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46)화 (46/122)

<46화>

레이라는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넋을 놓고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헛것을 보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기억하는 그라면 어쩐지 이런 행동도 할 것 같았다.

“아, 아르제오…?”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첨벙거리며 다가온 아르제오는 땅에 발이 닿는 지점부터는 물살을 헤치며 걸어왔다.

“…정말 아르제오예요? 정말로?”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보여?”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아르제오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

“세상에! 뭐 하는 거예요, 이런 날씨에!”

그녀가 당장에 그에게 다가서려고 하자, 아르제오가 바다로 달려들려는 그녀를 막았다.

“기다려, 이쪽으로 오면 젖잖아. 내가 갈게.”

“미쳤어요? 이 날씨에 바다에 뛰어든 건가요? 아무리 건강한 몸이어도 앓아눕는다고요!”

젖으면 안 된다고 말리니 차마 뛰어들지 못한 레이라는 제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그녀를 보며 픽 웃은 아르제오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아주 잘게 몸을 떨며 씩 웃는 얼굴로 말했다.

“뼈가 시리다는 게 어떤 건지 아주 잘 알 것 같아.”

“어서 이리 와요!”

덥석 그를 잡아끈 레이라는 두르고 있던 두툼한 숄은 벗어 아르제오에게 둘렀다.

물에 젖은 손을 잡아채자 그녀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손이 너무 차가워요….”

아르제오의 손을 붙잡았던 그녀는 곧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졌다.

“얼음장 같아….”

레이라가 작게 중얼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에 아르제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저도 모르게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귀 끝이 화끈거리는 기분에 제 귀를 가리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손은 그의 귀에 닿지 못하고 레이라가 낚아챘다.

“이쪽으로 와요.”

“응?”

아르제오를 붙잡은 그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저택 공사가 이제 마무리 단계예요. 그러니 불을 지피는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공사? 사람들이 있어? 그대 혼자가 아니야?”

“몰랐어요?”

전혀 소식을 몰랐던 그의 반응에 오히려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발루아 소식도 잘 알고 있길래.”

“아…. 좀 바빠서.”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대답한 아르제오는 차가운 바닷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이라.”

“네?”

“이걸 나한테 주면 어떡해, 춥잖아.”

“제오가 할 말은 아니에요. 잔말 말고 따라와요.”

금세 평소의 차분한 분위기로 돌아온 레이라는 덤덤히 대답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르제오는 그녀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는데, 덤덤한 태도 때문이 아닌 자신을 애칭인 ‘제오’라고 부른 것 때문이었다.

앞서가는 레이라에게는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표정도 풀어지고, 뺨도 발그레했다.

당장 아르제오의 몸을 녹여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옮기던 레이라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섬으로 들어서는 좁은 길을 걸어 올라가니, 그 위에서 말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그래서 슬쩍 고개를 돌린 레이라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지금 여기 있는 걸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머리칼 끝에 맺힌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턱선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 그 위로 보이는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

또 더 위로 무심코 시선을 돌리니 무언가 바라는 듯한 눈빛을 마주하니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곤란하겠지?”

“역시 그런가요?”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눈에 띄지 않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네.”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는 비장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뗐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아르제오는 몰래 미소를 머금었다.

길을 따라 섬으로 들어선 레이라는 곧장 아르제오를 나무 뒤로 밀어 넣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요.”

“응.”

아르제오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얌전히 거대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를 숨기고 걸음을 뗀 레이라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처럼 덤덤히 반응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눈앞에 아르제오가 나타난 것에 마음이 술렁였다.

일단 저택 쪽으로 향한 그녀는 인부들에게 저택의 벽난로가 있는 근처는 쓸 수 있냐고 물었다.

이제 내부 마무리와 가구들을 들여오면 저택을 쓰는 데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인부들은 벽난로가 있는 곳과 벽난로는 문제없이 쓸 수 있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안심한 레이라는 그길로 로라에게 갔다.

“어머, 아가씨! 두르고 계시던 숄은 어디에다 두고 오셨어요? 이런 차림으로 바닷바람 쐬신 건 아니죠?”

“아….”

레이라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로라를 슬쩍 잡아끌었다.

“로라,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아가씨 부탁이라면 하나가 아니라 열 개라도 들어드려야죠. 뭔데요?”

그렇게 말하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피치 못할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데리고 공작가로 돌아가 줘.”

“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다 데리고 가. 그리고 이스한테 날 데리러 와 달라고 해 줘.”

“네? 아가씨는 안 가신다는 뜻이에요? 혼자 이곳에 계시겠다고요?”

로라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설명은 나중에 할게, 지금 빨리 움직여 줘.”

“하지만 아가씨…!”

“내 부탁은 열 개라도 들어준다며. 미안해, 근데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지금은 내 말을 따라 줄래?”

레이라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으니 로라는 분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저런 얼굴로 말하는데, 로라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이건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분한지, 로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날이 추우니 저택에 불을 피워 놓고 가겠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죠?”

“고마워.”

불만 가득한 얼굴이면서도 로라는 레이라의 뜻대로 사람들에게 철수를 전했다.

그러고는 정말로 저택 안 벽난로에 불을 피워 놓고는 시타델을 나섰다.

연신 불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레이라는 괜찮다며 웃어 주었다.

그들이 모두 돌아간 직후, 레이라는 아르제오에게 달려갔다.

“이제 괜찮아요.”

“죽음의 섬이라고 불린다더니 사람이 많네.”

“그동안 이것저것 바뀌었으니까요. 어서 이쪽으로 와요.”

레이라는 또 덥석 아르제오의 손을 붙잡고는 저택으로 들어섰다. 벽난로 앞에 그를 세워 두고 나서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이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푹 젖은 옷과 머리칼. 하지만 이곳에는 당장 그에게 내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갈아입을 옷도, 몸을 따뜻하게 덥혀 줄 차도.

“이대로 있으면 감기 걸릴 것 같은데….”

울상을 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린 레이라가 뭐라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아르제오가 부드럽게 그녀를 제 쪽으로 당겼다.

“추워. 불 앞에 있어.”

“추워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뭐라도 있나 찾아보고 올게요.”

“아니, 나 말고. 그대가 춥겠다고. 이 숄도 나한테 줬잖아. 미안, 다 젖어 버렸네.”

“이건 말리면 되지만, 당신은 이대로 있으면 감기 걸린단 말이에요.”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미치게 사랑스러웠다. 아르제오는 주먹을 꾹 움켜쥐어 머리가 빙빙 도는 저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괜찮아. 불 앞에 있으니 금방 마를 거야.”

“젖은 걸 계속 입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그럼 벗어?”

“네? 하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는걸요….”

레이라는 벗는다는 그의 발언보다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사실에 더 신경을 쓰는 듯했다.

그에 뚱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인 아르제오가 오기라도 부리듯 재킷과 셔츠를 벗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색기가 흐르는 시선으로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던 레이라는 돌연 탄성을 흘렸다.

“…아. 그러고 보니, 담요가 있다고 했던 것 같아요. 잠시만 기다려요.”

곧장 등을 돌린 그녀는 담요를 찾아서 모습을 감추었다.

등을 돌린 레이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것은 아르제오에게 보이지 않았다.

상체를 드러낸 채로 덩그러니 남겨진 아르제오는 주섬주섬 그녀의 숄을 주워 둘렀다.

“…쳇.”

작게 혀를 찬 아르제오는 벽난로 가까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러고는 난로 쪽으로 곧게 편 두 손을 내밀었다.

훈훈한 온기가 와 닿으니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레이라의 말대로, 푹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절로 몸이 잘게 떨려오고 있었으니.

‘좀 무리가 있기는 했나.’

보고 싶기는 했다. 간절히 만나기를 바라기도 했다. 자신이 이렇게 충동적으로 그녀를 찾아 겨울 바다에 뛰어들 줄은 몰랐지만.

스스로 황당함에 픽 웃는데, 담요를 찾으러 갔던 레이라가 돌아왔다.

그녀는 젖은 제 숄 대신 그에게 담요를 둘렀다. 그리고 숄은 한쪽에 걸어 말렸다.

레이라가 한숨을 폭 내쉬며 아르제오의 옆에 앉자 그가 픽 웃으며 물었다.

“이제 얌전히 앉아 있을 거야?”

“왜요? 뭔가 더 필요한가요?”

“아니. 이제 얌전히 그냥 옆에 있으라고.”

아르제오의 대답에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도 계속 담요를 제대로 둘렀는지, 숄이 말라가고 있는지, 그 옆에 펼쳐 둔 셔츠는 잘 마르고 있는지 확인했다.

“레이라.”

결국 아르제오가 손을 붙잡아 옆에 앉히고 나서야 레이라는 얌전해졌다.

“가만히 좀 있어.”

“그러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떡해요.”

“이제 괜찮아.”

괜찮다고 벌써 몇 번이나 말하는데도 레이라는 그다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근데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그것도 바다를 수영해서.”

그 차가운 바다에서 헤엄치던 아르제오를 떠올린 그녀는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말도 안 된다고는 생각하는데, 설마 리히덴에서부터 헤엄친 건 아니죠?”

“설마. 그거 이미 사람의 영역을 벗어난 거 같은데.”

“하지만 주변엔 배도 없었는걸요. 그러니까 묻는 거예요.”

“좀 독특한 방법으로 오긴 했지.”

어서 설명해 달라는 레이라의 시선에 아르제오가 픽 웃었다.

그는 턱을 괴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듣고 싶어?”

오랜만이었다. 유혹당하는 이 느낌.

레이라는 애써 동요를 감추고는 벽난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게 물어보니까 별로 안 궁금해지네요.”

“여전히 매정하네.”

“제오한테는 그런 편이죠.”

“……”

이런 가벼운 대화가 그리웠다. 게다가 생각보다 금방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리히덴을 떠날 때는 당연히 시타델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레이라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아르제오는 그녀가 자각하지 못한 채로 부르는 애칭에 심장이 거침없이 뛰었다.

“하지만…. 그러네요.”

“응? 뭐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탓에 당황해서 어쩐지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레이라는 짙은 미소를 머금으며 아르제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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