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언제나 눈앞에 들고 흔드는 미끼는 그것이었다. 자유.
“……”
줄 듯 말 듯, 손에 들어 보이기만 하면서 명령만을 내렸다.
개를 길들이기라도 하듯, 먹이를 앞에 두고 ‘기다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이상 자유를 원하지 않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너까지 귀찮은 싸움에 끼어드는 건 나도 원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 싸움 끝엔 죽음만 있을 테니.
그 말은 굳이 내뱉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황위 다툼에서 패배한 황자의 결말이, 그다지 평화롭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주제넘은 짓을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 이미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건가?”
“……”
“공녀를 찾았으면 당장 내게 데려왔어야지.”
“무슨 공녀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 끝까지….”
헛웃음을 친 황태자는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테론에 갔던 것도 너겠지? 황족의 문장을 썼다는 여자는 공녀일 테고.”
“리히덴 제국에 황녀는 없습니다. 황족의 문장을 쓸 만한 여인은 황태자비 전하나, 루브엔 영애 정도겠죠. 아시다시피, 제겐 약혼녀가 없으니까요.”
허공을 응시하는 아르제오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황태자는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은 넘어가겠다. 그만 가 봐라.”
“실례하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아르제오는 깔끔히 뒤돌아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막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 로렌스가 입을 뗐다.
“아, 그렇지. 깜빡할 뻔했군. 루이스의 동태를 잘 살피고 있거라.”
“……”
“수상한 움직임이 있거든 바로 고하고.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루이스를 주시하며 황궁에 머물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나지막한 대답을 끝으로 아르제오는 황태자의 집무실을 나섰다.
얕은 한숨과 함께 아르제오는 곧장 그곳을 벗어났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진이 곧장 다가섰지만, 그는 황자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 * *
제도를 떠난 직후 마차는 일직선으로 국경을 향했다.
그 뒤를 쫓는 추격대도 없었고, 딱히 귀족과 마주할 일도 없어서 여정은 편안했다.
필이 소개한 상단의 사람들은 먼 대륙의 자유민으로,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들 사이의 거래를 맡고 있다고 했다.
두 나라의 정상들이 사이가 좋지 않다고, 물건들 사이까지 나쁜 건 아니었으니.
서로를 의식하고 있으니 서로가 가진 것을 궁금해했다. 그 궁금증에서 시작된 상단의 일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규모가 커졌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지치면 조금 걷기도 하고 쉬기도 했다. 그러면서 레이라는 상단 사람들과 조금씩 대화를 주고받았다.
“국경 넘으면 포레스티아령에서 잠깐 쉴 건데, 레이라 씨는 어때?”
“아, 저는 집에 먼저…. 돌아가려고요. 그보다, 수도로 곧장 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수도는 피곤해. 할 수만 있다면 난 최대한 늦게 가고 싶어.”
“딘, 촐랑거리면 상단주가 널 제일 먼저 수도로 보낸다고 하셨어.”
“엑? 난 못 들었는데?”
“그러니까 얌전히 있으라고.”
투덜거리는 딘을 보며 레이라는 작게 웃었다. 딘은 생긴 것과 다르게 활발한 성격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늘 뒤에서 챙기는 것이 제롬이었다.
두 사람은 제도에서 출발하면서부터 레이라를 잘 챙겨 줘서 가까워진 이들이었다.
딘은 헤레이스와는 또 다른 느낌의 남동생 같았다.
“있지, 레이라 씨. 포레스티아령에 도착하면 같이 공작령의 축제 구경할 수 있어?”
“아, 벌써 수확 시기네요. 이맘때에는 사람들이 늘 축제를 벌이니까요.”
“그래서 이 시기에 맞춰서 발루아로 가는 거지! 어때? 응? 응?”
“힘드시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녀석은 알아서도 잘 노니까요.”
“아니에요, 시간 내 볼게요.”
레이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곧장 유배지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정도 시간은 있겠지.’
굳이 뒷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정말? 그럼 기다릴게!”
상단에게 레이라는 그저 포레스티아 공작령의 영지민이라고 소개했다.
그래도 평범한 평민으로 보이지는 않아서 제롬은 레이라를 깍듯이 대했다.
두 사람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눈치챈 상단주는 함께 마차를 타고 가도록 했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편안한 여정이 될 수 있도록.
그저 평민으로 소개했다지만, 필이 소개한 사람이니 분명 무언가 있으리라 여긴 것이었다.
“근데, 축제를 하긴 하겠어?”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제롬이 문득 생각난 듯 얘기를 꺼냈다.
“어? 왜? 축제 안 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딘이 되물으니 제롬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레이라는 전혀 모르겠다는 기색이자,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발루아의 황제가 새 황후를 맞았잖아.”
“뭐? 그랬어?”
“넌 도대체 아는 게 뭐냐?”
“그래서, 그래서?”
인상을 찌푸리는 제롬을 보며 딘은 어서 다음 말을 재촉했다.
“왜긴, 폐위된 황후는 포레스티아 공녀라고 했잖아. 폐위에, 다른 사람이 새 황후가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 축제를 하겠어?”
“그것도 그렇네.”
레이라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럼 황제가 축제를 못 하게 하는 거야?”
“그건 모르는 일이지만, 공작령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야.”
“근데, 새로운 황후는 누구야?”
“알 게 뭐야, 귀족 아가씨겠지 뭐.”
“하긴, 황후가 누구든 똑같겠지.”
축제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딘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는 레이라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황후가 누구든 똑같을 거라는 말이 어쩐지 마음에 와 박혔다.
과연 새로운 황후도,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못 하게 할까? 황후로서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게?
아니면, 그건 자신에게만 그런 걸까.
로이드는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힘을 누르고 싶어 했다. 그러니 아마도 ‘황후’가 아니라 ‘레이라’에게 그리한 것일 터.
“…역시 황후가 제대로 된 사람이어야겠죠.”
“그야, 뭐….”
“딘, 혹시 축제가 열린다면 함께 구경해요.”
“전 좋아요! 제롬도 같이 갈 거지?”
들뜬 딘의 물음에 제롬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아가씨께 폐를 끼치지 않나 감시해야지.”
“에이- 난 안 그러는데.”
두 사람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건 즐거웠다. 덕분에 레이라는 허전함에 잠길 새도 없이 국경으로 향했다.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제국민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또 제국 내를 여행 중일까. 아니면, 황궁으로 돌아갔을까. 혹시 자신을 숨겨준 일로 곤란해지지는 않았을까.
허전함이 옅어져도, 아르제오의 생각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폭풍우에 휩쓸려 리히덴 제국으로 떠내려간 후로 꽤 시간이 흘렀다.
보급품은 보름에 한 번 섬으로 전해졌으니, 자신이 사라진 일은 아마 숨길 수 없을 터였다.
‘상황을 잘 설명하고 다시 유배지로 돌아가면 아무런 문제 없겠지.’
딘과 제롬이 떠드는 ‘새로운 황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짐작 가는 인물은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조용히 유배지로 돌아가면, 이번 일은 시끄러워지지 않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레이라는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아주 오랜만에,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그것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다.
* * *
리히덴과 발루아의 국경은 거대한 숲이 뒤덮고 있었다. 안내자 없이 그냥 숲에 들어서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길은 국경을 지키는 포레스티아만이 알고 있었으니, 리히덴에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게 아니어도 병력 차이가 너무 커서 먼저 시작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건 동시에, 발루아가 포레스티아의 도움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 숲을 지나지 않으려면, 배를 끌고 바다를 돌아서 리히덴 제국으로 가야 했다.
포레스티아 공작가는 국경을 지키는 일에 만족했다.
숲의 안내와 국경이기에 가진 군사력은 공작가의 힘을 더욱 거대하게 만들었다.
대신 그들은 영지에 머물기 위해 수도의 정치에서 물러난 지 오래였다.
국경의 숲으로 다가선 상단주는 만들어진 길을 따라서 숲 안쪽으로 들어섰다.
거기까지 가면, 포레스티아의 기사가 그곳을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기사에게 발루아가 인정한 상인의 패를 보이면, 거기서부터는 기사의 안내를 받는다.
숲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상단주의 지시로 딘과 제롬은 레이라와 따로 움직였다.
이는 숲 중간 즈음에서 그녀를 상단에서 몰래 빼돌리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필과 그리 약속했으니.
상단은 국경까지 오면서 보았던 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최소한의 대화만 나누며, 잔뜩 긴장한 채로 주변을 살폈다.
숲의 중간 지점에 다다르니, 공작가의 다른 기사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상단이 들여오는 물건들을 확인했다.
“아가씨.”
그 틈에 상단주는 홀로 마차에 탄 레이라를 불렀다.
“지금 내리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짐을 푸느라 정신없는 사이, 상단주는 레이라를 그들과 떨어진 곳으로 안내했다.
“이곳에 잠시 몸을 숨기고 계시면, 다른 기사가 올 겁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필에게는 빚진 것이 많아 도움을 준 것뿐입니다. 부디 살펴 가세요.”
레이라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인 상단주는 곧장 상단에 합류했다.
물건 확인을 마친 그들은 곧 기사 둘과 함께 길을 떠났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레이라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남은 기사 중 하나가 그쪽으로 다급히 달려왔다.
“공녀님…!”
그 부름에 레이라는 나무 뒤에서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숲의 중간 지점에 남아 있던 다른 기사들도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랜만이에요.”
“무사, 무사하셔서….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어서 공작저로 돌아가시지요. 공자님이 얼마나 애타게 공녀님을 찾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표정에서 걱정과 안도가 묻어났다. 그게 얼마나 불안한 마음을 달래 주던지.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는 기사 중 한 명과 숲의 다른 길을 따라 공작저로 향했다.
“시타델 섬에서 공녀님이 사라지셨다는 얘기를 듣고,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앞서 걷던 기사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 아까도 그 상단주가 대뜸 공녀님 얘기를 꺼내서….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걱정을 끼쳤네요. 전 괜찮으니 울지 말아요, 로닌 경.”
“고, 공녀님….”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울먹이며 뒤돌아보는 기사 때문에 레이라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앳된 얼굴에, 마음이 이다지도 여린데 어찌 기사가 되었는지.
하지만 실력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공작가의 기사였다.
“어서 돌아가시죠. 다들 공녀님을 보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훌쩍이는 기사를 보며 레이라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네요. 얼른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