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39)화 (39/122)

<39화>

‘왜 이렇게 얼굴이 수척하실까.’

눈을 마주치고 제일 처음 든 생각이었다.

‘일이 많이 힘드신가.’

예전처럼 잠도 잘 못 자고 정무를 보는 건가 싶었다.

“…살아 있었군.”

한참 만에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레이라는 조용히 물었다.

“실망하셨나요?”

“……”

“걱정하지 않으셔도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시타델 섬으로 돌아갈 거예요.”

“보수가 끝나기 전까지는 이곳에 머문다지.”

“공작저에 머물면서도 죽은 듯이 지내겠습니다. 그러니 이리 찾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그대가 무서워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폐하께서 절 두려워하실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

로이드는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레이라를 응시했다.

그녀는 늘 이랬다. 초연한 얼굴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쥐여 주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가둬도. 매일 혼자 두든, 사랑해 주지 않든. 누명을 씌워 죽음의 섬으로 내몰든.

자신이 내몰리면서까지 가족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마지막 인사라고 여겼을 때도, 로이드에게 건강 잘 챙기라고 했던 사람.

“…하.”

어째서 놓을 수 있었을까. 이런 그녀를.

한숨을 내쉰 로이드는 제 이마를 짚으며 슬쩍 눈가를 가렸다.

삭막한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정원이든, 허름한 집이든 상관없으니 레이라와 같은 곳에 있고 싶었다.

“폐하, 어딘가 불편하십니까?”

어쩌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홀든 후작가를 흡수하는 방법은 더 있었을 텐데.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레이라는 걱정스러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어찌 사람이 이리도 물러. 내가 제게 어떻게 했는데 걱정을 하는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파고들 틈이었다.

그게 얼마나 작은 틈이든, 한 줄기 빛이 겨우 스며들 정도여도. 그 틈이 있다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잠을….”

눈가를 덮었던 손을 슬쩍 내리며 로이드가 처연한 얼굴로 레이라를 마주했다.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원래도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었다. 평소에도 잠 못 드는 일이 많았던 것을 떠올린 레이라는 속으로 수긍했다.

설마 그가 자신이 사라진 걸 신경 써서 수척해졌을 리가 없다고. 잠깐이라도 혹시나 했던 것이 우스웠다.

“그대가 내어 주는 차를 마시면 잘 수 있을 것 같군.”

하지만 이어진 로이드의 말에 레이라는 살짝 표정을 굳혔다.

정말이지 그는 조금도 자신을 위하지 않는구나, 하고 느꼈다.

그랬다면 자신에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레이라는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려 로이드의 시선을 외면했다.

“제가 폐하께 차를 내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들었을 줄 알고 드시겠다고 하십니까?”

황궁에서 쫓겨나던 때,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레이라가 늘 정성 들여 길러 선물하던 찻잎에 독을 넣어 모함했다.

한데 이제 와서 차를 내어 달라니.

“그런 게….”

로이드는 제 말실수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한 짓은 까맣게 잊고 예전에 레이라가 내어 주던 차가 생각나 한 말이었다.

엘라가 차를 내와도, 그 누구와 차를 마셔도 레이라가 떠올랐다.

‘뻔뻔하기도 하지.’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뻔뻔하면 어떠한가. 자신은 레이라를 필요로 했다.

“그럼 차는 됐다.”

“알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답하는 레이라의 표정이 어쩐지 차갑게 느껴졌다. 그걸 보니 또 마음이 저릿해서 로이드는 한 걸음 물러났다.

“시타델 섬으로 돌아갈지에 대한 여부는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네?”

“내일 다시 오겠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긴 로이드는 그대로 응접실을 나섰다.

남겨진 레이라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황제는 제게 이제껏 어디에 있었냐고 묻지도 않았다.

게다가 시타델 섬으로 돌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데, 그 여부에 관해 얘기하겠다니.

‘왜 지금 얘기하지 않고 내일 또 오겠다는 걸까.’

아마 로이드가 이곳에 더 머물렀다면 레이라는 주저 없이 그걸 물었을 터였다. 그걸 아니 로이드도 재빨리 돌아간 것이다.

텅 빈 응접실에 멍하니 선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이드를 마주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다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고, 이미 그를 향한 어떤 마음도 없었다.

그 어떠한 기대도, 미움도 없었다.

‘이미 지난 일인걸.’

미움에 사로잡혀 제 마음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아주 잠깐의 만남이었는데도 어쩐지 피로했다.

응접실을 짧게 훑은 레이라는 곧 등을 돌려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침대에 누워 작은 비단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타냐 지역에서 얻은 꽃씨와 온실에서 가져온 약초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주머니 겉으로 씨앗 모양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차라리 빨리 시타델 섬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면, 조금은 이 마음이 덜 할까 하여.

씨앗 주머니를 손에 꼭 쥔 채 레이라는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생각보다 보고 싶네.”

나지막이 울려 퍼진 목소리는 홀로 방안을 배회하다 흩어졌다.

* * *

다음 날, 로이드는 정말로 또다시 포레스티아 공작저를 찾았다.

수도에서 국경까지 텔레포트를 이용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듯이.

응접실로 트롤리를 밀고 들어오는 하녀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야 귀족들 시중을 드는 일은 이제 익숙했지만, 설마 황제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탓이다.

하녀는 조금 뻣뻣한 움직임으로 차와 다과를 테이블에 세팅하고는 재빨리 응접실을 나섰다.

로이드는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하녀가 내온 차를 응시했다.

당연하게도, 레이라는 직접 차를 내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서는 그녀가 해 주던 꽃차가 다시 맛보고 싶었다.

여전히 통 잠을 못 자고, 그 때문에 두통을 달고 살았으니.

늘 곁에 머물 때는 당연했던 그녀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몰랐다.

하지만 사라지고 나니 너무나도 간절해졌다.

마치 보기 싫다고 빼낸 작은 돌 때문에,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탑과 같았다.

레이라가 사라지니 자신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저번처럼 차 얘기를 함부로 꺼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라는 가만히 맞은편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이드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니 그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용건이 있는 건 로이드 쪽이었으니.

“…섬의 보수가 끝나면.”

결국 침묵을 견디다 못해 입을 연 건 로이드였다.

“다시 시타델 섬으로 돌아갈 건가?”

“그래야죠.”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가 강조하듯이 덧붙였다.

“그래야 폐하께서 공작가를 지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

그 말에 로이드는 잠시 입을 닫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파고들 틈이 있을 거라 여겼는데, 입을 여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녀가 저를 안타까이 여기면 돌아봐 주지 않을까, 그런 안일한 생각이 우스워졌다.

로이드는 매번 이렇게 입을 닫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몰랐다.

‘진짜 속마음’이란 것은 제일 깊숙이 숨겨 두고 아무도 볼 수 없게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침묵 따위, 로이드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껏 어떤 것을 견뎌왔는데, 고작 침묵이 힘들단 말인가.

하지만 그 상대가 레이라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이제는 그녀가 다가와 주지 않았다.

특유의 차분한 표정과 상냥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게 낯설어서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이었다.

“그건, 돌아가지 않아도 공작가에 손대지 않겠다고 한다면 시타델 섬으로 가지 않겠다는 뜻인가?”

한참 만에 돌아온 질문이 레이라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가 시타델 섬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 신경 쓰여 이러시는 건가, 싶었다. 질문의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섬으로 가 혼자 조용히 살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미 벌을 내리셨습니다.”

“…선처하겠다고 한다면?”

“폐하.”

자꾸만 돌아오는 질문에 레이라의 음성이 살짝 낮아졌다.

그 부름에 로이드는 손끝이 굳어지듯 힘이 들어갔다.

“어째서 그런 것들을 물으십니까?”

“……”

“없는 죄까지 만들어 일을 이리 만드셨을 때, 제가 얌전히 가는 대신 공작가는 그냥 두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섬에 돌아가지 않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설마 그걸 빌미로 이 국경을 손에 넣으시려고요?”

쏟아지는 말들에 로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자신은 그런 사람이다.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른다.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움직이고, 손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었다.

이제껏 제가 가진 것 중에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제게 ‘안식’과 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하지만 로이드는 지난날, 잠 못 이루던 황궁에서 우연히 찾은 레이라의 정원에서 안식을 느꼈다.

이 따스함이 분명, 제게 안식일 거라고.

그 삭막하고 매 순간 목에 칼이 들이 밀어진 것 같은 황궁에서 그녀만이 제게 평화일 거라고.

매정히 버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늘 제게 직접 내어 주던 차는 잠 못 이루는 자신을 위해서였다고.

로이드는 이 감정들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날 것만 같아서 얼굴을 문질렀다.

마른세수를 하는 그를 레이라는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내가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여기는군.”

“아닌가요?”

“……”

로이드는 곧장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도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

다만 그 준비는 레이라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전부 멈춰 버렸다.

이를 알 리가 없는 레이라는 그가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리히덴 사람은 국경에 접근도 못 한다고 말할 정도니까.

“리히덴 제국과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큰 피해를 보는 건 포레스티아 영지민이죠. 그러니 당연하게도, 저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요.”

“당신이 섬으로 돌아가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닐 텐데.”

“저와의 약속을 어기시겠다는 뜻인가요?”

“상황이 어찌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리히덴에서 먼저 공격할 리는 없죠.”

레이라는 확신하듯이 말했다.

리히덴을 둘러본 시간은 짧았지만, 그런데도 알 수 있을 만큼 그곳은 병들어 있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로이드가 조금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의 표정에 레이라는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던 한숨을 삼켰다. 그러고는 똑바로 로이드를 응시하며 입을 뗐다.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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