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49)화 (49/122)

<49화>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가 소유의 땅을 하사하는 일이니 마땅히 당신이 황궁으로 찾아오는 것이 맞지. 하지만 그건 그다지 내키지 않더군.”

그럴 만도 했다. 그녀가 황궁으로 오면 현 황후인 엘라를 마주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레이라에게 황궁은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었으니, 로이드가 공작가로 온 것이었다. 그녀는 당연히 사람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온 것이 불만인가?”

가늘어진 눈매로 묻는 로이드를 잠시 응시하던 레이라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를 뵈어서 황송하다 말씀드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싸늘한 레이라의 물음에 로이드는 입을 닫았다.

여전히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차갑기만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살갑게 대해 주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었다. 하지만 차마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못난 것도 정도껏이지.’

앞이 훤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레이라에게 미움만 더 받을 거라고. 그리고 로이드는 더 이상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나를 보는 것이 많이 불편한 듯하여 물은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불편합니다.”

“…여전히 거침없군.”

황제라고 하여 아첨을 떠는 법이 없었다.

레이라는 늘 그랬다. 그런 그녀의 한결같음이 어쩐지 안심되어서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시타델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더군.”

“네, 유배지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요.”

“그렇군…. 그건 다행이네.”

“네?”

“아무것도 아니다.”

가볍게 고개를 저은 로이드는 레이라에게 직접 문서를 전했다.

“형식적인 의식은 전부 생략했다. 그편이 더 편할 테지?”

“배려 감사합니다.”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문서를 가지고 방문한 건 레이라를 위해서였다.

황궁으로 부르는 건, 여러모로 그녀의 처지가 난처해질 테니.

이미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놓이기는 했다. 사교계에도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마음껏 떠벌린 후일 터.

폐위 후 유배되었다가 무죄를 인정받아 다시 포레스티아 공작저로.

이후에는 효능이 뛰어난 약초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유배지를 하사받았다.

귀족들은 다시 포레스티아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닐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로이드의 잦은 방문도 줄곧 주시하고 있었다.

어디에 줄을 서야 자신들의 안위가 무사할지. 그들은 끊임없이 계산하고 있었다.

입을 굳게 닫은 로이드는 슬쩍 주변을 훑었다.

일정대로라면 이대로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애초에 그가 직접 전달하러 올 것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다.

로이드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겠나.”

레이라는 로이드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잠시 그를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산책 정도라면. 값진 것을 받은 참이기도 하니까요.”

시타델 섬이 온전히 손에 들어와 너그러워진 레이라는 로이드와 함께 공작저의 정원으로 나섰다.

겨울을 맞이하는 듯, 정원은 겨울철을 버틸 수 있는 꽃들로 가득했다. 그것들을 짧게 눈에 담은 로이드는 곧 제 옆을 걷는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고운 선을 그리는 옆얼굴. 언제나처럼 덤덤한 분위기.

하지만 정원에서만은, 꽃을 볼 때만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여전히 정원을 좋아하는군.”

“네, 좋아합니다.”

“이곳도 당신이 가꾼 건가?”

“전부는 아니에요. 요즘은 바빠서 공작가의 정원사에게 맡겼습니다. 덕분에 정원사의 일이 늘어났죠.”

“당신 덕에 매번 일이 쉬웠을 테니 이럴 때 정도는 일이 많아도 괜찮겠지.”

어쩐지 편들어 주는 듯한 말에 레이라는 조금 의아하게 로이드를 힐끔거렸다.

바쁘게 지내는 것을 꼬집는 말도 아니고, 그저 괜찮으니 쉬엄쉬엄하라는 말투.

그녀가 정원에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서 더 의아했다.

“제가 정원에 있는 걸 싫어하지 않으셨나요?”

의아함을 오래 지니고 있지 않은 레이라가 물었다. 그녀의 말에 로이드는 줄곧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슬쩍 돌렸다.

“글쎄.”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싫어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레이라는 언제나 제 뜻과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그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어여쁜 것들에 둘러싸여 편안히 시간을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레이라는 수수한 드레스를 고집했고, 늘 정원에서 손에 흙을 묻혔다.

처음에는 자신의 세력을 위해 자상한 연기를 했다. 레이라는 무던한 태도로 일관했고,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로이드는 그 미소가 퍽 마음에 들었지만, 이후로 그녀는 제게 마음을 주지는 않았다.

솔직하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입에 담는 그녀인데도,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어서도 단 한 번도 ‘사랑’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매번 직접 내린 차와 수면에 좋은 꽃잎 등을 보내도 로이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긴 시간을 황후궁에 내버려 둬도, 먼저 찾아오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오기를 부리다 못해 찾아가면 늘 그렇듯 정원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엇 하나 내어 주지 않고 인형처럼 살게 해도 레이라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그것에 또 심기가 뒤틀렸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뒤틀린 마음이 또 뒤틀리고, 뒤틀려져 끝내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우스웠다. 제국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고도 이리 어리석을 수 있을까.

로이드는 정원을 둘러보는 척하며 돌렸던 시선을 금세 다시 레이라에게 고정시켰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짧으니, 함께 있는 동안에는 줄곧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좋은 정원이군.”

“폐하께 그런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네요.”

답은 쌀쌀맞았지만, 레이라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는 온통 공작가의 정원이 담겼다. 그리고 로이드의 눈에는 온통 그녀뿐이었다.

주먹을 움켜쥔 로이드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줄곧 레이라를 응시했다.

제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그걸 묻는다면 당연하게도 없었다.

답이 정해져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혀끝에 걸린 말이 자꾸만 밖으로 나오려 입술을 비집었다.

“…했다.”

“네?”

바로 옆에 있어도 듣기 힘들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레이라가 걸음을 멈추며 되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니 더욱 마음이 저릿했다. 하지만 로이드는 더 늦기 전에라도 말해야 했다.

“미안했다.”

“…네…?”

레이라는 귀를 의심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못했다.”

놀라움은 곧 의아함, 그러고는 곧 마음을 지끈거리게 했다.

“…무엇을 잘못하셨는데요?”

그래서 그 복잡한 감정들은 이런 질문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로이드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참담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무엇을 잘못했냐고 묻는다면, 잘못한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궁에 가둔 것도, 오기를 부리느라 찾아가지 않은 것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방치한 것도.

그녀의 도움만은 받으면서 마음을 주지 않는 것 같은 태도에 짜증만 낸 것도.

대답하지 못하는 로이드를 보며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제게 사과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시더라도요.”

“바라는 것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말끝을 흐린 로이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답답했다. 답답하고, 갑갑했다.

이 이상 정원을 그녀와 걸어도, 더 나아질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로이드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이것도 그의 습관 중 하나였다.

표정을, 제 감정을 들키기 싫을 땐 꼭 이렇게 먼저 등을 돌렸다. 그리하면 숨겨진다고 믿는 듯이.

“무언가를 바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많아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더니 로이드는 레이라의 대답을 듣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놀랐던 그녀는 찰나 고민했다. 그 고민은 길지 않았고 곧 로이드의 뒤를 따라나섰다.

뒤쫓아오는 레이라를 의식한 로이드는 곧 걸음을 늦췄다. 그는 늘 붙잡힐 속도로 도망치고 있었다.

“폐하.”

“……”

레이라의 부름에 걸음을 멈춘 로이드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고 싶으신 말이 더 있으신 표정인데요.”

그녀의 말에 로이드는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보이지 않을 텐데.”

“등을 보이시기 전에 그런 표정이셨어요.”

레이라는 이런 면에서는 예리했다. 사람을 잘 관찰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입을 꾹 다문 로이드는 줄곧 마음에 담고 있던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뱉어 내고 싶었다.

비록 돌아올 답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더라도.

그는 한참을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었고, 레이라는 재촉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녀의 기다림에 아주 작은 용기가 피어오른 로이드는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꺼냈다.

“내게…. 다시 기회를 줄 수 있겠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레이라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무슨 기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혹, 포레스티아의 힘을 원하시는 거라면….”

차라리 그런 것이길 바라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 그녀에게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힘이 필요하여 그대를 찾은 것이 아니다.”

“……”

“그 마음을 온전히 얻을…. 기회를 얻고자 한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라는 곧장 대답할 수가 없었다. 로이드가 이리도 간절한 표정을 보이는 게 처음이어서.

하지만 그는 레이라의 표정만으로도 돌아올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외면했을 뿐이다.

“폐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로이드는 도망치듯이 걸음을 뗐다.

“대답은 다음에 듣지. 좀 더…. 더 그대가 나를 불쌍히 여길 때 듣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때까지 기다리겠다.”

“하오나, 폐하….”

“이만 가겠다. 건강 잘 챙기도록.”

로이드는 이번엔 잡을 수 없을 속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레이라는 마음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이 와도 제 대답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로이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바뀌지 않을 대답이었다. 이미 제 마음에 꽉 차도록 다른 사람을 담았으니 말이다.

* * *

황궁으로 돌아간 로이드는 즉시 세실을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황제의 집무실로 찾아온 세실을 향해 로이드는 그 어떤 설명도 없이 대뜸 말했다.

“황후 자리를 비워야겠다.”

“예…? 그게 무슨….”

세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에 개의치 않고 로이드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홀든 후작가에서 필요한 건 다 얻어냈나?”

“일을 진행하기는 했습니다만…. 정말 내치실 겁니까?”

세실은 믿고 싶지 않은 얼굴로 로이드를 살폈다.

“어차피 필요한 것이 있어 곁에 둔 것이다. 앞으로는 누구도 그 자리에 앉지 못할 것이다.”

‘레이라를 제외하고는.’

로이드는 뒷말을 삼켰다. 앞으로는 그 누구도, 레이라가 아니라면 제 곁에 두지 않겠다고.

자신이 몹쓸 인간이라는 걸 굳이 또 다른 이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다. 그러니 자신은 혼자가 되는 것이 맞았다.

엘라 역시도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제게 접근했다. 발악은 하겠지만, 레이라처럼 상처받지는 않을 터였다.

레이라가 제 곁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로이드는 그 자리를 비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라도 작은 희망을 제 마음에 심어, 어떻게든 버텨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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