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아르제오는 한순간 숨을 멈췄다.
“생각보다 많이, 보고 싶었어요.”
정말이었다. 리히덴에서의 시간이 즐거웠으니, 그리울 거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그리웠다.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쐐기를 박는 듯 이어진 레이라의 말에 결국 그는 저항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곧 터질 듯이 달아오르는 얼굴을 보며 레이라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제오, 얼굴이 엄청 빨가네요.”
“그…!”
무언가 반박하려던 아르제오는 손등을 뺨에 대며 최대한 열을 식히려고 노력했다.
“그대가 자꾸 나를…. 제오라고 부르니까….”
“네?”
제오는 그의 애칭이었다. 아주 가까운 사이만 부르는.
황자인 그는 주변에 그렇게 불러 주는 사람이 이제는 없다는 말도 했었다.
정체를 숨길 때 자주 쓰는 이름이라고 했지만, 정작 그렇게 불러 주는 이는 없었다.
감히 황자의 이름을, 애칭을 그리 쉽게 부를 수 있을 리 없으니.
레이라는 제가 자각하지 못한 채로 몇 번이나 그를 애칭으로 불렀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혔다.
“레이라도 빨갛네. 얼굴.”
아르제오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레이라는 열을 식히려는 듯 제 손으로 연신 뺨을 매만지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여긴 어떻게 온 건지 말 안 해 줄 건가요?”
“딱히 숨길 생각 없어. 마법을 좀 이용했지.”
“마법이요?”
“응. 마탑에 다녀왔거든.”
불을 쬐며 턱을 괸 아르제오가 자신에 찬 얼굴로 씩 웃었다.
“마탑이요? 그럼 혹시 중간에 뭐가 잘못돼서 바다에 떨어진 건가요?”
“아니. 시타델은 발루아 제국 소유의 섬이니까. 그 섬으로 이동하는 건 문제가 생기거든. 근데 바다에 떨어져서 헤엄치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이 추운 날에요?”
레이라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아르제오가 눈매를 휘며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를 볼 수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지.”
저돌적인 말에 레이라는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직설적이네요.”
“그러려고. 나쁘지 않잖아?”
“나쁘진 않죠.”
아르제오는 그래도 최대한 섬과 가까운 바다로 이동한 거라고 덧붙이며 웃었다.
레이라는 이게 정말 웃을 일인지 의문이었지만.
“그럼,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아, 돌아가는 아티펙트도 있어. 이건 어디에 있든, 리히덴의 내 거처로 갈 수 있는 거야.”
레이라는 아르제오가 보이는 아티펙트가 조금 부러워졌다.
저게 있으면 언제든 그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
하지만 다시 돌아올 방법이 없으니 어차피 쓰지는 못할 터였다.
“바다가 너무 차서 수영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다시 돌아가려고 했지.”
“이번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세요. 앞으로는 이러지 마시고요.”
“하지만 보고 싶었다면서?”
“보고 싶었던 것과는 별개죠. 이런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아요.”
“걱정하는 건가?”
“네, 걱정하는 거예요.”
곧장 돌아온 대답에 아르제오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좋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 그건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아르제오는 이런 진심 어린 걱정을 받은 것이 오래전처럼 느껴져서 더욱 그러했다.
그의 말에 레이라는 눈을 흘겼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르제오가 적국인 발루아까지 왔으니 레이라는 덜컥 걱정되었다. 그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안심시키려는 듯 웃었다.
“그대가 보고 싶어서 왔지.”
“그런 걸로 이렇게까지 하나요?”
“그런 거라니, 그대를 보는 건 중요한 일이야.”
“그렇다고 쳐요.”
아르제오의 실없는 농담에 레이라가 조금 안심한 듯 보이니 그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두 제국의 전쟁에서 포레스티아령을 지킬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마탑에 다녀왔어.”
“…전쟁을 피할 수는 없는 거군요.”
눈썹을 늘어뜨리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루아의 황제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도, 리히덴 쪽에서 포레스티아령을 노리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그대의 힘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식물도 키울 수 있을까?”
그의 물음에 레이라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글쎄요. 인위적으로 만든 식물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할 것 같아요.”
인위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게 ‘식물’인 이상 그녀가 길러 내지 못할 리 없었다.
“근데 그건 왜요?”
“이곳이 전쟁을 피할 수 있었으면 해서.”
그렇게 대답하며 아르제오는 확실한 방법은 아니지만, 마탑에 의뢰를 했다고 말했다.
“저 때문에 이곳에 그렇게 마음을 쓰는 건가요?”
말똥말똥 눈을 뜬 레이라를 보며 그는 픽 웃었다.
“나 나중에 공작령으로 망명하려고 그러는 건데?”
“그래요?”
“그럼.”
“그럼, 그 인공 식물을 내가 길러낼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요?”
순수한 궁금증에 묻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따로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대를 만나려고 왔지.”
“목숨을 걸고요?”
“그래. 목숨을 걸 만큼 보고 싶었어.”
능구렁이처럼 웃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도 따라 웃었다.
“제가 왜 그렇게까지 보고 싶은데요?”
그 답은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피부로 느껴졌다.
과연 입에 담아도 될지는 의문이었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아르제오는 가만히 레이라의 맑은 청록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다 내던지고 이곳으로 도망친다면, 그녀와 평화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일이 해결되기 전까진 어렵겠지.’
리히덴 제국 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두 형제의 황위 다툼에서 아르제오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 터였다.
잠시 고민하던 아르제오는 살포시 레이라의 손을 붙잡았다.
“내게 자유가 허락된 뒤에, 그대와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고 하면…. 그건 너무 무거울까?”
눈썹을 늘어뜨리며 짓는 어딘가 서글픈 미소.
하지만 레이라는 그 애달픈 미소가 더 마음에 들었다.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니. 어딘가의 노신사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작게 웃었다.
“무겁네요.”
“역시 그런가?”
“하지만 전 그 정도 무게가 딱 좋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커다란 손의 온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당신이 자유로워지기만 하면 되겠네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덤덤히 말하니 어쩐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면 되겠네.”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로 말했다.
“자유의 몸이 되면 날 받아 줄 거야?”
슬쩍 고개를 기울인 얼굴이 매혹적이었다.
“글쎄요. 전 이미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요.”
이번엔 레이라가 서글프게 웃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남긴 황제가 미워지게 만드는 미소였다.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녀를 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르제오로서는 일이 이렇게 된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황제가 어리석은 덕분에 레이라를 만났으니까.’
자신은 절대 황제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거야. 그건 경험자의 덕이거든.”
레이라는 황당한 대답에 맑게 웃었다.
“그러니 경험자가 나를 이끌어 주는 건 어때? 미숙한 자에게 덕을 베푸는 셈 치고.”
“훌륭한 핑곗거리네요.”
“그렇지?”
정말이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또 웃음이 났다.
“전쟁으로부터 공작령을 지켜 줄 식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마탑에 의뢰했으니, 조만간 답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그럼, 다음번에는 좋은 소식을 들고 또 만났으면 좋겠네요.”
레이라의 말대로 정말 그리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여쁜 그녀를 매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함께 차를 마시고, 산책하고 식사를 즐기며,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꿈처럼 행복한 삶일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아르제오가 돌연 고개를 돌렸다.
“누가 오는 것 같은데.”
이곳은 유배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올 사람이 누가 있지?
그렇게 생각하니 찾아온 사람이 황제가 아닐까 싶어 그가 표정을 굳혔다.
아르제오의 말에 고개를 돌렸던 레이라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녀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올 사람이라면 헤레이스밖에 없었다.
“아마도 제 동생일 거예요. 데리러 와 달라고 했거든요.”
레이라의 말에 아르제오는 금세 표정을 풀었다.
“그대 동생과 인사라도 나누고 싶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어.”
“네? 왜요?”
“그대와 단둘이 있는 모습은 좋아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런가요?”
“귀한 누님이니, 동생의 눈에는 누구라도 마음에 차지 않을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동생이 소중히 여긴다는 말에 레이라는 기분이 좋은지 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쑥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지만, 웃음을 감추진 못했다.
“이렇게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든 것이 아닌,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 드릴 수 있을 때 가족분들께 인사 드리지.”
“그래요, 그럼.”
아르제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그제야 레이라에게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져 오는 인기척에 아르제오는 아쉬운 듯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살포시 그녀의 부드러운 백금발 머리칼 끝을 매만졌다.
“매 순간, 그대가 그리워.”
차마 레이라에게 직접적으로 입술을 포개지는 못한 그가 머리칼에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나자, 손에 든 회중시계 모양 아티펙트가 빛났다.
빛과 함께 순식간에 아르제오는 모습을 감췄고, 곧장 헤레이스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누님?”
헤레이스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조급히 레이라를 찾았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로라가 찾아와 대뜸 누님을 모시러 섬으로 가 달라고 하던데….”
레이라는 타닥타닥 타고 있는 벽난로를 힐끔 바라보았다. 헤레이스는 설명이 필요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와 함께 계셨습니까?”
난로 앞의 의자는 두 개였고, 그녀의 두툼한 숄은 한쪽에 걸려 말리고 있었다.
레이라는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예? 도대체 누구와 있으셨습니까?”
헤레이스는 덜컥 겁에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시타델 섬에 외부인이 찾아왔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고, 찾아와 함께 있던 것이 황제여도 문제였다.
“내 은인이야.”
레이라의 대답에 헤레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겨 주변을 살폈다.
누가 보아도 물에 젖고,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피웠던 흔적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흔적들을 살피고는 레이라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누님의 은인이…. 혹시 제정신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