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들으셨소? 그 ‘약초’ 일.”
“그럼, 들었지. 그쪽에 있는 진료소에도 전해졌다지?”
“작은 진료소도 빠트리지 않고 보냈다는 것 같더군.”
의사들이 호들갑 떨었던 그 일은 곧 시민들 사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잭의 화상이 금세 나았다지?”
“정말 효능이 뛰어나다나 봐. 의사들이 아주 심각한 얼굴로 얘기하는 거 들었어.”
“조만간 의사들끼리 만남을 가질 거라지 뭐야.”
사람들은 저마다 그 뛰어난 약초에 대한 것을 입에 담았다.
일하다가 다치거나, 감기로 앓아누운 이들. 화상, 찢어진 상처, 피멍. 하루에도 다치는 이들이 수십이었다.
그들이 진료소를 방문하여 치료를 받고, 직접 약초의 효능을 느꼈다.
환자들이 금방 나았다며 의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때마다 의사들은 약초의 효능을 실감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상처가 나았고, 몸이 회복되었다.
‘이건 엄청난 물건이야….’
의사들은 저마다 다시 한번 약초를 보내온 ‘레이라 포레스티아’의 이름에 감탄했다.
포레스티아가의 아이들은 정령의 가호를 받아 특별한 힘을 지녔다고 한다.
그저 조금 특출난 능력을 보이거나, 마법사와 비슷한 능력일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힘을 쓸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귀족들은 평민을 위하는 법을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처음 약초를 받았던 의사 모렌은 조수에게 다급히 편지를 건넸다.
“이걸 포레스티아가로 보내 주게.”
“예, 선생님.”
조수는 걸음을 서둘러 모렌이 부탁한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이 엄청난 약초를 도대체 어디에서 구한 것인지, 얼마나 더 구할 수 있는 건지, 혹시 연구를 위해 따로 내어 줄 수도 있는 건지를 물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편지들이 포레스티아 공작가로 산더미처럼 도착했다.
* * *
“이 많은 걸 언제 다 확인하지….”
잔뜩 쌓인 편지들을 본 레이라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많은 진료소로 약초들을 보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헤레이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레이라의 방 티 테이블에 산처럼 쌓인 편지를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저도 돕겠습니다.”
“고마워, 이스.”
더 미뤄 봤자 이 편지들이 줄어들지 않을 걸 알기에 두 사람은 단념하고는 편지로 손을 뻗었다.
“차를 준비할까요?”
“응, 부탁할게.”
“네, 아가씨.”
레이라가 황궁으로 떠나기 전까지 전담 하녀였던 로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방을 나섰다.
“로라가 저리 좋아하니, 누님은 이제 어디도 못 가시겠네요.”
“그러게. 어쩐지 좀 미안해질 정도야.”
하는 수 없다는 듯 웃는 얼굴이 아주 편안해 보였다.
두 사람은 먼저 편지들을 지역별로 구분했다. 그 후에는 어떤 약초들을 필요로 하는지 살폈다.
그리고 의사로서 보낸 것이 아닌, 욕심 많은 이들의 편지는 전부 곧장 처분했다. 그들에게는 보낼 약초도, 답장을 써 줄 시간도 없었다.
로라가 차를 내오고도 두 사람은 한참이나 편지를 살폈다.
“정말 전부 답장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지. 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든, 돈 신경 쓰지 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됐어.”
레이라의 부드러운 미소에 헤레이스는 저도 펜을 들었다.
“황후였던 시절에 제대로 된 구호 활동도 하지 못했으니 이제 좀 마음이 편해지겠구나.”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헤레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누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책임도 있어.”
“그렇지는…!”
반박하려는 헤레이스를 향해 레이라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펜을 움켜쥔 그의 손을 가만히 토닥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던 헤레이스는 곧 고개를 떨어트렸다.
“나중에 가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건 결국, 내 선택이었구나.”
제가 겪은 일도 아닌데, 이리 마음을 쓰는 게 그녀로서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내가 하겠다고 선택한 일이고.”
“…예, 누님.”
“좋아, 그럼 답장을 써 볼까?”
“네.”
헤레이스의 목소리가 힘이 없어서 마음이 쓰였다. 제가 괜한 얘기를 꺼냈구나, 싶은 마음에.
‘아르제오는 너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줘서….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했네.’
죄인이었다는 말에도 그럼 그냥 도망치면 될 일이 아니냐고 했었다. 큰일이 아니라는 그의 태도가 레이라는 편안했다.
‘…보고 싶네.’
쫓길 일도 없고 저를 해할 사람도 없는 보금자리에 돌아와 평온함과 동시에, 그때가 그리웠다.
아니, 그때가 아니라 어쩌면 그저 아르제오가 그리운 걸지도.
실없는 생각에 픽 웃은 레이라는 곧 펜을 움직였다.
「…아픈 이가 있다면 돈과 상관없이 치료해 줄 의사에게, 저는 기꺼이 약초를 내어 드릴 것입니다.
혹, 효능을 높이고 싶은 약초가 있거든 알려 주세요. 그것 역시 제 힘으로 가능합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보살필 의사라면, 부족함 없이 약초를 보내드리겠습니다.」
편지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 레이라는 다시 펜을 움직였다.
필요한 약초의 종류와 양을 보고서로 작성해서 보내 달라는 말을 추가하고는 편지를 끝마쳤다.
거듭 신분과 돈을 강조한 이유는, 의사들에게 그녀가 오로지 구호를 목적으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함이었다.
이 행동으로 레이라가 무언가를 얻어내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 * *
시작은 포레스티아령의 모든 진료소. 그리고 그 주변 영지와 수도에 이르기까지.
처음에는 그들이 직접 약초를 보냈지만, 시간이 지나며 다른 의사들의 요청으로 약초를 보내기 시작했다.
약초의 양이 늘어나면서 레이라는 시타델 섬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섬에서 약초를 돌보거나, 공작저에서 편지를 확인하고 답장을 쓰는 데에 썼다.
“누님.”
진료소로 보낼 답장을 작성하던 레이라는 헤레이스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편지를 살피는 일을 돕던 헤레이스가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편지를 가볍게 흔들었다.
편지에 찍힌 황궁의 인장을 확인한 레이라가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황궁의가 약초를 요청하는 편지였다.
“보내실 거죠?”
“그래야지. 황궁으로 보내는 답장은 네가 맡아 줄래?”
“그럴게요.”
헤레이스는 황궁에서 온 약초 요청서를 다른 편지들과 섞이지 않도록 따로 챙겼다.
몇 군데 더 답장을 작성한 레이라는 곧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편지들은 맡겨도 될까? 섬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혼자 가시면 안 됩니다.”
“어차피 혼자서 다 하지도 못해.”
픽 웃으며 돌아온 대답에 헤레이스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응, 다녀올게.”
편지 관리를 하던 헤레이스의 집무실을 나서며 레이라가 어깨를 주물렀다.
조금 피로했지만, 이리 바삐 지내는 게 나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면 괜한 생각을 덜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섬에서 약초를 가꾸는 일은 즐거웠다.
레이라는 그 고요함과 자연 속에 파묻힌 감각을 떠올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아가씨.”
그런 그녀를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레이라는 걸음을 멈췄다.
“저, 그게….”
그녀를 부르고는 하녀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황제 폐하께서 아가씨를 만나러 오셨어요.”
시타델에 갈 생각에 기대감 가득하던 레이라의 표정이 단숨에 활기를 잃었다.
“또 연락도 없이 들이닥치셨구나.”
“네….”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하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아. 응접실에 계시니?”
“네,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그래, 지금 갈게.”
레이라는 최근 귀족들의 초대는 물론 방문도 마다하고 있었다.
그들을 만날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괜스레 뭐라도 얻을 것이 있을까 싶어 기웃거리는 이들이었으니 거절했다.
방문하겠다고 미리 연락하면 레이나는 늘 자리에 없었고 연락 없이 찾아오면 만나 주지 않으니, 귀족들은 당연히 애가 탔다.
하지만 상대가 황제가 되니, 하녀는 차마 그렇게 둘러대지 못하고 레이라를 찾아온 것이었다.
응접실 앞에 선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가 왔음을 알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로이드를 만나는 건 축제에서 그에게 몰아붙였던 이후 오랜만이었다.
유배형을 풀겠다는 서신만 달랑 전하고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로이드를 마주하지 않아서 마음은 편했지만, 갑자기 결백을 밝히는 이유를 몰라 불편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레이라가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며 예를 갖추자 로이드가 서늘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앉지.”
“예, 폐하.”
그녀가 맞은편에 앉고, 하녀가 차를 내올 때까지도 로이드는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녀가 다시 응접실을 나선 이후에도 로이드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랜만이군.”
한참 만에 입을 연 로이드는 좀 더 다른 말을 할 줄 알았다.
자신과 더 오래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정말 그리 느끼십니까?”
“무얼 말이지?”
“정말 오랜만이라고 느끼십니까?”
“오랜만이지 않나?”
되묻는 로이드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황궁에서 지낼 적엔, 더 오랜 시간 저를 보지 않으셔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서요.”
덤덤히 돌아온 말에 로이드는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부정하고 싶지만, 고스란히 그 행동들이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하….”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쉰 로이드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애써 감정을 다잡았다.
“그보다, 요새 흥미로운 일을 벌이고 있더군.”
‘그보다’라는 말로 제 태도를 꼬집은 말을 치워 버린다. 그런 황제의 태도마저 이제 익숙했다.
레이라는 덤덤히 차를 마시고는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가 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그게 ‘제가 하는 일’이어서인가요, 아니면 제가 ‘무언가 일’을 하는 게 거슬리시는 건가요.”
“뭐…?”
“이곳은 황궁이 아닙니다. 저는 더 이상 황후가 아니고요. 아니면 아직도, 포레스티아의 힘을 견제하시는 건가요?”
마주 바라본 레이라의 시선이 이토록 차가웠던 적이 있었을까.
그가 기억하는 한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어째서 이리된 것이지….’
스스로 이런 의문을 갖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춰지지 않았다.
그저 저 시선에서 온기가 사라진 것이, 목을 죄어 오듯 숨이 막혔다.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데, 감정으로 인해서 이리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우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