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내내 황궁에만 있다가, 그다음에는 유배지에만 있었을 텐데 어찌 아느냐는 뜻이다.”
“그렇죠. 황궁에서도, 유배지에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지냈으니까요.”
로이드는 레이라를 가뒀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인 직후 태도를 바꿨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건, 제 궁의 정원이 전부였다.
사교 활동도 황후의 의무도 권력도. 모든 것을 빼앗고 궁에 가뒀다.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야만 평화로 이어진다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그의 어미는 평화롭지 못했으므로.
많은 권력을 가진 이는 위험에 노출되는 법이었다. 그 권력을 탐내는 이도 많고.
주변에서 가만두질 않으니 시달리다가 결국엔 일찍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어미의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이 노엘의 어미였다.
남에게 보여지는 것에 집착했고, 권력에 집착했다.
아직 어린 로이드를 적대시한 건 물론, 학대까지 개의치 않았다.
노엘은 천성이 여리고 선했지만, 그렇기에 제 어미를 버리지 못할 터였다.
그러니 황위를 이은 것이 노엘이었으면 로이드는 분명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리라.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그 아이가 사라져야만 했다. 그래야 목숨을 위협받지 않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선택이었다고 수천 번을 되뇌어도, 로이드는 잠들 수 없었다.
“폐하.”
레이라의 나지막한 부름에 로이드는 머릿속을 지배하던 과거의 기억을 떨쳐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예전 같았으면 여기에 몇 마디 더 따라왔을 터였다.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건강은 괜찮은지, 지금 좀 쉬면 어떻겠냐는 말까지.
하지만 지금의 레이라는 그 당연하게 뒤따라오던 걱정 어린 말들을 해 주지는 않았다.
그게 씁쓸해서 로이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라는 건가.”
“제가 감히 폐하께 어찌 그러겠어요. 하지만 무리하고 계시는 거라면 쉬시는 게 나을 것 같아 말씀드리는 거예요.”
“지금 이게 쉬는 거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황궁의 그 어디에도, 로이드가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줄곧 편히 잠들지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이렇게 레이라를 마주하고 있는 시간이 평온했다.
제대로 살아서 눈앞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안심되었다.
섬이 그 지경이 되어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던 때에 비하면.
“쉬시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그런 로이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레이라는 덤덤히 말했다.
“요점을 알 수 없는 말씀만 하고 계시고요.”
“……”
“제가 어찌하길 바라세요?”
그 질문에 로이드는 덥석 제게 돌아와 달라고 말할 뻔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던 그는 다시 입을 꾹 닫았다.
원하는 것을 곧장 입에 담는 건 로이드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도 솔직하지 못한 성격인데, 직감적으로 지금 입에 담아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이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지. 오늘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것 같으니.”
“원하는 대답이 뭔지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말하면 들어줄 텐가?”
“장담할 수는 없네요.”
“거봐. 그러니 오늘은 그만두겠다는 거다.”
로이드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따라 일어서 예를 갖추는 레이라를 가만히 응시했다.
“섬으로 돌아가는 일은, 더 깊게 생각해 봐라.”
“제가 어찌 생각한들, 폐하의 명을 따를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명을 따를 거라는 레이라의 말이, 로이드는 어쩐지 거슬렸다.
명령을 따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제 곁으로 돌아오란 명령에는 고개를 저을 것이기에.
“…다음에 다시 오겠다.”
로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뗐다.
제가 다시 와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까지는 공작가에 머무르라는 말을 덧붙이며.
그렇게 된다면 이 이야기가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레이라가 섬으로 돌아가지 않을 터였다.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아도 시간을 끌기에는 딱 좋았다.
로이드는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레이라의 배웅을 받으며 공작가를 나섰다.
* * *
황궁으로 돌아온 로이드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정무를 볼 수 있었다.
세실은 드물게 평온한 로이드를 보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보다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밀린 서류를 처리하니 그럴 만도 했다.
급한 안건들을 처리한 세실은 곧 황제의 집무실을 떠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시종이 엘라의 방문을 알렸다.
“들라.”
로이드의 나지막한 허락에 엘라가 수줍은 얼굴로 들어섰다.
“폐하, 또 무리를 하고 계시지요? 잠시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떠세요?”
알랑거리는 목소리에 로이드는 무심히 시선을 던졌다. 레이라를 만나고 돌아온 이후로 몸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이후로는 다시 예전 황후궁의 정원을 찾았다.
레이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로는 차마 찾아가지 못했던, 유일한 안식을 느꼈던 곳.
하지만 그녀를 찾았으니 다시 그곳 정원에 낮잠을 청하러 갔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정원의 딱딱한 벤치에서 낮잠을 잔다니.
다른 이들이 알면 놀라 나자빠질 일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로이드의 상태는 퍽 나아졌다.
딱히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차를 보면 자연스럽게 레이라가 떠올랐다.
그러니 로이드는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지.”
황제궁 후원으로 나선 두 사람은 화려한 티테이블에 앉았다.
뒤따르던 시녀가 발 빠르게 향긋한 차와, 함께 곁들일 폭신한 케이크를 내왔다.
로이드는 그다지 단 것을 즐기지 않았지만, 레이라는 나름 단 것을 즐겼다.
눈앞에 앉은 엘라가 기쁜 듯이 포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걸 본 그는 여자들은 다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건가, 생각했다.
“차향이 아주 좋습니다, 폐하.”
그 말에 로이드는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향은 그녀의 말처럼 그리 좋지는 않았다.
자꾸만 레이라가 내어 주던 꽃차의 향이 그리워졌다.
한 번 그립고 나니, 어쩐지 앞에 앉은 엘라를 보고 싶지가 않았다.
“폐하, 국경에 다녀오신 일은 어찌 되셨나요?”
눈매를 곱게 접으며 엘라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 내용에 로이드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국경에 다녀온다고 전한 기억은 없는데.”
“아, 그, 그게…. 폐하를 뵙고자 찾아왔다가 자리를 비우셨다고 들어서요. 처리하실 일이 있어 국경까지 가셨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제 잘못이 없음을 변명하며 은근슬쩍 대답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로이드는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리며 엘라를 바라보았다.
그리 대대적으로 병사들을 움직여 수색했으니, 레이라가 사라졌던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절대 끝내지 않을 것 같은 수색이 끝났다. 거기에 로이드가 갑자기 포레스티아령을 다녀오기까지.
엘라가 무엇을 짐작하고 떠보듯 묻는 건지 로이드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여인들은 대부분 비슷할 터다. 로이드가 지금껏 보아온 사람들이 그랬다. 단 한 사람, 레이라를 제외하고.
엘라는 지금 레이라의 안위를 걱정해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레이라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까 묻는 것이었다.
감추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로이드에게는 빤히 보였다.
그리고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니 더는 마주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엘라는 이 삭막한 황궁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휴식을 취하고 돌아왔는데 또 이런 사람을 마주하고 있자니 숨통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다시 피로가 쌓이는 것 같아서 로이드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놀란 엘라가 따라 몸을 일으켰지만, 로이드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차를 마실 기분이 아니다.”
“하오나, 폐하….”
“그만. 혼자 있겠다.”
붙잡으려는 엘라를 등진 로이드는 그 길로 레이라의 황후궁 후원을 찾았다.
홀로 휴식을 취하러 사라진 로이드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엘라도 곧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제 궁으로 돌아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홀든 후작가에서는 어서 후사를 봐야 한다며 성화였다.
네가 더 잘한다면 될 일이 아니냐, 제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다니, 못난 것.
‘누가! 누가 못났다는 거야! 여기까지 온 게 누구 덕인데!’
홀든 후작의 말을 떠올리며 엘라는 더욱 분노에 휩싸였다.
‘저리 찬 바람이 쌩쌩 부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이럴 거면 자신을 도대체 왜 황후로 들인 것인가. 이렇게 병풍처럼 세워만 둘 거라면, 도대체 왜 황후로 만들었냔 말이다.
게다가 죽었을 거라 생각한 레이라가 살아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울화가 치미는데, 로이드가 국경까지 직접 다녀왔다.
‘만나고 온 거겠지.’
이제 와서 그녀를 만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냥 죽어 버리지 왜 살아 돌아와서는. 폭풍우에 휩쓸렸는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움켜쥔 주먹을 바들거리고 떨던 엘라는 곧 길게 숨을 뱉었다.
‘아니야, 그 여자는 다시 시타델 섬으로 들어갈 거니까.’
레이라는 다시 그 죽음의 섬으로 들어갈 터였다. 죄인인 사실에 변함은 없을 거라고, 홀든 후작이 말했다.
그 말 만을 되새기며 엘라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 * *
“더 제국을 둘러보지 않아도 되는 건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아르제오가 땀을 닦으며 돌아보았다.
“당분간 휴가를 주셔서요.”
“휴가에 여기서 훈련? 너도 세상 참 재미없게 사는구나.”
픽 웃는 루이스를 보며 아르제오는 살짝 시선을 떨궜다.
“글쎄요, 전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무미건조한 아르제오의 대답에 루이스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이 모든 상황을 비틀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아직도 자유를 원해?”
“제가 원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르제오는 늘 자유를 원했다. 황위를 두고 벌이는 싸움도, 귀족들의 속살거림도. 권력도 명예도, 제국의 번영조차 뒤로 하고 온전히 손에 쥘 자유.
“형님이 정말 네게 그 자유를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이어진 물음에 아르제오는 입을 굳게 닫았다.
황태자, 로렌스가 황위에 오른다면 정말 자신에게 자유를 줄지. 아르제오는 빈말로도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 로렌스는 그저 자신을 위해 움직여 줄 말로, 자유라는 미끼를 흔들며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건 루이스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네가 원하는 자유를 줄 확률은, 형님보다는 내가 더 높지 않나?”
“……”
“네가 얼마나 자유를 원하는지는 잘 알지. 그걸 꼭 형님에게서 받을 필요는 없잖아.”
어쩜 형제들이 이리도 닮아 있나 싶었다.
“내가 네게, 자유를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