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누굴 탓할 수 있으랴, 전부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걸 안다고 해도 로이드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아직도 내가 포레스티아의 힘을 두려워한다고 여기는 건가?”
“폐하께서는 두려워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용하시고, 거슬려 하셨죠.”
“…점점 말이 거침없어지는군.”
“무례를 용서하세요. 죽을 고비를 넘기다 보니 이리되었네요.”
“죽을 고비? 무슨 죽을 고비를 또 넘겼다는 거지?”
“그게 지금 중요한가요?”
죽을 고비라는 말에 로이드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레이라를 내쫓기 위해 움직였던 그 사건 역시, 그녀에게 있어서는 죽을 고비와 마찬가지였다는 걸 모르는 듯이.
“중요하다. 폭풍우에 휩쓸린 이후,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보고를 듣지 못했으니까.”
“그 일은 제 가족에게만 전했어요. 꼭 보고를 해야 하는 사항은 아니니까요. 아니면, 죄인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명분으로 누군가를 쳐내려고 하시나요?”
“……”
무언가에 그녀를 이용하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곱게만 자라고, 안전한 곳에만 있던 레이라가 험한 일을 겪은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걱정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점점 더 가슴을 후벼 파는 통증이 일었다.
“알고자 하면 알 수 있다.”
“그러시겠죠.”
“그렇다면 그냥 그대 입으로 말하는 게 좋겠지.”
레이라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로이드를 응시했다.
이토록 그에게 냉정하게 대했던 적이 있던가.
황제의 얼굴은 지나치게 수척했다.
누가 보아도 편히 들지 못하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이제 그녀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황궁에는 엄연히 그를 보필할 황후가 있으니까.
잠시 숨을 고른 레이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밉다’는 말로 로이드를 향한 감정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저리 야윈 얼굴로 자꾸만 제 앞에 나타나는 건 마음이 불편했다.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편안할 정도로.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거죠?”
레이라는 이제 그만 본론을 얘기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할 일도 많았고, 서둘러 약초를 돌보러 섬으로 가고 싶었다.
“시타델 섬은 유배지다. 아직도 드나들고 있다지.”
“결백이 밝혀졌으니, 저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곳은 지금 유배지로 쓰이는 곳이 아닌, 그저 황실 소유의 작은 섬이죠.”
“황실 소유인 건 인지하고 있군. 그곳에 포레스티아가 멋대로 드나들고 있다는 것도 알겠고.”
“제가 머물던 집의 보수 공사를 이쪽에서 맡았으니까요. 공사를 그냥 중단했어야 했나요?”
“이제는 머물 죄인도 없으니 공사는 중단해도 상관없다.”
로이드의 대답에 레이라의 맑은 청록색 눈이 흐트러짐 없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 결백을 아시면서도 죄인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시네요.”
“……”
레이라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로이드는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잘해 보려고 하는데 자꾸만 엇나가는 것 같았다.
“…그곳에 약초를 심어서 어쩔 셈이지?”
“전 그저 그걸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뿐이에요. 돈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땅이라면 포레스티아에도 충분하다. 섬의 출입은 더 이상 두고 보지 않을 거야.”
로이드는 레이라가 무슨 일을 벌이든, 뭘 하든, 상관없었다.
그보다 그녀가 시타델 섬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음의 섬이라고 불리는 곳에 그녀를 밀어 넣은 자신을 알기에 더 그랬다.
제 잘못을 뉘우치고 있으니 레이라는 제 마음이 편안할 포레스티아에서 편안한 시간을 가지길 바랐다.
그런다면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하여.
“폐하께선, 이번엔 공작가에 저를 가두고자 하십니까?”
그래서 이어진 레이라의 질문에 로이드는 심장이 바닥에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를 가두거나, 강제하려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참담한 심정이 얼굴에 드러날까, 로이드는 마른세수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그만 가겠다.”
벌떡 몸을 일으킨 로이드가 걸음을 떼자, 레이라가 천천히 따라나섰다.
몇 걸음 가다 멈춰 선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한 가지만 말하지.”
“네, 말씀하세요.”
“앞으로 다시는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
예상치 못한 말에 레이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멈춰 선 로이드의 뒷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황궁에서 보았을 때는, 그렇게나 고집스러워 보이고 원망스러웠는데. 이제 와 보니 조금 쓸쓸해 보였다.
“당신이 불편해할 일은 하지 않겠다. 그러니…. 가끔 이리 찾아오는 것까지 너무 불편해하지 마.”
그렇게 속삭인 로이드는 도망치듯 응접실을 나섰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배웅하려던 레이라가 뒤쫓았을 땐, 이미 사라진 뒤였다.
황궁은 삭막한 곳이다. 그건 누구보다 레이라가 잘 알았다.
황후는 동생을 이용해 그를 위협했고, 그는 아주 오랜 시간 그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
노엘이 어찌 되었는지는 레이라도 이곳에 돌아와서 소식을 접했다.
로이드가 저리 냉혈한처럼 보여도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터다. 그렇다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도 없었지만.
‘…난 내 할 일을 해야지.’
잠시 멍하니 서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곧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냈다. 그리고 이내 시타델 섬으로 나서기 위해 걸음을 뗐다.
* * *
말은 그렇게 했어도, 로이드로부터 보수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출입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다만, 공사가 끝나면 이후로는 아무도 그 섬에 출입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레이라에게는 그 정도 시간이라면 충분했다.
그녀가 그 섬에서 길러 내는 약초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된다면, 더는 막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그런 레이라의 의도대로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약초는 제국 곳곳의 모든 의사가 찾게 되었다.
황실까지 약초를 얻고자 하니 그 효능은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황궁은 공작가를 견제하려는 듯, 뻔뻔한 태도로 요구했다.
황실 소유의 땅에서 키운 약초이니 당연히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그쪽 주장이었다.
꼭 그렇게 나오지 않아도 내어 줄 예정이었지만.
공사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 레이라는 리히덴에서 가져온 꽃씨를 약초밭 근처에 심었다.
연분홍 꽃이 피어나고, 그 뿌리는 약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아가씨, 그럼 이 뿌리들은 다른 약초들과 따로 둘까요?”
일이 바빠지며 레이라를 따라나선 로라가 물었다.
“응. 그건 내가 따로 관리해야 할 것 같으니까 약초들과 섞이지 않게 부탁할게.”
“예, 아가씨.”
붉은 비밀이라는 이름의 꽃. 그 꽃을 심은 곳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시타델 섬에 지어진 저택의 공사는 대부분 끝나서 이제 마무리 작업뿐이니 사람이 적었다.
그래서 섬에 있는 건, 공사를 마무리 짓는 인부 몇과 나머지는 전부 공작가 사람들이었다.
약초의 양이 늘어나면서 레이라가 홀로 감당할 수 없었으니 공작가 사람들이 나서서 일을 도왔다.
그리고 거기엔 그녀가 다시 돌아온 이후로 줄곧 떨어지지 않으려는 로라도 포함이었다.
레이라의 지시대로 꽃의 뿌리는 따로 챙기고 돌아온 로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가씨, 이제 좀 쉬시는 게 어떠세요? 벌써 오전 내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날씨가 쌀쌀한데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레이라를 보며 로라가 속상한 듯 말했다.
그 말에 이마를 소매로 문지른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잠깐 쉴까?”
“네, 제발요! 아가씨는 더 쉬셔야 해요. 저쪽 약초밭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만큼 알아서 할 테니까 아가씨는 이제 좀 쉬세요.”
간절한 로라의 눈빛에 레이라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누군가 이렇게 간곡히 쉬라고 하는 상황이 어쩐지 우스웠다.
“그럼,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
“또 해안가로 가시려고요? 날도 추운데….”
약초를 가꾸러 시타델 섬으로 올 때면, 레이라는 종종 해안가를 걸으며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이제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고 있었으니 날이 제법 매서웠다.
레이라는 한쪽에 놓아두었던 두툼한 숄을 챙기면서 말했다.
“따뜻하게 입었으니 괜찮아. 조금 걷고 올 테니까 다들 쉬고 있어.”
“예, 아가씨.”
로라는 여전히 걱정스러워했지만, 더는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레이라는 거의 완성된 커다란 저택을 힐끔 바라보고는 지나쳤다. 그리고 해안가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을 빠져나와 해안가로 나오니, 다시 아무도 없는 듯한 고요를 맛볼 수 있었다.
시끌벅적한 것도 좋았지만, 혼자서 즐기는 침묵도 퍽 마음에 들었다. 생각에 잠기기 딱 좋은 환경처럼 느껴져서.
해안가를 걸으며 레이라는 바다 쪽을 바라봤다.
‘리히덴 제국은 이쪽이던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해안가를 걸으며 공작가의 보급선을 기다리던 일이 어쩐지 멀게 느껴졌다.
배에서 내리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분해하던 헤레이스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제 가족에게는 아픈 기억이 되었겠지만, 그녀에겐 그리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섬에서 사라진 이후로는 가족들이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잘 알았다.
재회했을 때 어찌나 얼굴이 수척한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니까.
그래도 섬에서 지냈던 짧은 기간, 홀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자유는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지냈던 때보다, 아르제오와 함께 리히덴에서 지냈던 시간이 더 즐겁게 느껴졌다.
초면부터 말을 대뜸 편하게 하던 면이나, 돈 쓰는 재미라며 장사치인 척 쇼핑했던 일.
‘어쩜 그렇게 정말 상단주가 잘 어울릴 수가 있지.’
그런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황자이면서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병사들에게 쫓기면서도 그 상황이 재미있다고 웃는 사람.
그러고 보니, 함께 있을 땐 정말 많이 웃었던 것 같았다.
‘잘 지내려나….’
언제쯤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발루아 제국이 리히덴 제국과 평화협정을 맺으면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너무 먼 얘기였다.
‘난 지금 보고 싶은 건데….’
충족되지 않는 그리움에 긴 한숨을 내쉰 레이라는 해안가를 따라 쭉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길이 끊어지며 바위가 드러났다. 그 뒤로는 바다였다.
‘돌아가야지.’
철썩,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레이라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때였다.
첨벙첨벙.
파도 소리와는 묘하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마치 누군가가 수영하는 듯한.
하지만 초겨울에 바다에서 수영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이라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