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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38)화 (38/122)

<38화>

* * *

집을 떠난 것이 언제였지. 얼마나 자리를 비웠더라.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오랜만일 터였다. 황태자비가 되어 황궁으로 갔을 때부터, 공작저에는 잘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숲을 빠져나온 기사는 레이라를 몰래 공작저로 안내했다. 익숙한 그녀의 방까지 바래다준 뒤, 가족들을 불러오겠다며 사라졌다.

레이라는 얌전히 제 방을 둘러보았다. 비운 지 한참이나 되었을 텐데 먼지 한 톨 없다.

쾅!

기사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세상에…!”

차마 방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포레스티아 공작 부인이 부들부들 떨었다.

가녀린 손이 떨리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눈에는 금세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레이라…!”

그런 공작부인을 지나쳐 공작이 뛰쳐 들어와 레이라를 품에 안았다.

“무사했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아버지, 어머니,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너만, 너만 무사하면 우리는….”

포레스티아 공작이 놓치지 않으려는 듯 레이라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뒤늦게 휘청거리며 다가선 공작 부인도 함께 그녀를 안았다.

부둥켜안은 두 사람이 자꾸만 눈물을 퐁퐁 쏟아 내서, 레이라마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들 부부보다 조금 늦게 소식을 접한 헤레이스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누님…!”

잠을 못 잔 것인지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그러고 보니 공작 부부의 얼굴도. 피부도 거칠고 핼쑥해져 있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 계셨던 겁니까…!”

달려온 헤레이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레이라의 손을 움켜잡았다.

제 가족들의 상한 얼굴을 보자니 마음이 짓눌린 듯이 아팠다. 그녀는 거칠어진 헤레이스의 뺨을 매만졌다.

“다 얘기할게요. 어떻게 된 일인지.”

할 얘기가 많다는 레이라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울먹이는 세 사람은 그녀를 놓아줄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이나 눈물을 쏟아 내고 나서야 세 사람은 진정할 수 있었다.

포레스티아 공작가는 레이라가 돌아온 덕에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다만 함부로 떠들 수는 없어서 일부에게만 알렸다.

집사는 레이라의 방으로 차와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그리고 그제야 레이라는 조금 차분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레이라는 차근차근 순서대로 얘기했다.

폭풍우가 몰아친 밤, 파도에 휩쓸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히덴 제국이었던 일.

그곳에서 우연히 아르제오를 만나 도움을 받아서 무사히 발루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까지.

“그런 일이….”

공작 부인, 데이지는 얼마나 고생했냐며 또 눈시울을 붉혔다.

“레이라, 혹시 그 사람이 공작가에 빚을 받으러 오거든, 이 애비는 무엇이든 해 줄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네 생명의 은인이시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니.”

단호한 제 아비를 보며 레이라는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포근함을 느껴 본 것이 얼마 만인지.

그토록 그리웠던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그저 행복했다.

“…이스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수색을 하고 있었다는 건, 폐하께서도 제가 사라졌다는 걸 아시겠죠.”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로, 그녀가 덤덤히 물었다.

“아신다. 수색에 도움도 주셨어.”

레이라의 손을 꼭 붙든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니 혹시, 널 유배지로 다시 돌려보내지 않으실지도 몰라. 그 뒷말은 삼켰다.

“폐하께 제가 돌아온 걸 알리면, 전 다시 유배지로 돌아가야 해요.”

“하지만, 누님….”

“돌아가고 싶어. 파도에 식물들이 다 떠밀려 갔을 테니 다시 가꿔야지.”

레이라의 대답에 세 사람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시타델 섬은 지금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입니다. 누님께서 다시 가시겠다고 해도, 보수가 필요하니 당분간은 이곳에 머무르셔야 해요.”

“그래? 그건 기쁜 소식이네.”

공작저에 더 머무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조용한 시타델 섬도 나름 괜찮았지만, 그곳엔 사랑하는 가족이 없으니.

“일단 오늘은 푹 쉬세요. 내일 제가 황궁에 다녀오겠습니다.”

“부탁할게, 이스.”

헤레이스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공작 부부도 함께 나섰다. 피곤해 보이니 저녁 전까지는 푹 쉬라며.

레이라는 터벅터벅 걸어가 익숙한 제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부드러운 촉감과 넓은 침대. 호화로웠지만, 어딘지 허전했다.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출발 전에 다시 싱그럽게 피운 약초를 필이 확인했을까.

유진은 여전히 아르제오와 함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유진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결국 레벤의 씨앗은 찾지 못했네.’

혹시 그것 때문에 지금도 분해하고 있을까.

승부욕을 자극하는 말을 하면 곧장 반응을 보이던 그가 떠올라 어쩐지 웃음이 났다.

빙글 돌아누운 레이라는 제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너무 커지기 전에 돌아와서 다행이야.’

리히덴 제국에 더 오래 머물며 아르제오와 함께 있었다면, 분명 이 마음은 더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저 이렇게 조금의 그리움으로 남길 수 있을 터였다.

‘조금만…. 쉬어야겠다.’

느리게 눈꺼풀을 깜박이던 레이라는 이내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폭신한 제 침대와 포근한 가족 품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 * *

“입이 있으면 말해 봐.”

“……”

“어째서 찾지 못하는 것이냐, 어째서!”

“폐하, 고정하시지요. 공녀님을 찾는 일은….”

세실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노려보는 로이드의 눈빛이 어찌나 살벌한지, 한 발만 잘못 내디뎌도 낭떠러지로 내던져질 것만 같았다.

레이라가 사라진 걸 안 뒤로 온 제국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사실 수색하는 병사들도, 지시를 내리는 이도, 황제에게 보고를 하는 세실도 이미 죽었으리라 여겼다.

섬이 그렇게 엉망이 될 정도의 파도인데, 어찌 사람이 살아남았겠는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진 않겠지.’

그대로 도망쳤을 테지,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제국 내에서 찾을 수 없다면 국외를 수색해.”

“폐하, 그건….”

“그만 물러가라. 포레스티아 공자가 알현하러 오겠다는 보고를 받았다. 곧 올 테니 넌 그만 가 봐.”

“…예, 폐하.”

세실은 참담한 얼굴로 한숨을 삼키며 물러났다.

부관이 물러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시종이 헤레이스가 왔음을 알렸다.

로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헤레이스가 알현실로 들어섰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오늘은 예의를 아는군. 무슨 일로 왔지?”

“누님을 찾던 일로 보고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덤덤한 표정으로 꺼낸 말에 로이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님은….”

“말해 두겠는데, 시신이라도 발견되기 전까지는 절대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어쩐지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로이드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헤레이스는 되려 얼굴을 굳혔다.

시신이라니. 어찌 저리도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애초부터 그가 레이라에게 누명을 씌워 죽음의 섬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일이다.

주먹을 움켜쥔 헤레이스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유지했다.

“…시신으로 발견되기를 바라셨습니까?”

“뭐?”

“폐하께는 죄송한 일이 되었습니다만, 누님을 찾았습니다.”

“찾았다고…?”

서늘하기만 하던 시선에 동요가 드리웠다.

“예. 곧장 시타델 섬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셨지만, 지금 그곳은 사람이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보수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공작저에 머무르도록 윤허하여 주십시오.”

로이드는 이마를 짚으며 애써 제 동요를 감췄다.

“그녀의 처분은 후에 다시 결정하겠다. 일단은 공작저에 머무르게 하라.”

“감사합니다, 폐하.”

“…이만 물러가라.”

황제의 축객령에 헤레이스는 정중히 예를 갖춘 후 망설임 없이 알현실을 벗어났다.

홀로 남은 로이드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살아 있다.’

무사하다는 그 보고가 지금껏 꽉 틀어쥐고 있던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다. 지금이라면 조금은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보고만으로는 부족해.’

곧 로이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 * *

마치 황궁으로 들어서기 전, 아니 로이드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레이라는 공작가 정원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타델 섬의 보수가 끝나기 전까지는 공작저에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으니.

다만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줄곧 옆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로라였다.

“일단은 시타델 섬의 보수가 끝나기 전에는 계속 공작저에 있을 거니까…. 가서 일해도 돼, 로라.”

“안 돼요, 아가씨. 그냥 이대로 이곳에 계속 계시면 안 돼요?”

헤레이스가 공작가 기사들을 이끌고 수색을 시작한 뒤로부터 어찌나 걱정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공작저로 돌아온 이후부터 로라는 줄곧 울먹이며 레이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팔을 걷어붙이고 정원에 손을 뻗었다.

“잘 관리하고 있었나 보네.”

“그럼요! 아가씨가 정원을 좋아하셨으니까요.”

레이라가 손을 뻗어 흙을 매만지니 정원의 식물들은 더욱 싱그러움을 머금었다.

“고마워, 소중히 해줘서.”

“당연하죠! 전 이제 아가씨가 계속 공작저에 머무르실 수만 있다면 뭐든….”

“아가씨!”

레이라의 손을 꼭 붙들고는 간절히 말하는 로리의 말을 가로막으며, 하녀의 부름이 들렸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하녀는 다급히 레이라를 찾아 뛰어왔다.

“무슨 일이니?”

하녀는 손까지 벌벌 떨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지, 지금 황제 폐하께서…!”

그 이름만 들었는데도 레이라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공녀님을 찾고 계십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폐하께서 갑자기 왜….”

옆에 선 로라가 오히려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바로 갈게.”

레이라는 늘 그랬던 것처럼 초연한 얼굴로 걸음을 뗐다.

손에 흙을 묻힌 채로 황제를 만날 수는 없으니 방으로 돌아가 가볍게 다시 치장했다. 그리고 서둘러 응접실 앞에 선 레이라는 짧게 심호흡했다.

옆에 선 하녀가 레이라가 왔음을 알리니 안으로 들어오라는 로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듯한 그의 목소리였다.

레이라가 안으로 들어서니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

레이라가 예를 갖추는 것을 로이드는 말없이 응시했다.

그녀는 그 시선을 가만히 받아내며 입을 꾹 닫았다.

로이드는 앉으라는 말 대신 그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한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레이라는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녀가 시선을 피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듯, 로이드가 그녀의 턱을 살포시 잡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아무 말 없이 레이라를 응시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쩐지 로이드는 제 가족처럼, 야윈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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