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럼 앞으로는 내게도 시간을 내줄 수 있겠지?”
엘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엘라의 예상과는 달리 레이라는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네요.”
“뭐?”
엘라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이번은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될까 싶어 참석한 것뿐입니다. 앞으로는 너무 바빠서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
단호한 말에 엘라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그 얼굴에는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
“혹시, 나를 보면 폐하가 떠올라 그런 것인가? 불편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만…. 이제 지난 일인데 너무 그러지 말게.”
눈썹을 늘어뜨리며 하는 명백히 비꼬는 말에, 헤레이스가 미간을 좁혔다. 오히려 레이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는데 말이다.
“어차피 앞으로 폐하를 가까이서 뵐 일도 없을 것이 아닌가? 언제까지고 폐하를 마음에 담아 두는 건 그쪽 몫이네만.”
“황후 폐하…!”
보다 못한 헤레이스가 나서려는 것을 레이라가 말렸다.
그녀의 작은 손짓에 헤레이스는 분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 대신 레이라가 차분히 대답했다.
“폐하를 가까이서 뵐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제가 불편하다고 여길 일이 아니에요.”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한 듯 엘라가 입매를 비틀었다.
“왜, 벌써 그 마음에 다른 사람을 두기라도 했는가?”
주변의 술렁임이 들려왔다. 하지만 레이라는 엘라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게 왜 궁금하신가요?”
“물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도 품었는가?”
줄곧 평온하던 레이라의 표정에 실금이 갔다.
제 마음에 담은 사람. 저들에게 절대로, 적어도 지금은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사람임은 분명했다.
희미하게 꿈틀거린 눈썹을 알아챈 엘라가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머, 정말 말할 수 없는 사람을 마음에 두기라도 했나 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들으란 듯이 큰 목소리였다.
레이라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주변 사람들은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침묵은 엘라의 말을 긍정하는 것만 같아서.
헤레이스는 가만히 있기가 버거운 듯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전 더 이상 폐하의 여인이 아니니, 그 누구를 마음에 담아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럼, 그게 누구인지도 말할 수 있나?”
이어진 엘라의 물음에 이번엔 레이라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황후께서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많으신가 보네요. 아니면, 제게 관심이 많으신 건가요?”
아무렇지 않게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그녀를 보며 엘라가 눈을 번뜩였다.
“하! 지금 설마, 폐하께서 날 선택하신 걸 두고 내게 그리 함부로 말하는 건가? 그대가 쫓겨난 건, 독살을 시도했기 때문이야!”
“그건 이미 무혐의로 결론이 났습니다.”
레이라는 시종일관 차분하기만 했고, 엘라는 그녀의 그런 태도가 더욱 속을 뒤집었다.
황후의 분노가 극에 달하고, 주변에 긴장감이 맴돌던 그때. 연회장 안으로 다급히 누군가가 들어섰다.
백작가의 사람인지, 하르센 백작에게 다급히 다가선 그 사람은 백작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사람은 다시 연회장을 나섰다. 그러고는 곧, 황궁 기사 두 명과 함께 황후의 시녀장이 나타났다.
“황후 폐하, 모시러 왔습니다.”
엘라는 그들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기사들은 당연히 황후를 호위하러 온 것이 터인데, 어쩐지 분위기가 묘했다. 시녀장의 눈빛은 서늘했고, 기사들의 태도도 딱딱하기만 했다.
“이만 황궁으로 돌아가시지요.”
“……”
주먹을 꾹 움켜쥔 채로 부들부들 떨던 엘라가 홱 고개를 돌렸다.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레이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녀장과 호위를 자신이 부른 것도 아닌데 마치 그 일까지 원망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레이라는 도리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원망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조심히 돌아가세요, 황후 폐하.”
분을 못 이겨 바르르 떨던 엘라는 시녀장의 재촉에 서둘러 연회장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고 나니, 주변의 수군거림이 한층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요.”
“그러게요. 홀든 후작가가 날뛰는 것도 곧 끝나겠네요.”
주변을 스윽 훑은 레이라가 헤레이스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딱히 큰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조짐이 보이기는 했죠. 그것도 엄청나게 대놓고.”
“조짐?”
“예. 폐하께서 조만간 홀든 후작가를 버릴 거라는 조짐이요.”
레이라가 약초에만 몰두할 동안 황궁에서는 엘라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렇게 사교계에 홀든 후작가가 버려질 거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헤레이스 말대로, 대놓고 그럴 낌새를 보인 거라면 엘라마저 버려질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여기까지 달려와 나를 견제한 건가.’
본래에도 엘라는 그녀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오늘의 태도는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다.
‘그 마음을 온전히 얻을…. 기회를 얻고자 한다.’
가만히 시선을 떨어트린 레이라는 마지막으로 로이드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설마 이제 와서, 제게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일 정말 그 기회를 얻기 위해서 엘라를 치워 버린다고 해도, 딱히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건 엘라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부분이니.
“누님?”
사념에 빠져 있던 레이라는 헤레이스의 부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어.”
싱긋 웃으며 헤레이스를 안심시킨 레이라는 하르센 백작 부인에게 향하며 작게 속삭였다.
“오늘 돌아가기 전에 어떤 꽃을 추천하는지 물어봐야겠다.”
“예, 그러세요.”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는 헤레이스를 보며 레이라는 즐거운 듯 웃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등장에 모두가 당황스러워했지만, 이내 본래의 평화를 되찾았다.
* * *
콰앙!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나타난 아르제오를 보며 루이스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웬일로 거친 등장이네?”
“형님!”
험악하게 굳어진 아르제오의 표정을 보면서도 루이스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드는 그를 보며 루이스가 검지를 뻗어 입술에 댔다.
“목소리는 낮추는 게 좋을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겁니까, 정말 발루아 제국과 전쟁이라도 치르실 참이세요?”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 하지만 길게 봤을 때, 리히덴에 그 영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야.”
아르제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포레스티아령은 두 제국이 맞닿은 국경에 있어서, 이런 일을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곳을 지키고 싶었다. 그곳엔 지금 레이라가 있으니까.
심각한 얼굴의 아르제오를 보며 루이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엔 꼭 날 지키기 위해서 이러는 것 같지가 않네. 그곳에 뭘 숨겨 두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
“걱정하지 않아도, 전쟁은 최대한 피할 거야. 난 누군가를 희생시키며 그 자리를 얻고 싶은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얘기를 꺼내셨으니, 형님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움직이시겠죠.”
“그건 부정할 수가 없네.”
아르제오는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아보고 오라고 하셨겠지? 그래서 온 걸 테고.”
그리고 태도로 보아선, 포레스티아령을 언급했다는 걸 아르제오는 이제야 안 참인 것 같았다.
“난 정식으로 포레스티아 공작과 타협할 방법을 찾을 거야. 이 말을 전하면 나와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하실 테지.”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준비 중이라고 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로렌스가 더한 방법으로 움직일 수도 있으니.
눈가를 지그시 누른 아르제오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며 등을 돌렸다.
“…일이 잘못되면 형님께선, 아우를 잃으실 겁니다.”
차갑게 말한 아르제오는 그 길로 로렌스에게 향했다.
루이스의 말대로, 2황자가 어찌 움직일지 보고 오라고 했으니 향했던 거였다.
그 지시를 하며 로렌스가 상황을 알려 주었을 때가 되서야 아르제오는 루이스가 공작령을 언급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을 수습하지 않을 것이다.
똑똑.
“들어와라.”
황태자의 집무실에 들어서기 전 아르제오는 짧게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 루이스는 뭐라든?”
로렌스는 서류를 처리하며 아르제오를 쳐다도 보지 않고 물었다.
“……”
아르제오는 딱히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 그저 서 있었다.
사각사각 펜이 종이에 닿는 소리만 맴돌다가, 로렌스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아르제오가 이리 나올 거란 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듯 놀라지도 않았다.
“역시 말하지 않을 생각인가.”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질문을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
오늘따라 로렌스의 태도가 유난히 서늘했다. 루이스가 황제와 그런 거래를 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하겠지만.
로렌스는 루이스가 그런 제안을 하더라도,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예상보다도 더, 황제는 포레스티아 공작령을 탐내고 있었다.
“왜, 루이스가 전쟁이라도 일으키겠다 하더냐?”
“…그럼 전하께선 어찌 움직이실 겁니까?”
“글쎄.”
펜을 내려놓은 로렌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상황에 따라서 움직이겠지. 네가 루이스를 돕겠다면, 그들이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발루아 제국에 대가를 받고 흘릴 수도 있고.”
아르제오는 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네가 여전히 날 위해 일하겠다면, 이쪽이 루이스보다 먼저 움직이겠지. 어쨌든 폐하께서는 포레스티아 공작령을 손에 넣는 이에게 황위를 넘길 심산이시니.”
루이스가 포레스티아 공작령을 언급한 이상, 공작령이 이 후계 다툼을 완전히 피해 가는 건 어려워 보였다.
“어찌하겠느냐?”
로렌스는 확신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희생이 적은 쪽을 택할 터였다.
최대한 루이스가 안전할 방법을. 그리고 그건 자신을 돕는 길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오래는 안 된다.”
“예.”
등을 돌려 집무실을 벗어나는 아르제오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걸 보면서도 로렌스는 그다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모든 것은 자신이 황위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들이라고 여겼으니.
집무실을 나선 아르제오는 서둘러 황자궁으로 돌아갔다.
제 방으로 돌아온 그는 미리 기다리도록 지시했던 유진을 찾았다.
“유진.”
유진은 어둠 속에서 슥 나타났다. 기척을 죽이고 숨는 일에는 익숙한 얼굴로.
“어찌 되셨습니까?”
이미 답을 예상하는 듯한 유진의 표정에 아르제오는 결심을 다졌다.
“방법은 없다. 우리가 제일 먼저 움직여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