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아르제오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너도 알잖아.”
마뜩잖은 그의 태도에 루이스도 얼굴을 굳혔다.
“형님이 황제가 되면 이 제국이 어찌 될지.”
로렌스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물론 그 냉철함을 황제의 자질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잔인한 성정에 가까웠다.
거기에 로렌스에게는 기본적으로 신분 우월주의가 가치관에 박혀 있었다.
루이스는 그 우월주의가 제국 통치에 치명적일 거라고 여겼다.
제국민은 귀족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위에 신분이 와서는 안 된다고 루이스는 생각했다.
어쩌면 루이스가 더 좋은 황제가 될 터였다. 하지만 현 황제는 로렌스가 장자이고, 냉철하기까지 하니 황태자로 택했다.
황권을 굳건히 하는 데 큰 보탬이 될 거라며.
정말 제국을 위하는 건 어찌 보면 루이스였다. 아르제오 역시 그가 황위에 오른다면 성군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루이스의 편에 서면 로렌스는 두 사람 모두 죽이려 들 터였다.
그냥 이대로 로렌스가 황위에 오르면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나지 않을까.
아르제오는 그 생각으로 황태자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형님도 너무 위험한 행동은 삼가시죠.”
“아르제오.”
“전 그저, 모두가 안전하길 바랍니다.”
“어차피 이대로 우리에게 완전한 안전이란 건 없다.”
꽤 강경하게 나오는 루이스를 보며 아르제오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제게는 두 분 다 형님입니다.”
간절한 아르제오의 시선에 루이스는 한숨을 삼켰다. 너무 몰아세우는 건 좋지 않으니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네.”
“게다가 자유를 미끼로 던지시는 것도 똑같고요.”
“……”
로렌스와 같다고 하는 것에 기분이 상했는지 루이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전 아무래도 진짜 휴가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르제오는 곧 루이스를 지나쳐 걸었다.
생각보다 더 버거웠다. 이 숙소 저 숙소를 전전하며 추격대를 따돌리던 때보다, 이곳에 있는 지금이.
곧장 로렌스를 찾아간 아르제오는 지친 기색을 숨기지도 않으며 황태자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물은 로렌스는 곧장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슬쩍 아르제오를 바라봤다.
“…또 루이스가 네게 자유를 미끼로 흔들었나 보군.”
그들 형제는 서로를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사이에 낀 아르제오는 더욱 버거웠다.
“네, 형님께서 제게 하시는 것처럼요.”
“이런, 내가 네게 약속한 것도 그저 미끼로 여기는군.”
“아닙니까?”
되묻는 아르제오를 보며 로렌스가 서늘한 얼굴로 픽 웃었다.
“틀리지 않지.”
두 사람이 아르제오를 사이에 두고 같은 미끼를 흔들어 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는 속으로 한탄을 삼켰다.
그저 평범한 형제 싸움에 낀 막내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휴가는 얼마나 길면 돼?”
그리고 이렇게 한계에 다다른 아르제오에게 로렌스는 ‘진짜 휴가’를 보상으로 안겨 주었다.
아무런 감시도, 할 일도, 책임도 없는 진짜 휴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정말 편안한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것.
물론 로렌스는 아르제오가 정말 어디에서 뭘 하고 돌아오는지 몰랐다.
하지만 찰나라도 그 자유를 맛본 그는 절대 미끼를 외면할 수 없었다.
“제가 이대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실 겁니까?”
“그럴 리가 없지.”
로렌스는 확신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도 앞에 선 아르제오를 올려다보는 시선은 서늘하기만 했다.
“넌 루이스를 아끼니까.”
“제겐 두 형님 모두 똑같습니다.”
“하지만 날 위해 움직이고 있으니 루이스에게 부채감이 더 크겠지.”
“……”
“원하는 만큼 쉬고 와라. 너무 오래는 안 돼. 적당히 쉬고 돌아와.”
“…예, 전하.”
“어느 정도가 적당히인지는 알아서 정하고.”
“배려 감사합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아르제오는 곧 로렌스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에게 한계가 왔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유진은, 아르제오가 짐을 챙겨 나서는 걸 발견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따라붙으며 말했다.
“이번엔 어디로 가십니까?”
“또 따라오려고? 역시 넌 형님이 붙인 감시역인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애초에, 저처럼 유능한 사람이 황태자 전하 사람이었으면 다른 일을 하고 있었겠죠.”
“하지만 맥은 뛰어난 부관이야.”
“그리고 뛰어난 저는 전하 부관이고요.”
웬일로 한마디도 지지 않는 유진을 힐끔거리며 아르제오가 픽 웃었다.
“마탑으로 갈 거야.”
“예, 따르겠습니다.”
만족스럽게 웃은 유진은 당연하다는 듯 아르제오를 따라나섰다.
* * *
예정대로 이루어진 포레스티아 영지의 축제에, 레이라는 어렵게 함께 발루아 제국으로 넘어온 상단 사람들을 찾았다.
“레이라 씨! 다시 보니까 또 반갑네요!”
축제로 떠들썩한 거리에서 레이라를 발견한 딘이 힘껏 손을 흔들었다.
사람을 보내 미리 약속을 잡은 덕분에 혼잡한 거리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촐랑거리지 마.”
제롬은 붕붕 팔을 흔들어대는 딘을 제어하며 레이라에게 가볍게 눈인사했다.
“잘들 지냈나요?”
어쩐지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그들을 보니 리히덴에서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폭풍우에 휩쓸려 떠내려갔던 일을 추억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스웠지만.
“그럼요! 레이라 씨는요? 포레스티아령은 여전히 좋네요! 축제 기간에 딱 맞춰 와서 너무 다행이죠!”
한쪽 손에는 잔뜩 먹거리를 챙긴 딘이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며 말했다.
“딘, 제발.”
제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그런 딘을 바라봤다.
“저도 잘 지냈어요. 포레스티아령은 제 고향이니까요.”
“고향은 늘 좋은 법이죠!”
딘이 생글생글 웃으며 어서 가자며 레이라를 재촉했다.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나요?”
“저희는 축제 기간이 지나면 수도로 갈 겁니다. 거기서 볼일이 끝나면 그다음에는 바다를 건너 로넨 왕국을 시작으로 근처 나라들을 돌죠. 멋지죠?”
“정말 멋지네요.”
레이라는 한껏 부러운 얼굴로 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자신에게는 앞으로도 허락되지 않을 얘기니까.
“계속 이 포레스티아령에 계실 거죠? 다음에 또 이곳을 방문할 때도 같이 축제를 구경하고 싶습니다!”
딘이 마냥 해맑은 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레이라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가능하다면요.”
아마 1년에서 2년쯤 뒤면 또 이곳에 올 수 있을 거라며 딘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들은 함께 주변을 구경하며 걷다가 인형극을 한다는 쪽으로 향했다.
멀리서 극단이 왔다고 하더니, 인형극 뒤에는 연극을 할 거라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모이는 인파에 레이라가 조금씩 밀쳐지는데, 돌연 커다란 손 하나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레이라 씨? 어? 어디 계세요?”
뒤늦게 그녀와 떨어진 것을 눈치챈 딘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크게 레이라를 불렀다.
인파가 너무 몰린 탓에 제롬은 이곳에서 그녀를 찾기는 어려울 거라며 딘을 한적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근처에서 딘과 제롬을 부르지 못하고 붙잡힌 레이라는 있는 힘껏 제 입을 막은 손을 떼어 냈다.
“이게 무슨…!”
화를 낼 심산으로 돌아본 레이라는 곧 방울처럼 눈을 크게 떴다.
“폐….”
“쉿. 이곳에서 그 호칭은 좋지 않다.”
살포시 입술을 매만지는 손길에 레이라는 제 입을 틀어막고는 한걸음 물러섰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상황이 상황인지라 레이라는 슬쩍 주변을 훑고 물었다. 예를 갖추었다가는 더욱 눈에 띌 터였다.
“축제를 구경한다기에 왔더니, 외간 남자들과 있더군.”
“낯선 땅에서 무사히 제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감사해야 할 것을 그냥 보냈군.”
로이드는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딘과 제롬이 사라진 방향을 힐끔거렸다.
“폐하께서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가에서 사례했으니까요.”
“그 호칭은 좋지 않다고 했는데.”
“달리 무어라 부른단 말입니까?”
레이라가 덤덤히 되물으니 로이드는 입매를 굳히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선 무슨 말을 해도 미친놈이 되겠군.’
순간 제 머리를 스쳐 간 호칭 몇 가지에 로이드는 절로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부르는 건….”
“안 됩니다.”
그나마 제일 괜찮아 보이는 답변을 고른 로이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머쓱한 얼굴로 다른 호칭을 궁리하는 로이드를 잠시 바라보던 레이라는 다시 슬쩍 주변을 살폈다.
“축제를 보러 오셨으니 편히 둘러보세요. 제가 밖을 돌아다니는 것이 신경 쓰이시는 거라면, 지금 당장 공작가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래로 향한 시선. 눈을 마주치지 않으니 레이라는 로이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이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 시선을 떨어트린 거지만.
허리를 숙인 레이라가 그대로 몸을 돌리려 하니 로이드가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
그러더니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일전의 얘기를 마무리 지어 볼까 하고 왔다.”
“이런 곳에서요?”
“이런 곳이면 당신이 좀 더 너그러울까 싶어서.”
되레 뻔뻔한 태도로 나오는 로이드가 당황스러웠다.
제가 너그러울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가 명령을 내리면 따를 뿐인 것을.
레이라가 아무 말도 없이 빤히 그를 응시하기만 하자, 로이드는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모진 말은 너무도 쉽게 뱉었다. 그런데 막상 정말 원하는 것을, 진짜 속마음을 입에 담는 건 너무나도 어려웠다.
“당신이….”
몹시 어렵게 입을 뗀 로이드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폐하.”
그리고 막 입을 떼려는데, 골목으로 익숙한 기사가 다가왔다. 황궁에 있을 적에도 보았던 로이드의 호위 기사.
기사는 레이라를 힐끔거리더니 이내 로이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만 가셔야 합니다.”
호위 기사의 말에 로이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하고 싶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야 한다는 호위 기사를 앞에 세워 두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로이드는 곧 평소의 싸늘하고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저쪽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라. 나만 이곳에 있는 거라면 문제 될 것도 없을 테니.”
“폐하,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겁니다.”
“곧 돌아가지. 먼저 움직여.”
더 이상 반론을 받지 않겠다는 차가운 눈빛에 기사는 고개를 떨궜다.
홱 돌아 기사가 사라지니 로이드는 다시 레이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실례하지.”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로이드는 그녀의 손목을 붙들고 걸음을 뗐다.
골목골목을 복잡하게 헤집은 로이드는 레이라를 어느 작은 문을 통해 이끌었다.
축제가 한창인 거리였는데, 그 문과 허름한 건물 하나를 지나니 곧 공작가 근처의 숲이었다.
아무도 없는 주변을 훑은 로이드는 레이라의 손목을 살포시 놓아주며 말했다.
“레이라, 당신이 시타델 섬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