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죄, 죄송합니다.”
필은 고개를 살짝 떨어트리며 사죄했다. 무심코 더듬은 말이 그가 당황스러워하는 걸 드러냈다.
“하지만 약초 상태는 한번 보도록 해요. 어디에 있죠?”
의자를 드르륵 밀며 레이라가 몸을 일으키니 필이 단숨에 따라 일어섰다.
“이쪽입니다!”
앞서 걷는 필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의외로 이쪽이 먹히네?’
괜히 빙빙 돌려 말해서 의심을 산 꼴이 되었다.
애초부터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부탁했으면 들어주었을 확률이 더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실 한쪽으로 다가간 필은 따로 분리해 놓은 화단을 가리켰다.
“여깁니다.”
한눈에 보아도 다른 약초들과 차이가 나도록 시들어 있었다. 레이라는 쭈그리고 앉아 흙의 상태를 확인하고 냄새를 맡았다.
“다른 약초들과 똑같이 관리하며 키우는데도, 어째서인지 자꾸 시들어 버립니다.”
“그렇군요.”
유심히 들여다보던 레이라는 천천히 약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딱히 힘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고자 했을 뿐.
그런 레이라의 손끝이 약초에 닿기 직전.
탁.
갑작스럽게 나타나 그녀의 손을 낚아챈 이가 있었다.
“리히덴에 있는 동안에는 나만을 위해 쓰기로 했었을 텐데, 그 힘.”
급히 달려온 건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아르제오는 또박또박 말했다.
“제오? 여긴 어떻게….”
“그, 그, 그러게요,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레이라의 손목을 잡아끌어 제 뒤에 숨인 아르제오는 필을 노려보며 숨을 골랐다.
‘젠장, 제오라고 불러 준 걸 만끽할 틈도 없네.’
그런 생각을 하며 작게 혀를 차니 필이 어깨를 움찔했다.
“이, 이건 그러니까….”
마구 동공이 흔들리는 필을 노려보며 아르제오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 손님과의 외출을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말이지. 그것도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이런 온실에.”
“그것보다, 일찍 돌아오셨네요. 아쉽게 됐습니다. 돌아오시기 전까지 돌아가려고 했는데 말이죠.”
“은근슬쩍 속내를 드러내지 마.”
금세 당황을 감추고 능글맞게 웃는 필을 아르제오가 밀어냈다. 그러고는 슬쩍 레이라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빨리 오라고 해서.”
“아.”
순간적으로 마주친 눈을, 어째서인지 피할 수 없었다. 시선을 피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차분하고 동요는 없었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넌 몰라도 돼, 필.”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필을 아르제오가 다시 밀어내며 레이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르제오의 시선이 떨어져 나가자 레이라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빨리 오라고 해서?’
그래서 빨리 왔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게 어쩐지 부끄러우면서도, 마음이 간지러웠다.
그녀가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제 뺨에 대며 조금 서툴게 열을 식혔다.
그런 레이라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제오는 그녀를 이끌었다.
“돌아가자.”
“아, 하지만….”
곧장 그를 따라나서는 대신 레이라는 아쉬운 시선을 시든 약초를 향해 던졌다.
그 시선을 눈치챈 아르제오가 그녀를 향해 바짝 다가섰다.
“안 돼.”
“딱히 돕겠다고 하진 않았어요. 그저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리히덴에 있는 동안에는 나만을 위해서 쓰기로 했잖아.”
“제오, 전에도 말했지만, 약속은 그런 내용이 아니었어요. 자꾸만 기억을 왜곡시키지 마세요.”
약속이 어찌 되었든 안 된다고, 그렇게 받아치려던 아르제오는 입가를 재빨리 가렸다.
‘제오라고 부르네.’
애칭으로 불러 주는 것에 입꼬리가 씰룩거려서 어떻게든 가려야 했다.
“매정하네.”
결국 지금껏 농담할 때처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입가를 가린 채로.
“어쨌든, 저 자식한테 보이는 건 안 돼.”
“전하야말로 저한테 너무 매정하십니다.”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린 필은 슬쩍 레이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데리고 가려는 아르제오의 뒤에 말을 던졌다.
“함께 가실 상단은 찾았습니다.”
그 말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는 두 사람의 표정에 필은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아주 똑 닮은 표정으로 돌아봤으니.
“적당한 규모에, 상단주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곧 발루아 제국으로 떠날 예정이고요.”
필의 말에 아주 찰나, 침묵이 맴돌았다. 필은 그 침묵을 예상이라도 한 듯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아, 감사합니다.”
조금 늦어진 대답과 함께, 레이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겠네요.”
“그럼요!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깐의 표정 변화는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차분히 시선만 떨어트릴 뿐.
아르제오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도 길지 않았다. 금세 입을 꾹 다문 그는 그저 고요히, 필을 노려보았다. 그게 더 등골이 서늘했지만.
“출발은 언젠가요?”
이어진 레이라의 물음에 필은 슬쩍 아르제오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한 발, 잘못 내디디면 목숨이 오락가락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르제오의 기분만을 살필 순 없었다. 필은 현재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르제오가 그녀를 돕는 거라면, 너무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내일 해가 뜨기 전입니다.”
“그렇군요.”
“준비는 이쪽에 맡기시면 됩니다. 그전까지 푹 쉬시죠.”
“고마워요.”
할 얘기는 그게 전부였는지 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에 아르제오는 다시 레이라와 함께 걸음을 뗐다.
그냥 밖으로 나가면 눈에 띌 테니, 필이 이용한 통로로 들어섰다.
레이라는 아르제오의 조금 뒤를 따라 걷다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필은 다른 볼일이라도 있는 건지 따라오지 않았다.
“…정말 힘을 쓰려던 건 아니겠지.”
묵묵히 통로를 걷던 아르제오가 나지막이 물었다.
레이라는 그제야 구석의 분리된 화단에 시들어 있던 약초가 떠올랐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구태여 위협이 된다면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그냥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려던 것뿐이에요.”
“어쩌자고 아무나 덥석덥석 따라가는 거야?”
“제오의 사람이잖아요. 제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고. 게다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도 주는 사람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어요.”
아르제오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 말이 맞았다.
신뢰하니 찾아간 것이었다. 상단을 찾는 일을 맡긴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정신 차려라….’
이런 상황에서도 애칭을 불러 준 걸 신경 쓰고 있다니.
당장이라도 표정이 풀어질 것만 같은 자신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대 힘을 보이는 건 안 돼.”
“알고 있어요.”
물론 마음은 쓰였지만.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던 레이라는 슬쩍 아르제오를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일 새벽…. 출발하기 전에도 안 될까요?”
“저 약초들?”
“네. 어쨌든 안전한 상단도 알아봐 줬으니까요. 조금은 도움을 주고 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출발하고 나면 다시 돌아올 일도 없고요.”
그 말에 아르제오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아니, 따지자면 이건 내가 주는 도움이야. 필이 움직인 건 내 의뢰 때문이니까. 그 일에 대한 은혜가 갚고 싶으면 나한테 갚아야지.”
진지한 얼굴로 도움을 줄 거면 제게 달라고 말하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픽 웃어 버렸다.
“빚으로 달아 놓는다면서요. 이자까지 쳐서.”
“그랬지. 근데 지금 해 줄 수 있는 것도 있어.”
“지금요? 뭔데요?”
긴 통로를 벗어나, 다시 숙소로 들어서니 갑자기 밝아져 눈이 부셨다.
곧장 자신들의 숙소로 올라간 아르제오는 그녀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떨어트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늘이 지나면. 다음날 동이 트기 전이면, 레이라는 상단과 함께 출발한다.
“오늘 밤은 나한테 시간 내줘.”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가만히 아르제오를 올려다보았다.
“짐은 지금 미리 싸 두고. 출발 전까지 그대의 시간을 줘.”
“……”
레이라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를 올려다보기만 하자, 아르제오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길게 늘어뜨린 부드러운 백금발을 살포시 매만진 그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싫어?”
“싫지 않아요.”
곧장 돌아온 대답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그런 거로 알고 있을게. 이따 봐.”
아르제오는 조심스럽게 레이라의 머리카락을 놓아주고는 등을 돌렸다.
그녀도 곧장 등을 돌려 숙소의 제 방으로 들어왔다.
탁. 등 뒤로 닫은 문에 기댄 레이라는 조금 더운 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싹을 틔운 이 부질없는 감정이. 어차피 내일이 오기도 전에 그 끝을 맞이할 테니 조금만, 조금만 그대로 둬야겠다.
폭풍우를 만나 떠밀려 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돌아가면 그냥 꿈이라 치부하면 된다.
그러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자라도록 두자.
* * *
그날 밤, 자정이 넘은 시각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찾아왔다.
낮에 멋대로 그녀를 숙소에서 빼돌린 일을 사죄하며, 필이 흔쾌히 약초 온실을 내어 주었다.
사람이 오지 않고,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다녀올 수 있는 곳. 게다가 그녀가 좋아할 장소.
등불 하나를 든 아르제오는 레이라와 함께 낮게 걸었던 통로를 다시 걸었다.
“기분은 어때? 이제 곧 돌아가잖아.”
침묵 속에 툭 내던지듯 가볍게 말한 아르제오가 고개를 돌렸다.
“유배지에.”
씩 입꼬리를 올린 얼굴이 개구쟁이 같았다.
레이라는 그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앗.”
“잠! 깐…. 괜찮아?”
그녀를 재빨리 붙잡은 아르제오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정말 화들짝 놀란 것 같았다.
“아, 네, 고마워요.”
“아냐.”
크흠, 하며 괜히 목을 가다듬은 그는 레이라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넘어지면 안 되니까.”
“네.”
변명하듯이 하는 말에 레이라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걸음을 내디디며 조금 전 아르제오가 물은 질문에 답했다.
“막상 돌아간다고 하니까 조금 아쉬운 기분도 들어요.”
“어?”
“물어봤잖아요. 기분이 어떠냐고.”
“아, 어. 그랬지.”
고개를 끄덕이며 더 걷던 아르제오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쉬워?”
“네.”
“왜?”
처음 보았을 때부터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의지도 그랬지만, 아마도 상황 때문도 클 터였다.
그렇지만 한 번도 아쉽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아르제오가 물으니 레이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상한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니야. 그저 아쉬워할 거라고 생각 못 해서.”
“그래요?”
의외라는 듯 묻자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떨떨한 상태로, 아르제오는 통로에서 온실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달빛이 어스름이 들이치는 온실은 낮에 왔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설핏 미소를 머금고 안으로 들어선 레이라가 아르제오를 바라보았다.
“전 즐거웠어요, 제오와 함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