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테론 영지에 나타난 의문의 여인. 황녀가 없는 리히덴 제국임을 모두가 아는데, 출처를 알 수 없는 황족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 얘기는, 현장에 있던 병사들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 목걸이가 황태자의 것인지, 2황자, 혹은 3황자의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황제가 따로 하사한 것인지. 그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황후의 것이라기엔 그 여자가 너무 젊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소식을 접한 귀족들은 황태자비 내정자나, 다른 귀족 영애들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테론까지 간 귀족 영애는 없었다.
이후에 사람을 보냈지만, 당연하게도 의문의 여인은 이미 테론을 떠난 뒤였다.
결국, 그 정체를 알아낸 이는 없었다.
* * *
테론 영지를 벗어난 그들은 말을 타고 곧장, 갈림길로 향했다.
“생각보다 잘하네.”
“뭘요?”
“권력 휘두르기.”
말을 타고 달리며 아르제오가 얘기를 꺼내니, 레이라가 픽 웃었다.
“생각보다 속이 시원하더라고요. 좋네요, 권력 휘두르기.”
“그렇지?”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목을 매겠죠.”
“그런 셈이지. 왜? 그대도 이제 권력을 원해?”
“글쎄요. 그다지.”
레이라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을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권력에 대한 욕심이 조금도 없는지 레이라는 덤덤하기만 했다. 확실히 보기 드문 귀족이기는 했다.
레이라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건 조금 다른 생각에 잠겨서였다. 물론 권력을 욕심내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일에는 저마다 해결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그 방법이 다를 터였다.
‘만일….’
만일 그 감옥 같은 황궁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신이 다른 방법을 찾고 노력했다면.
그랬다면 지금의 상황도 달라졌을까. 시타델 섬으로 쫓겨나는 결과 대신 다른 결과가 기다렸을까.
‘만약’이라는 말은 후회만 자아낸다. 그에 비해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하는 말.
그때 이랬다면, 조금 더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이런 가정은 지나고 나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레이라는 작게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 냈다.
다르게 대처해서 다른 상황을 맞이했더라면, 이렇게 새로운 경험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아르제오처럼 신기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말이다.
* * *
갈림길에 다다른 레이라 일행은 도시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산맥으로 향했다.
산맥 입구에 다다른 유진이 먼저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레이라에게 물통을 내밀었다.
“공녀님, 산맥 안으로 들어서고부터는 절대로 저나 전하와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네, 명심할게요.”
그가 내미는 물통을 받은 레이라는 목을 축였다. 아르제오는 그녀의 로브를 다시 꼼꼼히 체크하고는 물통을 건네받았다.
“될 수 있는 한 아무것도 보지 말고.”
“아무것도 보지 말라뇨?”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는 픽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후드를 살짝 잡아당기며 고개를 돌렸다.
“위험한 게 많으니까. 이 산맥은 마물의 산맥이라고도 불리고.”
산맥으로 시선을 돌린 아르제오는 조금 굳은 표정이었다. 긴장되는 듯이. 그러다가도 레이라를 마주하면 금세 미소를 머금었다.
“마물은 사람을 홀리거든. 그러니까 조심해?”
“네, 그럴게요.”
하늘을 한차례 확인한 유진은 다시 말에 올라탔다.
“산맥에서는 최대한 휴식 없이 달릴 겁니다.”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에 이 산맥이 얼마나 위험한지 느껴졌다.
“힘드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네, 전 괜찮아요.”
아르제오와 함께 말에 오른 레이라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앞장서며 그들은 마물의 숲으로 들어섰다.
분명 대낮이었는데도, 숲으로 들어서니 금세 캄캄해졌다.
나무들이 다른 숲보다 커다랗게 자라 있었다. 그래도 시타델 섬의 막무가내로 자라난 나무들보다는 작았지만.
바로 앞을 달리는 유진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레이라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어두컴컴한 산맥 안의 풍경을 훑던 레이라는 문득,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을 보았다.
한순간 그 번뜩이는 눈과 마주친 기분이라, 그녀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눈을 질끈 감은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아르제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왜 그래?”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자 아르제오가 물었다.
“나, 나무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눈이 마주친 느낌이 든 건 아주 찰나였는데, 그 순간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있었다.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끼치는 감각.
“주변 살피지 마.”
“네.”
잘게 떠는 것 같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손을 잡아 함께 고삐를 붙들었다.
“괜찮아. 무서우면 눈 감고 있어도 돼. 내가 잡고 있으니까.”
등에 맞닿은 온기와 손을 잡은 감촉. 천천히 고른 숨을 내쉬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길게 숨을 내쉰 레이라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똑바로 달리고 있는 앞을 바라봤다.
그녀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본 아르제오가 물었다.
“왜? 눈을 감고 말을 타는 게 더 불안한가?”
“아니요.”
걱정 어린 그의 목소리에 레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보려고요.”
눈을 감고 피해 버리면 그만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제껏 그런 태도를 취했던 것 같았다.
로이드에 관해서도, 다른 모든 것에 관해서도.
자신은 정말 황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로이드의 측근들도 그렇게 수군거렸고.
다만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힘은 원했고, 거기에 자신은 순종적이니 어쩌면 로이드는 편했을지도.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타델 섬으로 들어가면서, 레이라는 느낀 바가 아주 많았다.
제대로 앞을 보고 나아가고 싶었다. 곁에 있는 아르제오 덕분에 조금 든든하기도 했고.
꺄아악!
그때,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비명 같은 것이 들려왔다.
꺄아악! 살려 주세요!
다급한 여인의 목소리. 그 소리에 레이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숲을 살피는 것보다 빠르게, 아르제오가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덮었다.
“가만히 있어.”
“하지만 아르제오, 방금….”
눈가를 덮었던 커다란 손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괜찮아. 저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
나직이 속삭이는 아르제오의 목소리가 숲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덮었다.
그의 다독임에 다시 앞을 바라본 레이라가 슬쩍 시선을 떨어트렸다. 커다란 손은 여전히 제 손과 함께 고삐를 잡고 있었다.
“…저것도 마물이 사람을 홀리기 위해 내는 소린가요?”
“그럼 셈이야. 이 산맥을 지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주지 마.”
“알겠어요.”
대낮인데도 어두운 산맥, 검은 나무들. 그 사이사이에 번뜩이는 마물들의 시선.
산맥에 사람들이 잘 들어서지 않으니, 그들은 간만에 찾아온 좋은 먹잇감일 터였다.
처음에는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 그다음은 아이, 노인. 약자들의 목소리를 가장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들을 전부 무시하고 계속 달리니, 나중에는 괴성을 질러댔다.
“윽….”
고막을 찌르는 괴성에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듣고 있으면 마치 고막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조금만 참아.”
“…괜찮아요.”
계속해서 괴롭히는 괴성을 들으며 조금 더 달려 나가던 유진은, 천천히 속도를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주변이 휑한 작은 공터에서 말을 멈췄다.
“역시 오늘 안에 산맥을 빠져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쉬시죠.”
유진이 말 두 필을 나무에 멜 동안 아르제오가 먼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레이라, 이쪽으로 와.”
아르제오가 제 옆에 곱게 손수건을 펼치고는 툭툭 두드렸다.
“이렇게 쉬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그가 가리키는 곳에 살포시 앉으며 레이라가 물었다.
“어차피 하루 만에 이 산맥을 빠져나가는 건 무리야. 그리고 밤에는 너무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아. 밤은 마물들의 시간이니까.”
“그러네요. 산맥에 들어선 지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지금쯤 날이 어두워졌겠어요.”
아르제오의 옆에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댄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귀를 괴롭히는 괴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소음에도, 유진과 아르제오는 멀쩡했다. 혹시 제게만 들리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만큼.
희미하게 미간을 좁히고 있던 레이라는 다시 커지는 괴성에 결국 귀를 막았다.
“읏….”
“왜 그래? 귀가 아파?”
“아르제오는 들리지 않나요?”
눈썹을 늘어뜨린 레이라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마물의 괴성이라면 들리긴 들렸다. 어디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그저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지만, 그리 가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그런데 레이라가 괴로워하는 걸 보니 그녀에게는 이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저게 크게 들리는 건가?”
고개를 돌려 어둠에 잠긴 숲을 바라보며 아르제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전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공녀님께서는 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주변 정리를 하던 유진이 다가왔다.
점점 커진 괴성은 머리까지 울려왔다. 귀를 막았던 레이라는 곧 머리를 움켜쥐고 웅크렸다.
“레이라, 괜찮아?”
“읏….”
웅크린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본 아르제오는 입술을 짓씹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덩달아 당황한 유진에게 아르제오는 얼굴을 굳힌 채로 대답했다.
“오는 길에 마물과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했어.”
그 대답에 유진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머리 아파?”
아르제오의 차가운 손이 레이라의 이마를 짚었다. 시원한 감촉에 두통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귓가를 울리는 마물의 괴성에 레이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이라도 그 소음에서 벗어나고자, 등을 기댔던 나무 쪽으로 뒤돌아 웅크렸다.
“하아, 하아….”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아서 눈앞의 커다란 나무를 손으로 짚었다.
그 순간, 레이라의 손을 통해 나무로 청록빛이 스며들었다.
‘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멋대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이 발현된 적은 지금껏 없었다.
나무는 순식간에 레이라의 힘을 빨아들이더니 작은 공터를 둘러싸고 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레이라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