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아주 오래전부터 시타델은 사형 집행지나 마찬가지였다.
사형을 면하게 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으라고 보내는 유배지였다.
죽어 마땅하나, 굳이 제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으니 알아서 죽어라.
그곳에 보내지는 건 그런 의미였다.
살아남을 수 없으니, 살아 나온 죄인도 없었다. 레이라가 특별한 사례였다.
죽일 생각은 없어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지만, 그만큼 세상과 단절된 곳으로 보낼 필요가 있었다.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힘이 예전처럼 황제를 짓누르지 못한다는 선포 같은 의미였다.
레이라는 이제 무엇 하나 로이드의 뜻대로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내어 주지 않을 거고,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을 거야.”
이어진 레이라의 말에 헤레이스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는 좋았다. 다만 상황과 상대는 그러지 못했다.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시타델 섬은 내가 가지려고 해. 유배지가 아니게 된다면 어차피 그 섬을 가꿀 수 있는 건 이 제국에 나뿐이잖니.”
황제의 뜻이 그녀가 공작가에 머무는 거라면 섬으로 돌아갈 것이다.
유배되지 않았다면 가족과 함께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다녀올 수 있는 거리.
게다가 로이드를 피할 핑곗거리로도 만들 수 있었다.
레이라가 다 비운 접시를 가져간 하녀는 곧 가볍게 식후 즐길 차를 내왔다.
“민심을 얻는 것부터 시작하자.”
찻잔을 든 레이라는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헤레이스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일이니, 결국엔 움직이게 될 터였다.
얕은 한숨을 내쉰 헤레이스도 곧 빈 접시가 사라지고 제 앞에 놓인 차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뭘 해 드리면 될까요.”
결국, 졌다는 얼굴에 레이라는 작게 웃고는 차를 머금었다.
“약초를 먼저 구해 주겠니?”
* * *
레이라는 공작 부부가 돌아온 즉시 얘기를 마쳤다.
그들 역시 그녀가 무언가를 ‘원한다’라고 뚜렷하게 드러낼 때는 말리지 못함을 알았다.
그래서 새로운 드레스니 하는 그녀의 물건들은 지금은 미뤄 두라고 데이지에게 전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렴.”
헤레이스와 함께 저택을 나서는 레이라의 손에는, 아르제오에게 받은 작은 비단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정말이지, 누굴 닮아서 저렇게 한 번 정한 일은 밀고 나가는 걸까요.”
뺨을 감싸며 중얼거리는 데이지의 말에 에드가는 도르륵 눈을 굴렸다.
“…당신을 닮지 않았소.”
“어머, 이이가.”
데이지가 눈을 흘겨 뜨자 에드가는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당신도 어서 움직이시죠.”
“그래야겠군.”
픽 웃은 에드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사라진 게이트 쪽을 힐끔거리고는 곧 돌아섰다.
* * *
레이라와 헤레이스는 작은 배를 타고 시타델 섬으로 향했다.
하루에 한 번. 섬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지만, 그 길을 다시 걷고 싶지는 않았다.
푹 젖어 발이 푹푹 빠지니 걷기 힘든 것은 둘째치고, 그저 다시 걷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리고 헤레이스도 그녀에게 다시 그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보수는 얼마나 진행됐니?”
“애초부터 보수는 느리게 진행하고 있었어요. 누님이 조금이라도 더 늦게 가셨으면 해서.”
조금 뚱한 헤레이스의 대답에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최대한 꼼꼼히, 그리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지만 조금이라도 레이라가 공작가를 떠나는 날이 늦춰지도록 천천히.
“이젠 완전히 들어가는 것도 아닌 걸 뭐.”
레이라는 섬으로 돌아가는 목적을 명확히 밝혔다. 그래야 가족들이 안심할 테니.
두 사람은 곧 섬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섰다.
레이라는 폭풍우에 휩쓸린 이후로 처음 오는 것이었다.
애써 가꾼 과일나무들과 채소밭이 다 엉망이 되었던 것이 떠올라 조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어찌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너무 처참했으니 어쩐지 보기 겁났다.
해안가에서 섬 안쪽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 그곳을 쭉 따라 올라가니 섬 안쪽이 보였다.
기껏 심어 놓았던 과일나무들과 채소밭은 흔적도 없었다.
‘이미 치운 모양이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걸 보았다면 그게 더 마음 아팠을 것 같았다.
“제법 깔끔해졌죠?”
“그러네.”
말끔히 정리된 섬은 아직 땅 복구가 덜 되었지만, 집을 짓는 쪽은 완벽히 진행되고 있었다.
일전에 죄인이 머무르던 허름한 집은 온데간데없고, 멋들어진 저택이 들어서고 있었다.
유배지에 지어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저택을 발견한 레이라는 질린 얼굴로 말한다.
“…이렇게 큰 저택을 지을 필요는….”
“있죠. 누님께서 머무르실 테니까요.”
“이제는 계속 이곳에서 지낼 게 아닌걸.”
“그것도 그렇네요.”
헤레이스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저택이 완성되는 것에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어쨌든 잠시라도 누님이 시간을 보내실 곳이니 제대로 된 곳이어야죠.”
그로서는 사실 이전에 그녀가 머물던 집이 지나치게 허름했던 거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죄인이나 머물던 먼지 쌓인 허름한 집에 레이라를 한순간도 두고 싶지 않았다.
“뭐, 이곳이 더 이상 유배지가 아니게 되면 다 같이 와서 시간을 보내도 되겠네.”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헤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보시겠어요?”
“그래.”
공사를 진행하던 인부들이 헤레이스를 발견하고는 저마다 인사를 건넸다.
그중 하나가 다가와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꼼꼼히 보고했다.
지어지고 있는 저택을 밖에서 구경한 두 사람은 공사 현장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둘러싼 숲. 모든 것을 무너뜨린 폭풍우에도 나무들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물론 멀쩡하진 않았지만.
“좀 상하긴 했네.”
눈썹을 늘어뜨린 레이라가 다가서 거대한 나무를 매만졌다.
청록빛이 스며들며 파도로 인해 상한 부분이 천천히 회복되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헤레이스도 팔을 걷어붙였다.
“이 약초들 심을 거죠?”
“아, 응. 고마워.”
레이라는 약초를 심기 전에 땅에 제힘을 조금 불어넣었다.
두 사람은 팔을 걷고 함께 약초를 심기 시작했다. 옆에서 함께 흙을 파고 약초를 심어 덮는 헤레이스를 레이라가 힐끔 바라봤다.
이렇게 누군가 옆에서 함께 식물을 만지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아르제오가 떠올랐다.
“…이스도 같이 심어 주는구나.”
“네?”
“지금까지는 무리하지 말라며 말리는 쪽이었으니까.”
헤레이스는 그녀를 따라, 준비해 온 약초를 심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라는 손을 뻗어 약초를 키웠다.
“그런데 왜 꼭 이곳인가요?”
그녀의 손길에 자라나는 약초를 지켜보던 헤레이스가 물었다.
“이곳은 특별하거든.”
“그런가요?”
“다른 어떤 곳에서 키운 것도 이곳만큼 효능을 끌어낼 수 없을 거야.”
레이라는 약초 심기를 이어가며 시타델 섬에 대해 설명했다.
“저 나무들을 봐. 이렇게까지 나무가 거대하게 자랄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일 거야.”
섬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이 그렇게까지 자라날 수 있었던 것. 그건 이 섬이 본래 가진 기운 덕분이었다.
하지만 레이라가 아니면, 그 기운을 받아 이 섬에 식물을 키워 낼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이 섬의 기운이 약초의 효능을 증폭시켜 주었다.
“그럼, 이 섬에서 기른 약초는 효능이 더 뛰어나다는 건가요?”
“더 뛰어난 정도가 아닐 거야.”
레이라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놀라울 정도일걸.”
“어찌 장담하십니까?”
“이 땅이 가진 기운은 나와 비슷해. 그러니 알지. 내가 이 기운을 받아 식물을 기르면 내 힘이 두 배로 합쳐진 것과 같아. 약초의 효능은 의사가 기겁할 정도일 거야.”
씩 입꼬리를 올리는 레이라를 보며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이런 누님의 얼굴은 오랜만에 보는군요.”
자신에 찬 미소. 더 어릴 적에는 곧잘 보였던 얼굴이었다. 헤레이스가 좋아했던 제 누님의 미소였다.
로이드를 만나고, 황궁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볼 수 없었던.
“그러니?”
“예. 지나치게 오랜만입니다.”
투정 부리는 듯한 헤레이스의 대답에 레이라는 슬쩍 시선을 떨어트렸다.
황궁에서는 웃을 일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약초를 매만지며 잠시 옛날 기억에 잠겨 있던 레이라는 곧 다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섬의 한구석에 약초를 잔뜩 심었다.
레이라는 그 약초를 빠르게 키우고는 잎을 따서 씨앗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심어 키우기를 반복하니 금세 풍성히 많은 양의 약초를 수확할 수 있었다.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내며 몸을 일으킨 헤레이스가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줄곧 쭈그리고 앉아서 약초를 심었더니 허리가 아파져 왔다. 함께 약초를 심은 레이라는 멀쩡해 보였지만.
‘제법 보람차기도 하네.’
파릇파릇하고 풍성히 자라난 약초밭을 보니 꽤 뿌듯했다.
헤레이스는 레이라가 아마도 이 기분이 좋아서 계속 식물을 가꾸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친 그가 물었다.
레이라는 약초밭과 조금 떨어진 곳의 땅을 살피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 약초들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보낼 거야.”
“의사요?”
“응, 그리고 필요한 곳에도.”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는 목에 건 비단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이스, 저택이 완성되면 어찌 활용할지는 내게 맡길 거지?”
“예? 그야 뭐…. 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시는 거죠.”
어깨를 으쓱이는 헤레이스를 보며 레이라가 기쁜 듯이 웃었다.
“저택이 어서 완성됐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기대하는 표정에 헤레이스는 마음이 놓여 그녀를 따라 웃었다.
* * *
“선생님, 잠시 와 주시겠어요?”
조수의 부름에 의학서를 읽고 있던 모렌이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급한 환자라도 방문한 것인가 싶어서 모렌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조수의 대답은 그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포레스티아 공작가에서 약초를 보내왔습니다.”
“음? 공작가에서 갑자기 약초는 왜? 무슨 약초이기에….”
의사는 진료실 앞으로 잔뜩 배달된 약초들을 살피면서도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포레스티아 공작저에서 약초를 보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서신도 함께 왔습니다. 그…. 포레스티아 공녀님이 보내신 듯합니다.”
약초를 살피던 모렌은 조수가 건네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간단한 안부를 묻는 앞부분을 대충 눈으로 훑은 모렌은 마저 읽으며 약초와 편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 이유로 이 약초들을 보냅니다.
제 이름으로 보냈으니 다른 약초들과는 다를 것을 아시겠지요.
부디 필요한 환자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