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 *
황제로부터 직접 시타델 섬을 하사받은 일이 퍼지면서, 레이라는 다시 사교계의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초대장은 날마다 쏟아졌고, 레이라는 거절의 답신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게다가 매일 섬을 오가며 약초를 키우니 그녀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 레이라는 섬으로 가 볼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똑똑. 마침 방문을 두드리며 나타난 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가씨, 이제 섬으로 가시려고요?”
“응. 더 늦기 전에 다녀와야지.”
“그래도 가시기 전에 이 초대장은 확인하시고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의 로라는 두 개의 초대장을 레이라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황궁의 초대장이었다. 황후에게서 온.
그걸 보는 레이라도 로라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황후께서 아가씨는 왜 찾으시는 걸까요?”
초대장을 뜯어 내용을 확인한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걸 다시 로라에게 건넸다.
“참석하실 건가요?”
“아니.”
“그래도 될까요? 황궁에서 온 초대장인데….”
“몸이 좋지 않다고 하면 돼. 중요한 행사도 아니고, 내가 참석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차분하게 대답하며 레이라는 남은 초대장을 펼쳤다.
엘라가 보낸 초대장에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쪽은 꽤 흥미로운 초대장이었다.
그런 레이라의 표정을 살피던 로라가 슬쩍 웃으며 물었다.
“그쪽은 마음에 드시나 보네요?”
“응, 그러네.”
부드럽게 미소 지은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를 끌었던 초대장은 하르센 백작가가 주최하는 파티였다.
다만 이름만 파티였지, 큰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들과 황궁의, 약초를 다루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얘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참석해야겠네. 준비는 맡길게.”
“네, 아가씨! 드디어 사교 활동을…!”
“그런 건 아니야.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랑은 얘기를 나눠 보고 싶을 뿐이니까.”
괜한 기대는 말라며 단호히 말한 레이라는 다녀오겠다며 저택을 나섰다.
이제는 온전히 제 것이 되었으니 시타델 섬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가벼웠다.
공작가의 배를 타고 섬으로 향한 레이라는 열심히 약초들을 키웠다.
최근 들어 약초를 찾는 곳이 더 많아져서 일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키워 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요청하는 모든 곳에 약초를 공급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공작가 사람들과 함께 약초 관리를 하던 레이라는, 아가씨는 제발 잠시 쉬시라는 말에 섬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벽난로 쪽으로 무심코 걸어가니, 그곳에서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 있던 아르제오가 떠올랐다.
‘지금쯤 뭐 하려나.’
또 겨울 바다에 뛰어드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을 하고 있던 무렵.
눈앞의 작은 의자 위로 갑작스럽게 편지 한 통이 빛과 함께 툭 떨어졌다.
레이라는 방금 제가 뭘 본 건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눈만 깜박였다. 그러다가 재빨리 편지를 집어 들었다.
갑자기 편지가 생겨난 건 아마도 마법일 테고, 얼마 전에 아르제오가 마탑에 다녀온 것이 생각이 나서.
그리고 예상대로, 그 편지는 아르제오에게서 온 것이었다.
편지를 꺼냈는데도 봉투 안에 무언가가 굴러다녀서 보니, 작은 씨앗이 들어 있었다.
네모난 모양의 씨앗에는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유심히 씨앗을 들여다보던 레이라는 편지로 시선을 옮겼다.
「상황이 좋지 않아. 그러니 본론만 말할게. 포레스티아령을 완전히 요새처럼 만들 순 없을까 싶어서 마탑에 의뢰에 만든 식물이야.
아직 시험 단계라서 하나만 미리 보내. 키울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조만간 만나러 갈게. 그러니 내가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심각한 얼굴로 앞내용을 보던 레이라는 뒷부분에서 픽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또 겨울 바다에 뛰어들어서 오는 건 아니겠지…?’
그 부분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작게 웃던 레이라는 곧 손에 든 씨앗을 매만지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씨앗과 닿은 손끝에서 옅은 빛이 스며들고, 레이라의 머리에는 식물이 그려졌다.
‘이걸로 포레스티아령을 요새로 만든다고?’
다시 눈을 뜬 레이라는 편지를 힐끔거리며 질린 얼굴을 했다.
도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편지를 곱게 접어 챙긴 레이라는 씨앗만 손에 들고 저택을 나섰다.
아직 시험 단계인 식물이라면 시타델 섬에서 키워 보는 게 더 좋을 터였다. 이곳은 공작가 사람들 외에는 들어오지 못하니까.
밖으로 나서니 사람들이 슬슬 약초를 배에 싣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레이라는 걸음을 서둘러 약초밭과 거리가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공간이 널찍한 곳에 아르제오에게 받은 씨앗을 심었다.
얼마나 커질지 알 수 없는 식물이어서 레이라는 조금 뒤로 물러난 뒤 땅을 짚었다.
청록색 빛이 땅에 스며들며, 곧 씨앗의 정체가 땅 위로 고개를 들었다.
쑥쑥 자라나는 그 식물을 보며 레이라는 작게 감탄했다.
“…제오는 대단하네. 이런 생각을 다 하고.”
* * *
하르센 백작가가 주최하는 파티는 금세 입소문을 타고 주목을 받았다. 레이라가 참석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로라는 레이라를 치장하는 일이 너무 오랜만이라며 마음껏 그녀를 꾸몄다.
“지루할 수도 있을 텐데 정말 괜찮겠어?”
“그럼요. 누님, 괜한 놈이 들러붙으면 그게 더 곤란합니다.”
“아무도 안 그런다니까.”
작게 웃은 레이라는 헤레이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죄인 신분으로 유배되어 있던 폐위된 황후에게 누가 다가온다는 말인가.
‘제오는 오겠지만.’
그를 떠올리며 레이라가 작게 웃자, 헤레이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 누이를 응시했다.
‘수상한데.’
옅은 홍조를 띠며 웃는 얼굴은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얼굴이었다.
‘최근 폐하께서 자주 공작가를 방문하셨다는데…. 아니겠지.’
이미 한 번 속았던 사람이니 두 번 속지는 않겠지만, 최근 황제의 움직임도 심상치가 않아서 헤레이스는 걱정이 앞섰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에게 하르센 백작 영애가 다가왔다.
“공녀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뵙고 싶었거든요.”
눈을 반짝이며 호감을 드러낸 영애의 뒤를 이어 하르센 백작 부부가 나타났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녀님.”
“아니에요, 저도 더 배우고 싶어서 온걸요.”
부드럽게 미소 짓는 레이라를 위해 그들은 열심히 주변 사람들을 소개했다.
어느 지역에서, 어느 정도의 규모로 병원을 운영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환자들을 위하는 사람들인지, 그런 것들을 열심히 어필했다.
레이라가 약초를 공급하는 곳들은 모두 그런 것들을 기준으로 선정했기 때문에.
환자들의 상태가 많이 나아진 것에 대해서도 한참이나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각자 무리 지어서 얘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시타델 섬을 하사받으셨다지요? 축하드립니다, 공녀님.”
“그곳에서 약초를 재배 중이신 거지요?”
사람들의 이목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린 듯 하르센 백작 부부와 제론 백작 부부가 얘기를 꺼냈다.
“네. 약초 공급과 동시에 말씀드린 대로, 시타델 섬에서 키워야만 그만큼의 효능을 지니고 있거든요.”
확인 사살하는 듯한 레이라의 말에 주변을 맴돌던 몇 귀족이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시타델 섬에서 키워야만 한다는 건, 그 엄청난 효능을 지닌 약초는 오로지 레이라만 키울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공녀님 덕에 얼마나 많은 환자가 도움을 받았는지 몰라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쁠 뿐입니다.”
수줍게 웃는 레이라는 그저 어여뻤다. 황제가 어찌 긴 시간 그녀를 곁에 두고도 내칠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품을 만큼.
“다른 약초들도 섬에서 기르실 예정인가요?”
하르센 백작의 질문에 레이라는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약초라면요. 염두에 두신 약초라도 있나요?”
“공녀님께선 혹, 레벤이라는 꽃을 아십니까?”
그 질문에 레이라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
“백작님께서도 레벤을 아시나요?”
“식물에 관심이 많아서요.”
수줍게 웃는 백작을 보며 레이라는 눈을 빛냈다. 그와 동시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는데, 그건 아르제오를 떠올려서였다.
레벤의 씨앗을 제가 못 찾을 리가 없다며 당당하게 말하던 모습이 퍽 귀여웠으니.
“꽃은 물론, 씨앗도 구하기 어려워서 인간이 허상으로 만들어 낸 꽃이라는 얘기도 있죠. 하지만 전 있다고 믿습니다.”
“저도 그래요. 꼭 한번 피워 보고 싶은 꽃이거든요.”
“더 많은 종류의 약초도 계획하고 계신다면, 제가 좀 구해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정말요? 저야 감사하죠.”
반색하는 레이라를 보며 백작 부인이 하르센 백작의 팔을 살포시 붙잡았다.
“약초로 쓰이는 꽃들도 있는데, 꽃은 어떠세요, 공녀님?”
“그렇지 않아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부인께서는 어떤 꽃을 추천하세요?”
좋아하는 분야의 이야기를 하는 레이라의 표정은 활기가 돌았다.
곁에 있던 헤레이스는 조금도 끼어들 수 없는 대화였지만, 그런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그렇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때, 화기애애하던 연회장 분위기가 한순간 술렁였다.
주변의 술렁임을 감지한 레이라 일행도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곧 연회장으로 들어선 의외의 인물을 발견한 하르센 백작 부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화, 황후 폐하…. 여, 여긴 어떻게….”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단 말인가?”
눈썹을 치켜올리는 엘라를 보며 하르센 백작 부부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리 와주시니 영광입니다.”
백작 부부와 인사를 나누는 엘라를 슬쩍 본 헤레이스는 조금 걱정스러운 듯 레이라를 바라봤다.
‘저 여자는 도대체 얼마나 뻔뻔한 건지….’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 당당히 나타나다니. 도대체 얼마나 수치심을 모르는 건지 대단하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연회장 안을 한차례 훑은 엘라는 레이라와 헤레이스를 발견하고는 곧장 두 사람에게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이 그뿐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며.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엘라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눈빛에는 얼핏 분노가 서려 있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엘라에게 레이라와 헤레이스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뽐내는 엘라는 실룩거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런 곳에서 공녀를 다 보네.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시선에는 악의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주변이 다 긴장할 정도였는데, 레이라는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아 냈다.
“염려해 주신 덕에 괜찮습니다.”
“그래?”
레이라의 대답에 엘라는 참지 못하고 뚜렷하게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