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36)화 (36/122)

<36화>

“그래서 아쉬워요.”

“즐거웠어?”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이는 아르제오를 보여 레이라가 활짝 웃었다.

“그럼요.”

온실로 들어서고 나서도 아르제오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라도 딱히 그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향긋한 온실을 따라 걸었다. 낮에 필이 보여 준 시든 약초가 있는 곳까지.

“정말 하려고?”

약초 앞에 쪼그리고 앉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물었다. 그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는 김에 내가 허락할 테니 가져가고 싶은 약초 있으면 가져가.”

“정말요? 그래도 돼요?”

“그럼. 내가 하는 말인데 안 될 게 있어?”

“필이 나중에 울지도 모르겠네요.”

“울어도 돼. 낮에 멋대로 움직인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괜찮아.”

“걱정했어요?”

약초를 바라보던 레이라가 고개를 돌려 아르제오를 올려다보았다.

동요 없이 맑은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하던 그는 그녀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턱을 괴고 레이라의 얼굴을 응시했다.

“응. 걱정했네.”

창문으로 눈이 마주치고, 빨리 오라는 입술을 확인했다. 픽 웃으며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니 아무도 없어서 얼마나 놀랐던가.

걱정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황궁의 병사들에게 발각된 건 아닌지.

나지막이 입에 담고 나니 그 감정이 더욱 뚜렷했다.

싱긋 웃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래서 그대로 손을 뻗어 시들어 버린 약초들을 매만졌다.

“그래, 뭐가 문제라서 자꾸 시드는 거야?”

손끝으로 부드럽게 약초를 건드린 레이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잠시 뒤 눈을 뜨며 말했다.

“관리법이 잘못된 것 같네요.”

그러면서 그녀의 손끝에서 청록빛이 약초로 스며들었다.

다 시들어서 죽어 가던 약초들은 그 빛을 머금고는 다시 싱그럽게 피어났다.

“언제 봐도 예쁘네.”

“그렇죠?”

“응. 그대 손이.”

“네?”

놀라 움찔거린 사이 아르제오가 줄곧 응시하던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고운 손이야. 꽃이나 나무를 만질 때는 더 예뻐 보여.”

“아…. 감사합니다.”

슬쩍 시선을 떨어트린 그녀는 희미하게 뺨을 붉혔다.

곧 손을 놓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약초에 볼일 끝났으면 이쪽으로 와.”

레이라는 한 번 더 약초를 매만지고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르제오는 온실 중앙에 티 테이블이 놓인 곳으로 향했다.

낮에는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등을 비스듬히 기댈 수 있는 의자가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멀뚱멀뚱 의자를 바라보는 레이라에게 그가 손을 뻗었다.

“여기가 아주 좋은 자리야.”

아르제오는 앉아 보면 알 거라며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그 상태로 눕듯이 등받이에 기대니 온실 천장으로 하늘이 보였다. 그것도 아주 편안한 자세로.

레이라를 앉히고 그도 옆자리에 앉아 등을 기댔다.

“예쁘지?”

“네, 예쁘네요.”

“생각해 보니까, 리히덴의 하늘을 본 적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네요.”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가만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돌아가면 뭐 할 거야?”

“유배지로 돌아가겠죠.”

“유배지에서는 뭘 하는데?”

“꽃을 심고, 과일나무를 키워요. 보름에 한 번은 동생이 가문에서 보내는 보급품을 잔뜩 들고 오고요.”

“보급품은 허락했나 보네.”

낮게 중얼거린 아르제오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가만히 밤하늘을 바라보는 레이라의 옆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마에서 코까지 미끄러져 내려오는 선이 고왔다.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그녀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말만 ‘유배’였지, 그녀 스스로는 꽤나 그것이 만족스러웠던 것처럼.

“유배지로 돌아가지 않을 방법은…. 없겠어?”

한참 레이라의 얘기를 잠자코 듣던 아르제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본인이 괘념치 않는다고 해도, 조금 마음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그 질문을 하고 나서야 레이라는 밤하늘에서 시선을 뗐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아르제오가 빤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없지 않을까요? 폐하의 눈에 띄지 않으려면.”

“포레스티아 공작령에만 있어도 괜찮은 거 아냐?”

“글쎄요. 제오 말대로 전쟁을 준비하고 계신다면 그렇게는 안 되겠죠.”

아르제오는 조금 뚱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전쟁 따위, 힘없는 국민들만 희생시킬 뿐이야.”

“그 말엔 저도 동의해요.”

이번엔 레이라가 가만히 아르제오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제가 유배지로 다시 가는 것이 못마땅한 듯이 보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말이다.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감시하는 사람도 없고.

아르제오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라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놀러 와요.”

“어딜? 포레스티아가?”

“아뇨, 시타델 섬이요.”

유배지이니 황제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다.

죄인을 만나려면 그만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슬쩍 표정을 살피니 장난기 어린 얼굴이었다.

‘농담인가.’

아르제오는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꾸며 놓을게요.”

푸흐흐, 하고 웃음을 흘리며 덧붙인 말에 아르제오도 픽 웃었다. 그는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레이라에게 다가서 하늘을 등지고는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렇게 말하니, 언젠가 꼭 구경하러 갈게. 약속이야.”

“…아, 네.”

흔들림 없는 눈동자. 유혹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거리를 확 좁혀도, 요동칠 줄 모르는 청록색 눈동자.

곧은 그 시선에 온 신경이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뺨을 매만지던 아르제오는 살며시 그녀의 눈가를 덮었다.

“제오?”

뭘 하냐고 묻는 듯한 부름에 그는 몰래 거친 숨을 내쉬었다. 레이라는 곧 떠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만 돌아가자.”

곧 손을 치운 아르제오는 잠시 그대로 레이라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생김새를 빠짐없이, 시야에 담았다.

그러고는 곧 그녀를 일으켜 세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통로를 이용해 숙소로 돌아갔다.

어두우니 위험하다는 핑계로 손을 놓지 않은 채.

* * *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공녀님.”

동이 트기 전. 배웅하는 유진은 어쩐지 조금 후련해 보였다.

아마도 줄곧 끌어안고 있던 걱정거리가 해결되어서 그렇겠지.

살포시 웃은 레이라는 다시 마지막으로 아르제오를 응시했다. 그 역시 떠나기 전 한시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레이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웠어요, 정말.”

“조심해서 가.”

“정말로 이자까지 쳐서 갚을게요.”

조금 굳어졌던 아르제오의 표정은 그녀의 말에 녹아내리듯 풀어졌다. 픽 웃으며 레이라의 백금발을 살포시 매만졌다.

“이 빚은, 내가 받으러 갈게.”

“기대하고 있을게요.”

마지막일 터였다. 다시 유배지로 돌아가면, 또다시 폭풍우로 떠밀려 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그런데도 두 사람은 자꾸만 앞날을 기약했다.

커다란 농담 속에, 정말로 그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속마음을 은근히 감춰 놓고.

그리고 그날 동이 트기 전, 레이라는 필이 소개해 준 상단과 함께 제도를 떠났다.

* * *

“오늘도 의욕이 없으시군요.”

“아…. 어….”

대답마저 늘어져서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타깝지만, 의욕이 없으셔도 이러고 있으실 시간은 없습니다.”

레이라를 상단에 합류시켜 보낸 지 며칠. 지금쯤이면 벌써 제도를 벗어나 국경에 가까워졌을 터였다.

그 상단은 곧장 발루아 제국으로 향한다고 했으니.

제도에서 레이라를 배웅한 아르제오와 유진은 곧장 황궁으로 복귀했다.

황자궁에 널브러져 있던 아르제오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시는 건가?”

“예, 그러니 의욕이 없으셔도 움직이시죠.”

한숨을 푹 내쉰 아르제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함께 있던 시간이 그렇게 긴 것도 아닌데, 사라지고 나니 어째서 이다지도 허전한지 모르겠다.

레이라는 아르제오가 웃음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그를 보면, 그런 생각은 못 할 테지만.

잠시 싱그러움을 머금었던 식물이, 다시 퍽퍽하고 메마른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르제오가 유진에게만 보이는 얼굴이었다.

황자궁을 나서며 아르제오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으로 황태자 집무실을 찾았다.

“후….”

황궁은 숨이 막힌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늘 그렇듯 말이다.

집무실 앞을 지키던 시종이 아르제오의 방문을 알리자, 안에서 황태자의 허락이 떨어졌다.

안으로 들어선 아르제오는 정중히 예를 갖췄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둘만 있을 때는 편히 형님이라 부르래도 여전하구나.”

살피던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로 그가 말했다. 리히덴 제국의 황태자, 로렌스 반 리히덴.

아르제오와는 다르게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로렌스는 천천히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똑바로 아르제오를 응시하는 그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아르제오는 이미 그게 익숙했지만.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래, 호칭이 어찌 되었든. 재미있는 얘기가 들리더군.”

“그러십니까, 전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것 같은데요.”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변화 없는 표정. 레이라가 보았으면 동일 인물이 맞는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런 아르제오를 응시하며 싱긋 웃은 로렌스는 턱을 괴며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렸다.

눈만 깜박거린 것 같은데, 금세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시선에 서늘한 살기가 담긴 듯했다.

“공녀는 어디 있지?”

“어떤 공녀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그리타 공작가의 공녀를 말씀하십니까?”

“잡아떼는 것이 능숙해졌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오는 대답에 로렌스가 픽 웃었다. 서늘함을 내뿜는 눈은 여전히 웃지 않았지만.

“그래서? 공녀는 다시 발루아 제국으로 보낸 것이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같은 대답만이 돌아오니 로렌스는 그다지 있지도 않던 인내심이 바닥났다.

“…루이스에게 넘겼나?”

기어코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다른 황자의 이름에 아르제오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전하.”

“왜, 아닌가?”

“어떤 공녀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의 명으로 타냐를 포함한 지역들을 둘러보고 온 것뿐입니다.”

잠시 아르제오의 얼굴을 응시하던 로렌스는 곧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 보고는 잘 받았어. 수고했다.”

“아닙니다.”

다시 서류를 훑은 황태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사인과 도장을 찍어 옆으로 치웠다. 그 사이 아르제오를 그 앞에 세워둔 채였다.

“…끝까지 입을 열지 않겠다는 거군.”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야 답을 할 것입니다.”

탁. 로렌스가 거칠게 깃펜을 내려놓았다.

“아르제오. 자유를 원한다고 하지 않았나?”

“……”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이렇게 비협조적이면 안 되지 않겠나?”

나지막한 황태자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몰래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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