공 식물을 만들었거든요. 제가 키울 수 있는 것도 확인했고요. 그걸로 리히덴에서 숲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물리적으로 막아 버리면 어떨까요?”
그녀의 제안에 아르제오가 덧붙여 공작과 헤레이스에게 그게 어떤 식물인지 설명했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공작은 미세하게 미간을 좁히며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을 거다. 게다가 그렇게 완전히 봉쇄해 버리면 두 제국을 오가는 상인들에게도 피해가 갈 테고.”
“시간을 벌 수는 있겠죠. 하지만 누님, 시간을 번다고 한들 리히덴의 후계 다툼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폐하께서도 전쟁을 그만두실 이유가 없고요.”
공작과 헤레이스의 얘기를 들은 레이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시간을 벌면, 폐하를 설득할 기회가 있어요. 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가능성이 희박해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단호한 레이라의 태도에 공작이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가만히 얘기를 듣던 아르제오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일단 유진이 가지러 가기는 했지만, 제때 올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해.”
시간을 벌겠다는 그녀의 뜻에 따르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어? 하지만 제오가 전에 보내 준 씨앗이 있잖아요. 기를 수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던.”
“그랬지.”
“시타델 섬에서 키워 봤어요. 꽤 괜찮은 식물 같아서 그 가지를 꺾어 씨앗으로 만들어 왔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는 씨앗이 잔뜩 든 주머니를 찾아 건넸다.
“이게 다 그 씨앗인 거야?”
“네, 어디든 심으면 같은 나무가 자랄 거예요.”
놀란 얼굴로 씨앗 주머니를 바라보던 아르제오가 픽 웃어버렸다.
그저 대단하다고 느꼈다. 마탑에서 시간과 공을 들여서 연구 끝에 만들어 낸 씨앗을, 이렇게 금세 만들어 버리다니.
게다가 마탑에서 만든 씨앗을 키울 수 있는 건, 아마도 레이라뿐이었다.
“하지만 누님, 리히덴에서 공작령을 탐내는 이상 폐하께서도 물러서지 않으실 겁니다.”
국경을 수호하는 이 영지를 통째로 내어 준다는 건, 결국 공작가도 리히덴 제국의 손에 넘어간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시간을 번다면 방법은 생길 거야.”
줄곧 고민에 잠겨 있던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국경의 수호자라 불리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그러고선 에드가는 레이라에게 뜻대로 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폐하를 먼저 뵙고 오지. 레이라, 그 나무를 심는 건 다 네가 해야 하는 일이다.”
“알아요.”
“제가 함께 있겠습니다.”
헤레이스보다도 먼저 나선 아르제오의 말에, 공작은 조금 난처한 듯이 웃고는 자리를 떴다.
“누님.”
공작을 따라나서려던 헤레이스는 무언가 떠올린 듯 홱 돌아섰다.
“그 나무들을 다 심고 나면, 섬으로 가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거긴 안전할 테니까요.”
“하지만 이스….”
“그리고, 은인께는 따로 방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누님과의 회포는 내일 푸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야밤에 제 누님의 방에 외간 남자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 의미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표정과 말투에 아르제오가 픽 웃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방이 준비되는 대로 가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헤레이스마저 레이라의 방을 나서고 나니 아르제오가 빙글 몸을 돌렸다.
“어쩌면 그냥 전쟁을 조금 늦추는 것밖에 못 할지도 몰라.”
“그래도 해야죠.”
“두 형님께선 고집을 꺾지 않으실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르제오의 표정은 괴로워 보였다. 황위, 그게 뭐라고 친형제끼리 목숨을 걸고 싸운단 말인가.
그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로 보였다. 아르제오는 황위에 뜻이 없었으니까.
“올바른 고집이라면, 꺾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올바른 고집이라….”
“진정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사람이 올바른 고집을 부리는 거 아니겠어요?”
레이라의 말에 아르제오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런 거라면 훨씬 간단했다.
그가 보기에, 나라와 백성을 더 위하는 건 명백히 루이스였다. 로렌스는 귀족들만이 선호하는 황제였다.
아르제오는 둘 중 누가 더 좋은 정치를 펼칠지 알 수 없었다. 개입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건 레이라를 만나기 전의 생각이었다.
귀족만이 리히덴의 백성인 것도, 귀족이 아닌 이들만 백성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그 부분이 고집스러워서, 조율에 능할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두 사람 싸움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건 같지만.’
아르제오의 선택으로 후계가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얕은 한숨을 내쉬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가 살며시 손을 뻗었다.
그녀의 가는 손이 팔에 닿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일단, 이거 심으러 갈까요?”
씨앗 주머니를 흔들어 보이며 말하는 모습이 퍽 장난스러웠다. 작게 웃은 아르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레이라는 마음이 급하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오는 좀 더 쉬어야겠어요. 나무는 일단 키우지 않고, 심기만 할 테니까 혼자 다녀올게요.”
따뜻한 물에 몸도 담그고 좀 쉬고 있으라며 레이라는 먼저 걸음을 뗐다. 하지만 아르제오가 곧장 그녀의 하얀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안 돼.”
“왜요? 위험할까 봐 걱정하는 거면, 공작가 기사와 동행할게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레이라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당겼다.
그대로 아르제오의 품에 폭 안긴 레이라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제오?”
“조금만 더. 오늘은 좀 지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