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도대체 누굴 찾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기사들은 순순히 레이라의 말에 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라면, 숲에서 위험하지는 않을 테니.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시면, 곧장 이리로 나오셔야 합니다.”
“아니, 이걸 가져가세요. 기사들끼리 쓰는 신호탄입니다.”
손에 신호탄을 쥐여 주는 기사를 보며 레이라가 픽 웃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황궁 병사들에게 들키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가의 기사들이 다 처리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반역이 될 텐데요?”
“저희는 포레스티아 공작가에 충성을 맹세했지, 제국에 맹세하지 않았습니다.”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기사를 보며, 다른 기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가씨, 이놈은 그냥 헛소리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고마워요.”
헛소리가 아니라 진심이라며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이라는 숲으로 들어섰다.
겨울의 해는 짧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은 검지만, 레이라에게는 따스한 어둠이었다.
두려움은 없었지만, 걱정으로 가득했다.
이 숲이 친절한 건 포레스티아의 이름을 가진 이들에게만이다. 다른 침입자라면 길을 잃고 헤맬 테고.
‘그저 길을 헤맬 뿐이라면 큰 문제도 없겠지만.’
아마도 그냥 길을 헤매는 건 아닐 것이다. 보통은 끔찍한 환상을 보다가 이성을 놓아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전날 밤에 숲에 들어왔다고 했으니 벌써 하루가 지났다.
만일 정말 아르제오라면, 서둘러 찾아야 했다.
국경의 숲은 방대했다.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고 혼자 찾는다는 건, 모래사장에서 모래만 한 크기의 유리구슬을 찾는 것만큼 어려웠다.
하지만 레이라는 달랐다.
방대한 숲이지만 어느 길이 어느 나라로 이어지는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꽃을 좋아하고 식물을 좋아하는 레이라는 어릴 적부터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 숲에서 미아를 찾아본 적은 없지만, 리히덴 제국에서 넘어오는 길은 한정되어 있었다.
급히 걸음을 뗀 레이라는 허리춤에 찬 주머니에서 꽃씨를 꺼냈다. 그리고 눈에 띄는 몇 곳에 꽃을 피웠다.
그렇게 꽃을 피우며 나서는 건 혹시 엇갈릴 가능성을 위해서였다. 지금 자신이 향하는 방향에 혹시 없더라도, 이 꽃을 발견하면 자신에게 올 수 있도록.
* * *
몇 번이나 눈앞에서 레이라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까.
현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러한 장면이 수십 번 반복되면서, 아르제오는 그게 마치 이제 곧 일어날 일처럼 느껴졌다.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그는 끔찍한 광경을 강제로 보고 있었다.
방향을 틀어도 그 앞에 제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고, 레이라를 죽이고, 공작령을 불태웠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나마 레이라가 다시 발루아의 황제에게 돌아가는 환상은 참을 수 있었다.
마음은 아프지만, 어쨌든 그녀가 무사한 것이니. 제 형제에게 죽임을 당해 쓰러지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러니 이 숲에서는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당연했다. 혼자는 더더욱 위험했다.
‘그래도 가야 해.’
리히덴 제국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레이라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아르제오는 그마저도 희미해져 갔다.
잔인한 광경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숲에 들어온 이유도 희미해졌다.
그저 이 잔인한 환상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만을 바랐다. 차라리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을 만큼.
“…레이라.”
겨우 정신을 붙잡을 수 있던 건, 홀린 듯이 이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희미하게, 온통 검은 나무들 사이로 새하얀 꽃 한 송이가 보였다.
검을 휘두르며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형제들 사이를 지나친 아르제오는 멍하니 그 꽃을 향해 걸었다.
이것도 환상인가,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심코 시선을 돌리니 같은 꽃이 더 있었다.
아르제오는 마치 길 안내를 하듯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피운 하얀 꽃을 따라서 걸었다.
꽃을 보면 레이라가 떠올랐다. 그러니 이 꽃을 따라 걸으면, 그 끝에 그녀가 있을 것만 같았다.
여전히 잔인한 광경이 계속해서 따라붙었지만, 꽃을 발견한 뒤로 그는 조금 정신이 들었다.
그대로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정말로 새하얀 꽃을 쫓은 그 끝에는 레이라가 있었다.
두툼한 겉옷을 두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레이라.”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녀를 부를 생각으로 입 밖에 냈을지 몰라도, 몸도 마음도 지쳐서 목이 다 쉬어 있었다.
하지만 밤의 숲은 고요하기만 해서, 그 작은 중얼거림에도 레이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설마, 설마 했었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레이라는 단숨에 아르제오에게 달려왔다.
“정말 미쳤어요? 설마 했지만, 이 숲에 혼자 들어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여기 있네.”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낮게 웃는 아르제오를 레이라가 흘겨보았다.
그는 살아 움직이는 레이라가 눈앞에 나타나고 나서야 끔찍한 광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제가 두르고 있던 숄을 벗어 아르제오에게 둘렀다.
“안 돼, 추워.”
“그 얼굴로 말하면 제가 듣겠어요?”
레이라의 잔소리가 달콤한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내지르는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해서.
그래도 아르제오는 겉옷을 다시 레이라에게 둘러 주며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이게 더 따뜻해.”
“이거 봐, 몸 차잖아요.”
찬 기운이 훅 끼쳐와서 레이라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자.”
팔 안에 그녀의 감각이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하루를 꼬박 수십, 수백 번씩 너무 끔찍한 장면 속에 있었다.
레이라는 숲에서 헤매는 이들이 무엇을 보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걱정했던 거지만.
그녀가 가만히 아르제오의 등을 토닥이자, 그는 점차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갑자기 숲엔 왜 들어온 거예요? 무슨 일 있어요?”
아르제오가 어느 정도 진정된 듯 보이자 레이라가 물었다. 그는 그제야 제 목적을 떠올리고는 품에서 레이라를 떼어 놓았다.
“상황이 좋지 않아. 정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라.”
“……”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면 그는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일 테니까.
나라와 형제를 등지고,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국경의 숲에 홀로 들어섰다.
오로지, 전쟁이라는 위험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걸 생각하니 레이라는 눈가가 시큰거렸다.
“…제오, 그걸 지금 나한테 말하면….”
눈썹을 늘어뜨린 레이라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한차례 숨을 골랐다. 말하는 본인도 버거운 듯이.
“다시 리히덴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잖아요.”
“나 어차피 공작령에서 받아 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르제오가 도리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니 더 마음이 아팠다.
“일단,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요.”
아르제오의 차가운 손을 꼭 붙든 레이라는 그를 이끌고 숲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은 수월했다. 손에 전해지는 레이라의 온기도 있었고, 길가에 드문드문 새하얀 꽃도 있었다.
전날 밤 들어섰던 숲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숲의 입구에 다다르자, 포레스티아의 기사 둘이 초조하게 레이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옆에 그 사람은 누굽니까?”
기사들이 조금 불안한 기색으로 아르제오를 훑었다. 고작 하루였는데도, 눈 밑이 거뭇하며 얼굴에 피로가 가득 쌓였다.
“설마, 리히덴에서 홀로 숲에 들어왔다던….”
기사들이 말끝을 흐리자 레이라가 싱긋 웃었다.
“황궁 병사들에겐 비밀로 해 줘요.”
“아가씨 말씀이라면 따르겠습니다만, 이 사람은 도대체….”
아르제오를 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의아함과 감탄이 섞여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몸소 찾으러 간 것인가에 대한 의아함과 혼자, 그것도 밤에 국경의 숲에 들어서는 정신 나간 행동에 대한 감탄이었다.
“제 은인이에요. 병사들 눈에 띄지 않게 저택으로 데려가고 싶은데, 도와줄래요?”
기사들은 은인이라는 레이라의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한 명이 재빨리 다른 기사의 겉옷을 벗겼다.
“야!”
“이걸 입으시면, 의심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레이라는 작게 웃었다.
“고마워요.”
반항하던 기사는 그녀의 미소를 보고는 순순히 기사복을 내어 주었다.
“돌아가는 대로 기사복은 사람을 시켜서 다시 돌려줄게요.”
“예, 아가씨.”
번듯하게 공작가의 기사복으로 갈아입은 아르제오는 서둘러 레이라와 함께 공작저로 향했다.
중간에 황궁 병사들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저택을 나설 때 레이라의 기분을 상하게 했었으니 조용히 지나쳤다.
“아직도 감시받고 있는 거야?”
황궁 병사들을 힐끔거리며 아르제오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이 여기 온 건, 간밤에 국경의 숲에 침입자가 있다고 해서예요.”
“…나 때문이군.”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지원군이라고 하니까.”
시야에서 병사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아르제오는 슬쩍 다시 레이라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며 씩 웃었다.
“뭐 해요?”
“뭐가.”
그녀가 슬쩍 흘겨보자 아르제오는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돌렸다.
황궁의 병사들이 이곳에 있다는 건, 황제가 움직였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이미 만났겠지.’
다시 황제를 만난 레이라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런 잡생각이 들어서 아르제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이미 레이라를 버렸다. 다시 관심을 가질 리도 없을 터였다.
다시는 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공작저로 들어서기 전 그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손을 놓았다.
언뜻 보면 공작가의 기사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이니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았다.
무사히 레이라의 방까지 온 뒤, 그녀는 로라를 찾았다.
곧 나타난 로라는 의아한 얼굴로 레이라에게 물었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그녀는 문 쪽을 한차례 힐끔거리고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벌의 기사복을 숲에서 근무 중인 기사에게 전해 줄래?”
“예? 갑자기 여벌의 기사복은 왜요? 그나저나, 아가씨 숲에 다녀오셨어요? 이 시간에 위험하게 거긴 왜….”
로라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떡 벌렸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곳에, 공작가의 기사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으니.
“기사님? 아가씨 방에서 뭐 하세요?”
로라가 황당한 얼굴로 물으니 레이라가 배시시 웃었다.
“여벌의 옷을 전하고 나면 이 사람이 입을 옷도 준비해 줄래?”
“예?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군데요?”
“설명은 나중에. 이스랑 아버님도 조용히 불러 주고.”
“아니, 아가씨!”
설명을 바라는 로라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레이라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었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고 전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