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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34)화 (34/122)

<34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눈에 찾아내는 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그 먼 거리에서 그 역시 당연하다는 듯 레이라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매를 휘며 짓는, 어쩐지 조금 능글맞은 미소.

그에 마음이 술렁거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아르제오가 웃으면 마치 유혹당하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마침내 그 유혹에 넘어간 것 같았다.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식물에 온 관심을 쏟는 자신을 지겨워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함께 쪼그리고 앉아 꽃씨를 심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

가슴께에 손을 얹은 채로 레이라는 작은 탄성을 흘렸다.

‘그때구나.’

그때부터 이미, 이 마음에 변화가 있었구나.

“……”

하지만 이 마음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나 지금 상황에서는 말이다.

싱긋 웃은 아르제오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드는 것을 본 레이라는 얼른 커튼을 닫았다.

이미 생겨난 것을 구태여 없애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곧 자신은 떠날 테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니까.

커튼을 꾹 움켜쥔 레이라는 곧 다시 빠르게 커튼을 열었다.

내다본 창밖에 아르제오는 조금 전 그녀가 커튼을 닫기 전과 같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다시 커튼이 열릴 걸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줄곧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 커튼을 연 즉시 아르제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연스럽게 먼저 웃었다. 평소의 능글맞은, 홀릴 것 같은 미소.

그걸 본 레이라는 손끝으로 제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풉.”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눈이 마주치고는 커튼이 닫혔으면, 가던 길을 갈 터인데. 어째서 그대로 서서 바라보고 있었을까.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나지막이 중얼거린 레이라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함께 있는 동안, 이렇게 활짝 웃는 얼굴은 본 적이 없어서 아르제오는 순간 숨을 멈췄다.

아니, 모든 것이 멈춘 기분이었다. 웃고 있는 레이라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녀는 이내 입술을 매만졌던 손으로 창틀을 짚고는 아르제오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빨리 와요.’

소리치는 대신, 작은 입술이 오물오물 입 모양으로 대신 말했다.

그걸 본 아르제오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그러고는 또렷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갈게.’

혹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서 중얼거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레이라는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확인한 아르제오는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걸, 레이라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완전히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창문을 닫고 물러났다.

똑똑.

마침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기에.

방문을 살짝 연 레이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나요?”

줄곧 아르제오와 유진과만 만남을 가지기에 그녀에게 접촉할 일이 없는 줄 알았던 필.

그 필이 아르제오와 유진이 없는 틈에 숙소를 찾은 것이었다.

“아가씨,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뭐.”

레이라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오라는 말에 아르제오가 오겠다고 답하긴 했지만, 볼일이 끝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이 더 남았다면 아직 시간이 더 걸릴 테고.

“그럼 잠시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마침 아가씨가 좋아할 선물도 들고 왔습니다.”

“좋아요.”

제가 좋아할 선물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숙소에서 마실 거라고 여겼는데, 필은 그녀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또 다른 문을 열고 더 아래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통로처럼 보이는 길을 꼬불꼬불 한참을 더 걸으니, 어떤 문 앞에 필이 멈춰 섰다.

“이곳이 아가씨 취향에 꼭 맞을 것 같아서요.”

생글생글 웃은 필은 문을 열고는 정중히 비켜섰다.

곧장 눈에 보인 풍경에 레이라는 홀린 듯 걸음을 내디뎠다.

나무와 꽃들이 가득한 온실이었다. 확실히 레이라의 취향에 꼭 맞을 장소였다.

밝아지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필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정보 길드에게 정보는 필수였다. 그가 입수한, 포레스티아 공녀에 대한 정보에는 꼭 확인해 보고 싶은 항목이 있었다.

‘식물을 아끼고, 식물로 그 힘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 힘을 확인하기에 온실은 아주 최적의 장소였다. 게다가 그곳은 필이 미리 준비한,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그 말인즉, 그 온실에는 아무도 오지 않으니 필과 레이라 둘뿐이라는 뜻이었다.

지시해 놓은 대로, 온실에 차와 다과가 티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그녀의 시선은 그쪽이 아니라 온실의 다른 식물들에 쏠려 있었지만.

‘식물을 좋아하는 건 확실하네.’

화색을 띠는 레이라의 옆으로 슬쩍 다가선 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드시죠?”

“전부 약초군요?”

필의 질문에 레이라는 다른 질문으로 대신 답했다.

“아시겠어요?”

“향이 가득하니까요.”

그가 미소를 유지한 채 물으니 레이라가 차분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약초를 재배하기 위한 온실이지요. 그래서 외부인 출입을 제재하고 있습니다.”

“외부인이라는 말에 제일 적합한 사람이 저일 것 같은데요. 괜찮은가요?”

“당치도 않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이곳의 식물들에 해를 끼칠 리가 없으시니까요.”

능글맞은 미소와 은근한 말에 레이라가 필을 힐끔거렸다.

아르제오도 능글맞은 태도와 미소를 자주 보이는데, 이쪽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필은 어쩐지, 조금 원하는 것이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식물에 해를 끼칠 사람의 출입을 제재하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그런 걸 어떻게 구분하죠?”

레이라의 질문에 필은 싱긋 웃었다.

“악의를 가진 이들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무지한 이들을 제재하는 것뿐입니다. 약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가 들어왔다가 무언가 잘못 건드리면, 그것마저도 약초에 치명적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희가 지정한 수준의 약학 지식이 있는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지요.”

타당한 이유였다. 악의가 없었다고 해를 끼쳐도 되는 건 아니니.

아예 그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것이었다. 특정한 목적으로 약초들을 재배하는 거라면 더욱.

그녀가 수긍하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필이 은근슬쩍 덧붙였다.

“아, 물론 지금은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해 놨습니다.”

얼굴에 물음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레이라를 보며 필은 눈매를 곱게 휘었다.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내어 주지 않을 표정 관리였다.

오로지 상대의 정보만을 캐내기 위한. 그쪽은 필의 전문 분야이기도 했고.

“그럴 필요가 있나요?”

“예, 아가씨와 밀담을 좀 나누고 싶어서요.”

레이라는 차분히 앞에 놓인 차를 입에 머금었다.

식지 않은 따끈한 차. 아무도 출입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처음 필을 찾아갔을 때처럼 또 누군가 있는 건 아닐까. 그저 자신에게 보이지 않을 뿐.

그녀는 차분하게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자신에게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애초에 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기척을 감춘다면 일반인은 찾을 수도 없었다.

“밀담을 나누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런가요? 전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

은근한 시선과 말투. 본인이 원하는 것을 유도하려는 태도. 레이라는 이런 것들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제게 궁금한 게 있으신 거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 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답해 주실 건가요?”

“그럴 의무는 없죠.”

단박에 돌아오는 대답에 필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더 구슬리기 쉬운 타입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제가 상단을 소개해 드리지 않으면 곤란하신 것 아닌가요?”

“그건 제 의뢰가 아니잖아요. 그 값을 저더러 치르라는 말도 없었는걸요.”

“이상한 곳을 소개하면 곤란한 건 아가씨 아닙니까?”

“국경까지만 가면 상관없어요.”

“아가씨, 세상에는 목숨을 빼앗지 않고도 사람을 망가뜨리는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그걸 일삼는 자들도 아주 많고요.”

“그러겠죠. 하지만 제가 잘못된 걸 알게 되면 제오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답한 레이라는 슬쩍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자까지 쳐서 이 빚을 돌려받겠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자신은 시타델 섬으로 들어가니 만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포레스티아가로 연락은 취하지 않을까.

“자신만만하시네요.”

필의 시선은 유심히 레이라의 표정을 살폈다. 워낙 덤덤하고 차분해서, 표정을 읽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분께서 아가씨께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계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친절히 대해 주고 지켜 주고, 무사히 국경을 건너도록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그와의 약속은 이 제도까지였다.

여기서 국경까지는 필이 소개해 주는 상단과 함께 갈 터였고.

공작가에 빚으로 달아 두겠다고 했지만, 공작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면 찾지 않을 테지.

필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지금 그가 요구하는 건 부당했다.

“정보 길드는 신뢰를 바탕으로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닌가요? 저를 안전히 국경 너머로 바래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제오와의 신뢰는 깨질 텐데요.”

정말 그래도 괜찮겠냐는 표정이라 필은 순간 말을 잃었다.

‘나쁘지 않네.’

아르제오가 포레스티아 공녀와 함께 있다는 정보는 이미 입수한 지 오래였다. 황태자와 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녀가 진짜 공녀라면, 발루아의 폐위된 황후라는 뜻이었다.

자국뿐만 아니라, 타국까지 골고루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많이 아는 것이 곧 무기이고, 가진 패가 많을수록 거래 성사율이 높으니.

필은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시죠. 그저, 아가씨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요?”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생글 웃으며 하는 말에 레이라가 슬쩍 온실을 훑어보았다.

“그래서 온실로 오셨군요.”

“그렇죠. 사실, 계속 시도하고는 있지만, 자꾸 시들어 버리는 약초가 있어서요. 아가씨의 능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는 필을 보며 레이라는 조금 마음이 풀렸다. 그녀는 늘, 어떤 독한 말이든 직설적으로 말해 주는 쪽이 더 편했다.

게다가 필이 말한 ‘시들어 버리는 약초’는 레이라의 궁금증을 자극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필의 접근 방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도움을 청한 거였다면, 흔쾌히 나섰을 것을.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필을 똑바로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와는 눈빛이 전혀 달라서 그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상냥하고 친절한 줄만 알았는데, 시선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필이 침을 꿀꺽 삼킬 즈음, 레이라는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제 힘은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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