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31)화 (31/122)

<31화>

“이건….”

“레이라!”

유진이 주변을 둘러싼 결계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살폈다.

축 늘어진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 그리고 두 번째 역시 심장이 툭, 몸 밖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레이라!”

소리쳐 불러 봐도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전하, 진정하세요.”

가까이 다가선 유진이 레이라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색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호흡에도 문제가 없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기 직전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면, 그냥 잠든 거로 보일 정도였다.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일단 날이 밝기를 기다리시죠.”

“만일 마물의 저주라면, 그 마물을 처단해야 나을 거다.”

아르제오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만 같아서 유지는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보시죠, 이 결계. 마치 이 나무가 펼친 것 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공녀님께서는 정신을 잃기 전에 나무에 손을 대셨죠.”

빛이 난 것을 두 사람 모두 목격했다.

이 나무는 본래에 마물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산맥을 지날 때면 이용하는 쉼터였다.

레이라가 손을 대니 빛이 나고, 갑자기 결계까지 생겨났다.

‘그 반동으로 정신을 잃은 건가?’

만일 그렇다고 해도 아르제오는 썩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날이 밝는 즉시 움직인다.”

“예, 전하.”

깍듯이 대답한 유진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결계 가까이 다가가 그걸 살피기 시작했다.

아르제오는 나무에 기댄 채로 레이라를 품에 안았다.

일정하게 뛰는 심장과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는 혹시나 레이라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걱정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리고 유진도 그 옆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시원한 밤공기와 함께,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크르르.

마물의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려오기 전까진.

그 즉시 유진은 제 검을 당장이라도 뽑을 기세로 붙잡았다. 잔뜩 긴장한 그는 한 시도 마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지척까지 다가온 마물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 더 다가오지는 못했다.

‘이 결계 때문인가?’

결계로 다가선 유진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문제없는지 부드럽게 손이 결계를 통과했다.

카악!

그와 동시에 마물이 달려들었지만, 다시 결계 안으로 손을 감추자 마물은 결계에 부딪혀 나뒹굴었다.

아마도 마물의 숲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유일하게도 마물에게서 안전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닐까.

유진은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 마물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아르제오의 품에 잠든 레이라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의 힘을 바탕으로 일어난 일이긴 했지만, 이건 이 나무의 힘인 것 같았다.

다만 끌어내도록 레이라가 거들어 준 느낌이랄까.

리히덴 제국에는 이런 위험한 산맥이 몇 군데나 있었다.

그곳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무가 있기는 했다.

다만, 이런 결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은 다닐 수 없었다.

‘아니지, 결계가 있어도 보통 사람은 못 다니지.’

기사나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이 나무까지 도달하지도 못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산맥에 이런 마음 편한 휴식처가 생기는 건 그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다른 나무들도 이렇게 바꿀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레이라를 응시하는데, 문득 아르제오와 눈이 마주쳤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턱이 없는데도,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불편했다.

유진은 슬쩍 고개를 돌려 아르제오의 시선을 피했다.

얕은 한숨을 내쉰 아르제오는 다시 고개를 떨어트려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얼굴은 천진하기만 했다.

엄청난 가문을 등에 업고, 대단한 능력을 손에 쥔 여자. 그러면서도 제게 씌워진 누명에 발버둥조차 치지 않은 사람.

‘산맥을 벗어나면 곧 제도야. 믿을 만한 상인에게 맡겨서….’

그래서 함께 국경을 넘으면 레이라는 다시 죽음의 섬이라고 불리는 유배지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냥 계속 여기 있으면 좋을 텐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던 아르제오는 흠칫하고는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덮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레이라는 유배지로 돌아가야 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게다가 호시탐탐 전쟁을 노리는 발루아 제국의 황제 때문에 그녀는 더더욱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레이라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이를 기회 삼아 당장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테니.

그뿐 아니라, 리히덴의 귀족들이나 황태자에게도 노려지고 있었다.

그들 손에 넘어간다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용당할 것이다.

돌아가는 것이 제일 안전했다.

‘그런데….’

다만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을 뿐.

눈가를 덮었던 손을 내린 아르제오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어둠을 응시했다.

‘붙잡아 여기 있게 하면 어쩔 건데.’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레이라는 떠나야 하고, 자신은 이곳에 남아야 했다.

이 손에 완전한 자유가 쥐어지기 전까지는.

‘그때는….’

때가 되면, 자신이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이 역시 유진이 알면 기함할 테지만.

씩 입꼬리를 올린 아르제오가 살짝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잠든 레이라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그대를 만나러 갈게.”

* * *

‘간단해. 식물을, 생명을 위하는 마음. 그것만 있으면 네 힘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먼 옛날의 기억인지, 어쩐지 그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서히 정신이 듦과 동시에 흔들거림이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뜨니 시야의 반쯤은 후드에 가려져 있었다. 그 아래로는 제 손과 함께 고삐를 쥔 커다란 손이 보였다.

“으음….”

레이라가 꼼지락거리니 아르제오가 단숨에 속도를 늦췄다.

“레이라, 정신이 들어?”

그와 동시에 앞을 달리던 유진도 속도를 늦췄다.

“괜찮으십니까, 공녀님?”

레이라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하고, 머리가 멍했다.

“괜찮아?”

유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니, 아르제오가 재차 물었다.

“아, 괜찮….”

괜찮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아르제오는 완전히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레이라의 이마를 짚었다.

그의 손에 머리가 뒤로 밀려 자동으로 아르제오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게 되었다.

“열은 없어. 머리 아파? 또 마물의 괴성이 들려? 어디 다른 데가 불편한 건 아니고?”

쏟아지는 질문들에 레이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매만졌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물어봤어요. 전 괜찮아요.”

“…아, 그래.”

무심코 닿았던 가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니 아르제오는 어쩐지 아쉬움이 느껴졌다.

‘진짜 미쳤네.’

아르제오는 손등을 슬쩍 제 입술을 가리고는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어쩐지 눈에 열기가 느껴졌다.

레이라는 괜한 생각이라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괜찮아요.”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유진은 슬쩍 아르제오를 힐끔거렸다. 물론 그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그럼,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네.”

앞선 유진이 다시 말을 달리니, 아르제오도 곧 정신을 차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레이라는 그제야 다시 제가 어디인지 살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검은 나무들이 가득한 숲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어떻게 된 건가요?”

슬쩍 주변을 훑은 레이라가 아르제오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아마도 마물과 눈이 마주쳤던 것 때문에 괴성이 크게 들린 모양이야. 두통을 호소하던 그대는 쉼터에 있던 나무에 손을 대더니 정신을 잃었고.”

그러고 보니 나무가 제힘을 순식간에 빨아들였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건 뭐였지?’

힘이 멋대로 흘러넘친 적은 없었다. 그건 흘러넘쳤다기보다는 빼앗긴 것에 가까운 감각이었지만.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해서, 산맥은 빠져나왔어. 지금은 수도로 향하는 중이야.”

“제가 그렇게 오래 정신을 잃었나요?”

“그래.”

마지막 대답에는 어쩐지 원망이 담긴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밤을 꼬박 지새우고도 깨어나지 않아서 애가 타던 참이었다.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리면서도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참담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산맥을 막 벗어난 참에 레이라가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진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니까.”

투덜거리는 투로 이어진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제가 발루아로 돌아간 후엔 편히 마음 놓고 있어요.”

농담조로 던진 말에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르제오는 가라앉은 눈으로 레이라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등 뒤에서 어떤 얼굴인지 알지 못했다.

“…돌아간 뒤를 잘도 말하는군.”

“네?”

“아니다.”

작게 중얼거린 아르제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대답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레이라는 돌아가는 게 당연했다. 그 당연한 걸 알고 있는데도, 저 말이 왜 그리 서운한지 모르겠다.

‘있겠다고 하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한 주제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아르제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산맥을 빠져나가 숲을 달리던 유진은 탁 트인 절벽 위에서 말을 멈췄다. 그 뒤를 따라 아르제오도 말을 멈추니, 절벽 아래에 펼쳐진 광경이 보였다.

“와아….”

“저깁니다, 리히덴의 제도.”

레이라는 한 번도 이렇게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의 높이에 올라 본 적이 없었다.

‘헤레이스는 곧잘 나무를 타고 올라가곤 했는데.’

물론 그건 레이라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눈을 빛내며 제도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아르제오는 손끝을 움찔거렸다.

이제 저 아래의 제도로 들어서면 레이라를 보내 주어야 했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서로를 더 알아 가고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레이라는 더 보고 있고 싶은 사람이었으니.

아르제오는 손을 뻗어 레이라에게 후드를 꼼꼼히 씌웠다.

“혹시 모르니까 절대 얼굴은 보이면 안 돼.”

“그건 아르제오와 유진도 아닌가요? 제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두 사람은 아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요.”

“우리도 가릴 거야. 그리고, 제도 안으로 들어서면 우릴 그 이름으로 부르면 안 돼.”

“그럼 뭐라고 불러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레이라에게 유진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냥 진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아르제오는요?”

고개를 돌리자 아르제오가 돌연 거리를 훅 좁혀왔다. 조금만 움직여도 뺨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제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달콤했다.

레이라의 반응은 그 달콤함과는 반대였지만.

“정말 대충 지은 이름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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