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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52)화 (52/122)

<52화>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그 방법은 아니길 바랐는지, 유진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 넌 마탑에 들러서 내가 부탁한 물건을 회수해서 와. 난 먼저 갈 테니까.”

“지금 바로 출발하시려고요?”

“지체할 시간 없어. 바로 간다.”

아르제오의 단호한 대답에 유진은 이마를 짚었다.

“한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비장한 유진의 표정에 아르제오는 걸음을 멈췄다.

“뭔데.”

“자유를 얻으셨을 때 저 그냥 버리고 가시면 안 됩니다?”

피가 식어 가는 긴장감 속에 놓여 있던 아르제오는 그 질문에 맥이 탁 풀려 버렸다.

“헛소리 말고 빨리 움직여.”

픽 웃으며 하는 말에 유진도 이번에는 재빨리 움직였다.

“예, 전하.”

그날 밤, 아르제오는 유진과 둘이서 아무도 모르게 황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유진은 아티펙트를 이용해 마탑으로 향했고, 아르제오는 말을 몰고 홀로 국경으로 향했다.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며 국경의 숲에 다다른 아르제오는 말에서 내렸다.

이 방대한 숲은, 짐승이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다. 도리어 위험해질 테니까.

“후….”

숲 근처에 말을 메어 놓은 아르제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서 이 숲에 들어서는 건, 어쩌면 자살행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루이스는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했지만, 그렇다면 로렌스가 먼저 움직일지도 몰랐다.

설령 전쟁을 피할 수는 없게 되더라도, 레이라는 먼저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했다.

포레스티아령 전체를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그것만은 하겠다는 다짐으로, 그는 숲에 발을 들였다.

국경을 뒤덮은 거대한 숲. 밤에는 한층 더 검게만 보이는 숲이었다.

포레스티아가 국경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숲이다.

포레스티아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숲에 들어서면, 길을 잃고 헤맬 테니까.

하지만 아르제오는 주먹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앞에 펼쳐진 풍경과 뒤를 돌아본 풍경이 완전히 같아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뿌연 안개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레이라.”

안개가 끼면서부터는 그 이름을 가만히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로지 그 이름 하나만 보고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조금 더 지나자, 온통 검었던 숲의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한쪽에선 피가 튀고 비명이 들려왔다. 그 소음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아르제오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로렌스가 높이 검을 치켜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힘없이 무너진 루이스의 모습도.

‘이런 걸 보여 주니까 헤매다 쓰러지는 거군.’

과연 제정신으로 버티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로렌스가 루이스를 찌르고, 루이스가 로렌스를 찌르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아르제오가 걸음을 멈추지 않자,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눈앞에 피를 흘리며 풀썩 쓰러진 레이라의 모습에 아르제오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쓰러진 그녀의 뒤로는 로렌스와 루이스가 보였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아르제오는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빨리 이 숲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방금 본 끔찍한 장면은 사실이 될 수도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막아야 했다.

“…이 망할 숲.”

* * *

다음 날.

공작가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에 정신이 없었다.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로이드는 응접실에서 레이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히 간단한 준비를 마친 레이라가 응접실에 도착했을 땐, 헤레이스와 공작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기별도 없이 찾아왔으니.”

덤덤한 표정의 로이드는 앉으라며 손짓했다. 그녀가 제 가족 옆에 조심스럽게 앉자, 황제가 얘기를 꺼냈다.

헤레이스와 공작, 에드가는 왜 레이라까지 불러낸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간밤에 국경의 숲에 누군가 들어갔다더군.”

“숲에 말입니까? 그런 보고는 받지 못했습니다만….”

에드가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으니 로이드가 태연하게 답했다.

“리히덴 제국 쪽에서 숨어들었다.”

이어진 황제의 말에 에드가의 표정이 굳어졌다. 리히덴의 접촉이라니.

전쟁을 일으키려는 군대가 온 거라면, 이쪽에서 먼저 알아챘을 터였다.

“인원까지 파악되었습니까?”

“한 명.”

“예?”

공작은 물론, 헤레이스까지 제 귀를 의심했다.

“걱정할 것도 없겠지, 그 숲에 혼자 들어갔으니.”

지난밤에 들어갔고, 오후가 되도록 나오지 못했으니 이미 길을 잃은 것일 터.

가만히 얘기를 듣던 레이라는 불안한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라고 아무리 스스로 다독여봐도 불안감은 커지기만 했다.

고작 씨앗을 전하고 얼굴을 보겠다고 겨울 바다에 뛰어들었던 사람이다.

국경의 숲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홀로 들어서는 일에 주저가 없을 사람. 그녀는 그런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리히덴에서 먼저 움직였으니, 명분은 이쪽에 있다.”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에드가가 참담한 얼굴을 했다.

전쟁 얘기에 그다지 표정이 좋지 않은 레이라를 슬쩍 살핀 로이드가 덧붙였다.

“원한다면 안내를 받아 숲의 저편에서 그들을 맞이해도 좋다.”

이어진 황제의 말에 에드가는 찰나 눈을 크게 떴다. 재빨리 놀라움은 감춰 냈지만, 그렇다고 쉬이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지금까지는 전쟁을 빌미로 공작가를 삼킬 요량으로 움직였던 황제였다. 그런데 공작령의 피해를 줄일 방법을 먼저 제시하다니.

“아무리 숲 너머에서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영지민이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레이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니 지금부터 피난시키면 된다. 지금부터 그들을 피난시키고, 공작은 이 전쟁을 어찌할지 알아서 결정하도록.”

그 말은 흡사 협박처럼 들렸다.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큰 피해를 보는 곳은 이곳 포레스티아령이니 알아서 잘하라는.

실제로는 레이라를 신경 쓴 로이드의 배려였지만 말이다.

“귀족 회의에는 나서지 않아도 된다. 공작은 지금 영지를 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얼떨떨한 얼굴이긴 했지만, 공작의 대답을 들은 로이드는 곧 몸을 일으켰다.

“영지민 피난에 시간이 필요할 테니 며칠 시간을 주겠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지원군으로 병사들을 두고 가지.”

“예? 아…. 예.”

“황궁의 급한 일을 마치는 대로 다시 오겠다.”

갑작스러운 리히덴의 움직임으로, 로이드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레이라를 오래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워 슬쩍 그녀를 힐끔거렸다.

애써 한숨을 삼키는 표정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다시 기회를 달라고 말한 이후로는 찾아오지 않았으니, 레이라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물론, 로이드에게 말이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로이드는 힘겹게 레이라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시간을 너무 지체할 수 없던 황제는 곧 다시 황궁으로 돌아갔다.

근래 들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공간 이동 아티펙트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님, 어찌하실 겁니까?”

황제를 배웅하고 돌아온 헤레이스가 굳은 얼굴로 에드가에게 물었다.

“일단 영지민 피난을 우선시해야겠구나.”

정말 전쟁이 터지든 아니든, 영지민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을 모으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빠르게 움직여야겠다며 헤레이스가 먼저 자리를 떴다.

에드가는 불안한 얼굴의 레이라를 보고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을 테니.”

“네, 아버님.”

레이라는 공작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자신이 왜 불안한지 아무도 모를 테니까.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였지만, 방으로 돌아오고 나니 불안감이 더 커졌다.

‘어쩌지.’

방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국경의 숲에 홀로 들어서는 미친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게 아르제오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겨울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이었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강하게 아르제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

이마를 짚으며 긴 한숨을 내쉰 레이라는 곧 걸음을 뗐다.

‘확인해 보면 돼.’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레이라는 조금 조급한 걸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공녀님.”

마차도 없이 홀로 나서는 그녀를 발견한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레이라는 화들짝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추며 병사를 돌아봤다.

“왜 그러시죠?”

“어두워질 텐데 어딜 가십니까?”

“볼일이 좀 있어서요.”

“호위도 없이 말입니까?”

덤덤한 레이라의 대답에도 병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태도는 도리어 레이라가 유리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지금, 절 감시 중인 건가요?”

병사는 그런 질문을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 아닙니다.”

“폐하께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당신들을 이곳에 둔다고 하셨는데…. 이제 보니 공작가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공녀님. 죄송합니다.”

병사들은 전부 황명을 받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공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절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그걸 어기는 이가 자신이 될까 봐 병사는 재빨리 물러났다.

덕분에 서늘한 표정의 레이라는 어렵지 않게 저택을 나설 수 있었다.

공작저의 뒤쪽부터 시작되는 국경의 숲으로 들어가는 길은 전부 공작가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황궁 병사들이야 그녀의 행선지를 몰라야 했지만, 공작가 기사들에게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두툼한 겉옷을 걸친 레이라가 다가오니 기사들이 의아한 얼굴로 맞이했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저, 지금부터 숲에 좀 들어갈게요.”

“예? 지금요?”

기사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레이라가 숲에 혼자 들어서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포레스티아의 이름을 가진 이는 숲에서 안전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평소의 숲이 아니었다.

“아가씨, 하지만 지금은 숲에 리히덴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숲을 둘러보기만 하실 거라면, 나중으로 미루시는 것이 어떨까요?”

눈썹을 늘어뜨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레이라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 사람 찾으러 가는 거예요.”

“예에?”

그녀의 대답에 기사들은 더욱 입을 떡 벌렸다.

“아가씨, 그게 무슨…!”

“황궁 병사들이 알기라도 하면….”

레이라는 싱긋 웃으며 검지를 곧게 뻗어 제 입술에 댔다.

“당연히 황궁 병사들한테는 비밀이죠. 몰래 나왔어요.”

“아무리 그래도…. 공자님이라도 함께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스는 지금 영지민 피난 일로 바빠요.”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레이라는 따라나서려는 기사 하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괜찮아요, 혼자 갈게요. 아무래도 숲에 들어온 게, 제가 꼭 찾아야 하는 사람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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