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한없이 심각한 헤레이스의 표정에 레이라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가끔 제정신일까, 하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그런데 이 날씨에 물에 빠진 채로 나타난 건가요? 게다가 또 어떻게 사라진 거죠? 혹시 은인이 마법사입니까?”
혼란스러워하며 질문을 쏟아 내는 동생을 보며 그녀는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천천히. 이스, 네게 감출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그보다, 먼저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나 배고파.”
레이라가 제 홀쭉한 배를 쓰다듬으며 말하니 헤레이스가 펄쩍 뛰었다. 그러고는 어서 가자며 등을 떠밀어서 그녀는 또 한 번 웃었다.
공작저로 돌아간 두 사람은 저녁 자리에서 한참이나 아르제오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헤레이스는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레이라의 얘기를 들었는데, 어쨌든 그가 은인이라는 건 사실이었다.
공작 부인은 레이라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 전부 그의 덕이라며 언젠가 꼭 초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의심스러운 부분은 많았지만, 헤레이스는 입을 닫았다. 레이라 역시, 두 제국 간의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았다.
* * *
리히덴의 황자궁으로 돌아간 아르제오는 털썩 제 침대에 엎어졌다.
보드라운 이불에 얼굴을 묻은 그는 감춰지지 않는 미소를 이불 속으로 파묻었다.
지금 제 웃음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만일 레이라의 존재가 알려지면, 이번에는 자유가 아닌 그녀를 미끼로 삼을 테니.
“후….”
긴 한숨을 내쉰 아르제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곧 그의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2황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
레이라를 만나 위로받았던 기분이 금세 깨어져 버렸다. 그는 이불 속에 미소를 감췄던 것과는 정반대의 얼어붙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수도 순찰 임무에 동행하시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살짝 고개를 떨어트린 채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시종을 아르제오가 잠시 응시했다.
“거절한다면?”
“거절하신다면 함께 식사, 산책, 혹은 티타임을 가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겠지.”
아르제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와 함께 식사나 차, 산책 전부 싫었다. 제일 나은 선택지가 순찰 임무 동행이었다.
아르제오는 준비를 마치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 루이스에게 향했다.
“왔어?”
말에 오르는 아르제오에게 다가온 루이스가 싱긋 웃었다.
“이게 제일 나은 선택지였으니까요.”
“거절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
“아, 형님께서 날 감시하라고 하셨으니 거절할 수는 없었을 테지.”
어깨를 으쓱이는 루이스를 보며 아르제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아우는 정말 마음이 약해서 탈이라니까.”
“…훌륭히 이용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제국을 이대로 둘 수는 없으니까.”
아르제오는 이토록 제국을 위하는 루이스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을 자유가 최우선인 이기주의라고 여겼다.
형제로 태어났으니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없었으면 바랐다. 아주 간절히.
이후로 아르제오는 딱히 말이 없었고, 루이스도 그곳에서 대화할 마음은 없었는지 곧 출발했다.
리히덴의 수도는 활기가 넘친다. 아니, 넘치는 척한다.
사실상 세력이 강한 귀족들이 독식하며 일개 시민들은 매일 허덕인다.
이러한 상황에 문제가 있음을 아르제오 역시 인지하고 있었지만, 후계자 다툼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루이스의 존재는, 로렌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 주었다.
덕분에 아르제오는 황태자의 명령으로 구호 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그마저도 사태를 조사하고 보고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가 그 이상의 움직임을 보인다면, 황태자가 이번에는 아르제오까지 경계할 테니.
루이스는 소수의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과 아르제오와 함께 수도 외곽으로 향했다.
황궁 근처, 광장과 귀족들의 저택이 있는 곳들은 굳이 그들이 순찰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고, 그 주머니를 채우는 일이 최우선이니 무슨 일이 생길 틈이 없었다.
생긴다고 하더라도 알아서 처리할 터였고. 그러니 루이스가 순찰하는 곳은 수도 외곽과 보호받지 못하는 시민들이 있는 곳이었다.
치안대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까지 살핀 루이스는 잠시 휴식을 취하자며 작은 숲 쪽에 말을 멈췄다.
그곳에서 쉬는 것이 늘 있는 일인지, 기사들은 능숙하게 말을 나무에 메고는 거리를 벌렸다.
루이스와 아르제오가 편히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말에서 내린 아르제오는 조금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니 싱그러운 공기가 느껴졌다. 레이라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였다.
“그래, 날 감시한 소감은 어떤가?”
그녀를 떠올리니 풀어지려던 기분이 다시 얼어붙었다.
숲을 올려다보며 슬쩍 미소를 머금던 아르제오가 다시 입매를 굳혔다. 그리고 루이스를 향해 돌아섰다.
“감시랄 것이 있습니까? 휴가를 지내러 자리를 비웠었는데요.”
“그러게, 잠깐 자리를 비우긴 했었지. 하지만 내 감시를 위해서 거절하지 않은 거잖아?”
“…하실 말씀이 있어 부른 것이라 예상했을 뿐입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루이스는 근처의 커다란 바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너도 오늘 봐서 알잖아.”
“…무엇을요.”
아르제오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 제국은 문제가 많아.”
그건 아르제오도 아는 사실이었다. 리히덴 제국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겠지.
하지만 후계자 다툼은 그걸 위한 해결책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차라리 황태자 전하의 신하로서 제국을 위해 움직이심이 어떱니까.”
아르제오가 실낱같은 희망에 품고 물었다. 루이스는 잠시 그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형님은 귀족들이 살기 좋은 제국을 만드실 거야. 하지만 가난한 제국민까지는 살피지 않겠지.”
“그건 형님께서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꼭 황제의 자리가 아니어도, 형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아니지, 그리되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일 것이다.”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무사히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면 누구의 피도 보지 않으실 겁니다.”
절박한 아르제오의 목소리에 루이스가 빤히 그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픽 웃었다.
“그렇군. 내 목숨도 형님이 네게 건 목줄 중 하나였구나.”
“……”
“정말 형님이 날 죽이지 않을 거라 믿느냐?”
그 물음에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굳건히 믿을 수 있는 것도.
“하면, 제가 무얼 믿어야 합니까? 평화롭고자 한 것이 잘못입니까?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형님께서 틀렸다고 한들 전 그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루이스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아아, 마음 약한 우리 아우, 하고.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난 움직일 거야. 너한텐 말하려고.”
“형님.”
“난 네가 가끔 날 전하라고 부를 때 그렇게 서운하더라.”
“…….”
“형님은 네가 ‘황태자 전하’하고 불러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내 기분은 모르겠지만.”
로렌스와 루이스 둘 다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까지 온 것이겠지.
“그만 가지.”
“예.”
아르제오는 무사히 루이스와의 수도 순찰을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예고했던 대로 루이스가 움직였다.
황제에게 독대를 청한 루이스는 대뜸 폭탄 같은 청을 했다.
“국경의 포레스티아 영지를 리히덴 제국 것으로 만들면, 황태자를 재고하여 주십시오.”
* * *
보수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열심히 약초를 길러 제국으로 보낸 레이라는, 공사가 끝난 후 황궁으로 정식 요청을 보냈다.
당연하게도 로이드는 레이라의 시타델 섬 방문 요청을 기각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공급하던 약초가 뚝 끊어졌다.
효능이 월등히 뛰어난 약초를 이미 알아버렸는데, 공급되지 않으니 환자들은 답답할 노릇이었다.
레이라는 이를 시타델 섬이 황가의 소유로, 자신의 출입을 금했기 때문임을 몇몇 사람을 통해 알렸다.
발루아로 넘어오면서 신세를 진 딘과 제롬의 도움을 받아서.
상단이 공작령을 벗어나고, 약초가 부족해진 즉시 이가 황실이 그녀의 시타델 출입을 막기 때문이라고 정보를 흘렸다.
“황실은 국민을 위해 공녀님에게 시타델 섬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유배지보다 훨씬 유익하게 쓰이고 있음이 명확합니다!”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지며 그들의 편에 서는 귀족들도 있었다. 그들의 요청이 쏟아지며 로이드는 골머리를 앓았다.
그녀에게 황가 소유의 섬을 내어 주는 것 자체는 로이드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든 둘이든 얼마든지 내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섬이 시타델이라면 다른 이야기였다.
죄를 뒤집어씌워 유배 보냈던 섬이었다. 하필이면 그런 섬을….
국정 회의 내내 그들의 의견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로이드는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계속 공녀님의 섬 출입을 막으실 생각이십니까?”
난감함을 드러낸 세실의 물음에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안 되나?”
“현재 상황으로는 곤란합니다. 약초의 효능이 이미 입증된 뒤이고, 황궁의까지 그 약초를 요청합니다. 게다가 공녀 쪽에서 흘린 정보인지, 그 약초는 오로지 시타델 섬에서 키워야만 그 정도 효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정보는 확인되었나?”
“그마저도 정확한 확인이 어렵습니다. 공녀가 가진 특별한 힘으로 기른 것일 텐데, 그녀 외엔 약초를 길러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세실의 대답에 로이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제 마음을 몰라주는가. 좋지 않은 기억뿐일 그런 곳에, 그녀를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 나쁜 기억이 있는 곳에 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현재로서는 시타델 섬을 공작가에 내어 주는 것이 최선입니다. 어차피 유배지로도 잘 쓰이지 않는 곳입니다. 황실의 관리하에 두는 것보다, 공녀에게 내어 주는 쪽이 더 이득입니다.”
로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남쪽 영지에서 산사태로 부상자가 많다고 합니다. 의사들이 입을 모아 공녀의 약초를 찾으니, 이 이상 기각하시는 건….”
“…알았다.”
애석하게도, 부상자가 많다면 레이라는 그들을 돕고 싶어 할 터였다.
그리고 그녀 말대로 시타델 섬에서만 약초의 효능을 높일 수 있다면, 그는 결국 그녀의 말을 들어주어야 했다.
* * *
황제의 허락과 함께, 포레스티아 공녀의 공을 인정하며 시타델 섬을 그녀의 소유로 하사했다.
이를 증명하는 문서가 곧 도달할 것이란 말에 레이라는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
유배지였다고는 하나, 그녀는 시타델 섬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고요함.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던 시간, 그리고 섬 전체를 둘러싼 거대한 나무들.
‘유배’라는 것도 잊을 만큼 그곳에서의 시간은 좋았다.
그러니 황가 소유의 그 섬을 효능이 뛰어난 약초를 제공한 공으로 받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그 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이 의외의 인물이라 난관에 부딪히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