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 *
“실은 보내고 싶지 않으신 거죠?”
필의 정보 길드에서 마땅한 숙소를 제공했다.
그리고 적당한 상단을 찾을 때까지는 편히 쉬라며 그곳으로 레이라 일행을 안내했다.
그 뒤, 아르제오를 몰래 찾은 필은 투덜거리듯 물었다.
“…이건 무단침입인데.”
“어차피 제가 제공한 숙소잖아요.”
“그렇다고 이렇게 막 들어와? 그것도 창문으로?”
창틀에 걸터앉은 필을 보며 아르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힐끔거렸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올라온 거야.”
“이것도 다 제 능력이죠. 쓸 만한 구석이 많죠?”
“그래, 그래. 서두가 길다. 용건만 말해.”
“제가 또 궁금한 건 못 참아서.”
헤실헤실 웃은 필은 턱을 괴고는 아르제오를 똑바로 바라봤다.
“어째서 그냥 돌려보내시는 겁니까? 이용 가치가 풍부한 아가씨를.”
필의 말에 아르제오는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이용할 생각 없어. 난 그저 호의를 베풀고, 그녀는 후에 그 빚을 갚기로 했지.”
“빚으로 달아 둔다는 시점에서 벌써 그냥 호의가 아닌 거 아닙니까?”
뚱한 얼굴로 지적하는 필을 향해 아르제오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호의야. 마음을 담은.”
유혹하듯 가늘어진 눈매에 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이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홀리겠다니깐.’
작정하고 달려들면, 과연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할 정도였다.
어쩐지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르제오는.
“나중에 발루아 제국으로 가시기라도 하려고요?”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전하는 정말 속을 모르겠습니다.”
“속내가 훤히 보여서야 황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어?”
“그것도 그렇지만요.”
창틀에 앉은 필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틀었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며 창틀에 머리를 가볍게 기댔다.
“언제 보내고 싶으세요?”
“뭘.”
“아가씨 말입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이라고 하셨으면서, 제가 오늘 당장 준비하겠다고 하니까 죽일 듯이 노려보셨잖습니까.”
슬쩍 아르제오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웃었다.
“최대한 빨리 보내야지.”
“정확한 날짜를 말씀해 주시죠. 언제든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
아르제오는 제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했다.
그녀를 위해서도, 그리고 이 상황 때문에라도 서둘러 돌려보내는 것이 옳았다.
다만 필이 오늘 당장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간절히 생각했다.
‘하루만…. 하루만 더.’
조금만 더 늦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이성과 충돌했다. 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보내야지.”
픽 웃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린 말에 필은 고개를 돌렸다. 슬쩍 힐끔거려 그의 표정을 봐 버렸기 때문이었다.
‘저건 진짜 홀릴 거야.’
마주했다가는 홀릴 것이 뻔했으니 외면이 답이었다. 어차피 제가 해 줄 수 있는 일도 없을 테고.
“술이라도 대령할까요?”
“나쁘지 않지만, 오늘은 됐어.”
“그럼, 날짜가 정해지는 대로 알려 주세요. 내일 아침까지는 상단 리스트를 만들어 둘 테니까요.”
“그래.”
“편히 쉬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제오를 확인한 필은 한차례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밖으로 뛰어내렸다.
“멀쩡한 문 두고 이상한 데로 다니네.”
픽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린 아르제오는 터벅터벅 걸어가 창문을 닫았다.
그 상태로 그는 창문에 이마를 툭 기댔다.
‘…언젠가, 라는 건 허황된 꿈이지.’
그걸 알면서도 놓을 수는 없었다. 끝이 없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을 테니.
제 형님이, 자유라는 먹이를 눈앞에 흔들며 자신을 이용하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그 작은 희망에 걸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내면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천천히 눈을 감은 그는 이내 창문을 등졌다.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일 하루만.’
내일 하루만 더 붙잡아 둘 것이다.
* * *
콰앙!
거칠게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에도 세실은 냉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도대체 왜 찾지 못하는 거냐.”
낮게 가라앉은 로이드의 목소리에 세실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폭풍우에 휩쓸리셨을 겁니다. 이렇게 찾아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그만!”
대답을 요구해 놓고, 로이드는 세실의 말을 막았다. 그 누구도 그 말을 입에 담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계속 찾아.”
나지막이 이어진 말에 세실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라도 찾아와야 인정하시겠습니까?”
“세실!”
세실의 말대로, 로이드는 시체라도 데려오지 않는 이상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시체를 데려와도 포기할 수 없었다.
“찾아와. 그 외의 대답은 듣지 않겠다.”
“이제 와서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잊으셨습니까? 공녀님을 내치신 건 폐하십니다.”
로이드는 똑바로 고개를 들고 세실을 응시했다.
“안다.”
홀든 가문의 힘이 쓸모 있을 거라고 예상했으니까. 전쟁을 방해만 하는 포레스티아가는 거슬리기만 했으니까.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여겼다.
늦었을 리 없었다. 다시 돌아와 달라고 말하면, 착한 레이라는 다시 돌아올 터였다.
로이드는 그 부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 황폐하고 척박한 황궁 안에서, 자신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될 그녀에게.
‘되찾을 것이다.’
사라지고 나니 어딘가 멍하고, 허무감마저 든다.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고 했나.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줄곧 작은 세상에서 살아온 그녀였다.
게다가 황태자비 시절부터 아무것도 그 손에 닿지 않도록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레이라는 다시 제가 손을 내밀면 기꺼이 받아들일 터였다.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찾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렇게 알고 물러가.”
“하나, 폐하…!”
“어디 내 앞에서 다시 레이라가 죽었다는 말을 지껄여 보아라.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
살기등등한 로이드의 시선에 세실은 참담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죽기 살기로 찾으라고 해라. 찾지 못한다면 찾을 때까지 수색을 멈추지 마. 내 이성을 잃은 검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니.”
“…예, 폐하.”
세실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예를 갖추고는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발루아 제국 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아직 수색을 포기하지 않은 건 포레스티아 공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레이라가 살아 있을 것이라 믿고 움직인다고 한다면, 이쪽은 그저 귀찮은 일이라고만 여겼다.
병사들도 전부, 폭풍우에 휩쓸렸다면 바다에 떠내려간 것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그런 작은 섬에 있다가 사라졌으니 바다로 떠내려가 죽었을 거라고.
로이드의 태도는 포레스티아가 사람들과 비슷했다.
‘이래선….’
세실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선 마치, 공녀께 마음이라도 두고 계신 것 같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던 세실은 고개를 저었다.
로이드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나온 과거가 그랬고, 골라온 선택지가 그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랑은커녕 일평생을 고독하게 사실 터였다.
모든 사람을 온전히 신뢰하지도 않고, 완전한 제 사람을 만들지도 않는다.
인간은 누구든 배신할 수 있고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건 파멸의 길이라 여기는 사람이니.
* * *
세실이 집무실을 나선 후, 로이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에는 이곳이 더욱 갑갑하게 느껴졌다. 아니, 황궁 어디에 있어도 똑같았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로가 누적되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로이드는 확인해야 할 서류를 챙겨 들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최근 황제가 주인을 잃은 황후궁에 자주 드나드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다만 황제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다.
로이드가 그곳으로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또…. 또, 또!’
레이라의 소식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죽었을 것이 빤한 그 여자의 무엇이 저리도 아련해서 붙잡고 늘어진단 말인가!’
홀든 후작가는 이 사태를 엘라의 탓으로 돌렸다.
얼른 아들을 낳았다면, 이런 일이 있어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저 혼자 뜻으로 될 일인가.
‘안아 주질 않는데 어쩌란 거야!’
황제는 신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만큼 엘라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로이드가 레이라의 궁으로 향하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 * *
제도에서는 함부로 밖을 돌아다닐 수 없어서, 레이라는 얌전히 필이 마련해준 숙소에 있었다.
이른 아침 아르제오가 필과 무언가 얘기를 나눴고, 그는 점심때까지는 돌아온다며 숙소를 나섰다.
‘안 오네.’
창문을 열고 창틀에 턱을 괸 레이라는 밖을 구경하면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발루아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곳에 머물렀던 시간은 짧았지만, 막상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았다.
아마 앞으로 평생 다시 이곳에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
레이라는 조금이라도 더 이곳 풍경을 눈에 담아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필이 준비한 숙소는 꽤 높은 곳에 자리해서, 거리가 위에서 보였으니 말이다.
활기가 가득 찬 거리가 좋았다.
뒤섞이는 목소리들 사이로 간혹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좋았다.
저 안에 있으면 정신없을지도 모르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는 건 좋았다.
‘결국 못 찾았네.’
아쉬움이 남는 건 또 있었다.
리히덴 제국에서만 난다는 과일나무나, 식물들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귀족들에게 존재를 들켜 이리 숨어 있어야 하니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레벤의 씨앗.
크게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아르제오가 자신만만하게 얘기할 때마다 조금은 기대했었다.
씨앗을 찾는 일로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즐거웠다.
의도치 않은 여행이었지만, 레이라에게는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귀한 씨앗을 얻기도 했고 말이다.
이제 돌아가면 만나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묵직한 돌덩이가 마음을 짓누르는 듯했다.
“응?”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거리를 응시하던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로브를 두른 키가 큰 사람이 보였다.
‘아, 아르제오다.’
딱히 그가 위를 올려다본 것도 아닌데, 그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며 인파 사이로 섞인 그의 모습에.
가만히 위에서 아르제오를 응시하고 있는데, 돌연 그가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었다.
‘응? 보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 지.’
망설임도 없이 창가에 기댄 레이라를 올려다본 아르제오는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
부드럽게 휜 입매에 마음이 술렁였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짙푸른 머리칼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마주친 은회색 눈동자가 유난히 아름답게 보였다.
점점 더 빠르게 뛰는 심장에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