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푸하하!”
레이라의 반응은 정말 예상을 뛰어넘는다.
단숨에 좁혀진 거리,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
애칭처럼 느껴지는 이름. 쑥스러워하지 않더라도, 아주 작은 동요라도 보여 주지 않을까 했는데.
웃음을 터트린 아르제오는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반응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는데, 상인을 통해 국경을 넘으면 그것도 볼 수 없어진다.
‘물론, 한동안뿐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미소를 띠었다.
후드를 써 얼굴을 가린 그들은 다시 말을 달려, 제도로 향했다.
아직 귀족들은 포레스티아 공녀를 데리고 있는 아르제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덕분에 제도로 들어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실제 신분이 아니라 위조된 신분을 보이고 들어오긴 했지만.
신분을 그대로 노출 시킬 수는 없었다. 유진이 있는 곳에는 늘 아르제오가 있는 것이 당연했으니.
“신분을 숨겨야 하는 이유는 알지만, 위조 신분을 쓰는 게 정말 자연스럽네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그렇게 말한 아르제오는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웃었다.
“신분을 숨기는 일이 익숙하거든. 이쪽이 움직이기 편하니까.”
“그건 그렇네요. 저희는 이제 어디로 가나요?”
“일단은 그대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상단을 찾으러.”
“생각해 놓은 곳이 있나요?”
“괜찮은 곳을 많이 아는 사람을 찾아가는 거지.”
제도로 들어가며 말에서 내린 그들은 인파에 섞여 들었다.
이번에도 유진이 앞장서서 나아갔다. 제도라면 제집 앞마당처럼 드나들었을 것이 뻔해서 그런지, 유진은 익숙한 듯 걸었다.
아르제오의 말에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이미 아는 듯.
인파 속에 섞였던 그들은 곧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조금 더 작은 상점들이 있는 골목. 그다음에는 노점이 있는 곳.
그러다 어느 순간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길로 들어섰다.
앞선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이라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르….”
그러고는 아르제오를 부르려다 재빨리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제도로 들어서면 두 사람의 이름을 줄여서 불러달라는 부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황족과 귀족의 이름일 테니, 제도에서 언급하는 건 위험부담이 있었다.
“응? 레이라, 왜?”
슬쩍 고개를 돌렸던 그녀가 제 입을 틀어막으니, 그 뒤를 걷던 아르제오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 아니요. 정보상에게 가는 건지 물으려던 것뿐이에요.”
“그래, 내 이름을 잘못 부를 뻔했지.”
“도중에 멈췄으니까 괜찮죠.”
“그래, 뭐.”
‘넘어가 줘야지. 입을 막는 모습도 퍽 귀여웠으니까.’
씩 입매를 휘는 아르제오의 표정이 레이라는 어쩐지 불안했다.
“이번엔 제대로 불러 봐.”
“뭘요?”
“애칭.”
“가명이 맞죠. 정확히는 이름을 부르기 쉽게 줄인 거고요.”
능글맞게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레이라가 차분히 받아쳤다.
“매정하네.”
눈썹을 늘어뜨리면서도 아르제오는 웃음을 채 감추지 못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힐끔거린 유진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착했습니다.”
낡고 허름한 문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번듯한 건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유진은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르제오가 앞장섰다.
그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가 프런트를 지키고 있는 이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
앳된 얼굴의 남자가 아르제오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어서 오세요!”
그러고는 곧 마도구를 이용해 무언가 말을 전했다.
레이라는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마도구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발루아가 리히덴을 누를 수 있는 압도적 군력을 가지고 있다면, 리히덴의 장점은 무역일 터였다.
활발히 타국과의 교류를 이어 나가며 발전을 거듭하는 곳이었으니.
“신기해?”
“아, 네. 마도구를 직접 볼 기회는 흔치 않았으니까요.”
레이라의 대답에 아르제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흔한 마도구를 볼 기회가 흔치 않았다는 건, 그녀가 줄곧 세상과 단절됐다는 뜻이었다.
‘정말 궁에 가둬 놓은 인형 취급이었나 보네.’
발루아의 황제가 취했던 태도를 알면 알수록, 아르제오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레이라는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격이 이러니 그저 가만히 있었을 거라 예상했다.
‘뭐, 어차피 이제는 그 황제 곁으로 돌아갈 일은 없겠지만.’
레이라를 떠나보내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 여겼다. 그녀의 가치를 못 알아본 어리석은 사람은 후회도 모르겠지만.
앳된 남자가 무언가 얘기하니, 올려보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르제오는 안내를 거절하고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그러며 그는 슬쩍 후드를 걷었다.
멀뚱멀뚱 아르제오를 관찰하던 레이라가 저도 후드를 걷으려고 하는 걸 그가 재빨리 붙잡았다.
“그대는 안 돼.”
“그런가요?”
“그래.”
“알겠어요.”
얌전히 다시 후드를 쓰는 레이라를 보며 뒤를 걷던 유진이 제 후드를 걷었다.
‘괜찮지 않나?’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곳이었다. 만나러 가는 인물은 신뢰할 수 있는 이였고. 하지만 유진은 잠자코 뒤를 따랐다.
위로 올라간 아르제오가 문고리에 손을 올리려는데, 돌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고는 안에서 주황색 머리통이 쏙 튀어나왔다.
“여전히 노크할 생각은 없으시군요.”
“이미 아래에서 보고했잖아. 온다는 걸 아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남자는 아르제오와 유진을 마주하다 함께 선 레이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새로운 손님이 계시는군요.”
남자가 눈을 빛내며 레이라를 꼼꼼히 훑으니, 아르제오가 재빨리 그 얼굴을 안으로 밀쳤다.
“일단 들어가도 될까?”
싱긋 웃는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살기를 띠고 있어서, 남자는 얌전히 문을 열고 비켜섰다.
그들이 소파에 편히 앉은 뒤, 남자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남자가 슬쩍 손짓하자, 어디서 나타난 건지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얌전히 차를 내왔다. 그러고는 다시 휙 사라졌지만.
“자, 그쪽의 아름다운 여성분은 누구시죠?”
“필, 쳐다보지 마.”
“예? 손님으로 오셨는데 그럴 순 없죠. 관찰하는 게 제 일인데요.”
필은 턱을 괴고는 레이라를 응시했다. 그러자 아르제오가 손을 들어 레이라의 눈 앞을 가렸다.
“이러실 건가요? 후드도 좀 벗으시고, 예?”
“필.”
낮게 가라앉은 아르제오의 목소리에 필은 어깨를 움찔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어색하게 웃은 필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앞에 계신 이분의 정체는 알고 있거든요.”
눈을 가늘게 뜬 필은 후드에 감춰진 레이라를 유심히 살폈다. 그 눈빛이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라, 유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래, 알겠지.”
그런 필의 태도에 아르제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를 수가 없죠. 황궁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벌써 소문이 퍼졌는걸요. 무려 그 황태자 전하께서 움직이신 일이고. 제가 그 일을 모르고 있다면, 저흰 벌써 망했을 겁니다.”
정보상이 정보에 뒤처지면 끝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필을 보며 그는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래서, 이런 귀한 분과 함께 저를 찾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제게 부탁이라니, 그것참 가슴 뛰는 단어군요.”
“징그러우니까 하지 마.”
가벼운 필의 태도에 편안해진 아르제오는 픽 웃으며 유진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유진이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잡았다.
“…에?”
그에 당황한 필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르제오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턱을 괬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그대의 정보 거래에서 제외했으면 해. 기왕이면 이 방의 그림자들도 다 내보내고.”
검을 뽑을 기세이긴 하지만 뽑지 않은 유진을 보며 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 예, 분부대로 하지요.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그러면서 순순히 허공에 물러가라며 손짓했다.
레이라가 보기엔 손짓 전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유진이 곧 다시 자리에 앉는 걸 보니, 누군가 물러난 것 같기는 했다.
“당신한테 꽤 순종적이네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레이라가 아르제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무심히 말했다.
“그럼요! 저흰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거든요.”
아르제오보다 먼저 재빨리 대답한 건 필이었다.
“전하께서도 제가 필요하고, 저도 놓치고 싶지 않은 고객이고요.”
싱긋 웃은 필은 눈매를 곱게 휘며 레이라를 응시했다.
“의외인가요? 공녀님.”
뒷말은 구태여 그녀를 그 호칭으로 부르기 위한 말이었다.
가만히 필을 바라보던 레이라가 말릴 새도 없이 제 후드를 걷었다.
“잠…!”
“저쪽은 어차피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걸요.”
“공녀님이 더 얘기가 잘 통하네요!”
정말 기쁜 듯이 웃은 필은 유심히 레이라를 관찰했다.
부드러운 백금발과 고운 얼굴. 거기에 문득 시선이 머무르고 마는 청록색 눈동자.
‘과연.’
포레스티아 공작가가 아끼는 아가씨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강렬한 아름다움은 아니었지만, 꽃향기가 스며들 듯 서서히 매료되는 기분이었다.
입술을 매만지며 슬쩍 웃던 필은 서늘한 시선으로 저를 노려보는 아르제오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평소의 능글맞은 얼굴로 물었다.
“제게 부탁하실 일은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국경을 건널 예정이 있는 상단을 찾아 줘.”
“규모는요?”
“적당히. 너무 크면 귀찮아져. 그리고 그대가 신뢰할 수 있는 곳으로.”
아르제오의 말에 필의 눈이 도르륵 굴러갔다.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발루아 제국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시군요.”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않고 그냥 보내는 거냐고 묻는 눈이었다.
“원래 그곳 사람이니까.”
뭘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은 아르제오의 특기였다.
감정을 숨기는 것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니.
“그러시면 오늘 당장….”
국경을 넘는 상단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는 쪽이 고비겠지만.
출발 준비를 하도록 말하려던 필은 엄청난 살기를 드러내는 아르제오의 눈을 보고 말을 흐렸다.
‘응?’
무슨 말이든 함부로 꺼내면 안 되는 눈빛이었다. 이 바닥 생활을 그렇게 했는데, 필이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물론, 아르제오가 그러는 이유를 필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 오늘부터 당장 마땅한 상단을 찾아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겨우 이어진 필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아르제오는 그제야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아니, 왜?’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필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이라고 하셨는데?’
약간의 억울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