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발루아 제국과 국경을 맞댄 리히덴 제국. 아무리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리히덴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까지 모르지는 않았다.
“제가 꺼낸 얘기지만, 이걸 들고 나서면 아르제오가 곤란해지지 않나요?”
“그러니까 그대가 쓰는 거지.”
아르제오는 냉큼 제 목걸이를 빼 그녀의 손에 들려 줬다.
황가의 문장을 들고 나타난, 알려지지 않은 의문의 여인. 저들이 혼란을 겪을 걸 생각하니 아르제오는 절로 웃음이 났다.
“제가 쓴다고 정말 모를까요? 시간이 지나면 아르제오라는 걸 알게 될 텐데.”
“시간이 지나서 알면 상관없잖아. 지금만 모르면 되지.”
“그런가요.”
“그래, 게다가 재미있을 것 같잖아?”
이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재미를 추구해야 만족하는 걸까.
그런 레이라의 표정이 빤히 읽혀서 아르제오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권력을 쓰는 방법은 제각각이지. 그대의 방식도 나쁘지 않다고 난 생각해.”
이어진 그의 말에 레이라는 작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권력을 휘두르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신분제도도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화목한 가정환경과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레이라는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하는 것이 더 좋았다.
“하지만 올바른 곳에 쓰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고.”
씩 입꼬리를 끌어 올린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가 차분히 물었다.
“아르제오의 역할을 제게 대신 하라는 거죠?”
“그대 뜻대로.”
그의 대답에 레이라는 제 손에 든 목걸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대는 역시 좀 별난 사람이야.”
“그런가요?”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던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들지. 말투도 그렇고.”
“말은 이게 편해서예요. 그러는 아르제오도 타국의 귀족이라는데 여전히 말투가 자유롭잖아요.”
“아, 황궁 밖에서는 습관이 들어서. 불편했어?”
아르제오의 물음에 레이라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리고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주 들었거든요. 황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싱긋 미소 짓는 레이라를 아르제오가 가만히 응시했다. 그 말이 본인 귀에 들어갔을 정도이니, 얼마나 사람을 우습게 보았을까.
“스스로도 어울리지 않게 행동하기도 했어요.”
마치 아르제오가 그렇게 말한 이들을 탐탁지 않게 여길 걸 생각한 듯. 슬쩍 웃으며 두둔하고 나서는 면이 조금 불만스러웠다.
“자, 우린 서둘러 여기서 나가야 하고, 그대 손엔 권력이 쥐어졌어. 이 정도면 쉽게 일을 해결하고 우리 갈 길을 갈 수 있겠지.”
“나중에라도, 아르제오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죠?”
레이라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으니 아르제오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족은 나 말고도 또 있으니까. 황태자 외에도 황자가 두 명이나 있지. 하지만 황녀는 없어. 그런데 돌연 황족의 문장을 들고 나타난 의문의 여자. 어때, 재밌지?”
“아르제오를 보면 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정말 제정신인 거 맞죠?”
“그럼!”
크게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는 눈매를 휘며 빙긋 웃었다.
“게다가 이 일을 조사하러 병사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즈음엔, 우리가 없을 거야.”
그렇게 되면 오히려 유인한 꼴이 된다. 그들의 목적지도 저쪽은 알 수 없으니, 그 틈에 빠르게 수도로 들어가면 될 터였다.
테론 영지가 갈림길에서 멀지 않지만, 그렇다고 병사들이 곧장 갈림길로 올 가능성은 적었다.
목걸이를 매만지며 고민하던 레이라가 이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재미있겠네요.”
* * *
테론 영지에서 쫓겨난 이들의 행적을 좇아 유진은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영지로 들어서기 전에 만났던 에드를 다시 만났다.
에드는 영지에서 멀리 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서, 어떻게 다시 돌아갈지를 궁리하고 있었다.
혹시 내쫓긴 마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물으니, 그는 모른다고 답했다.
여기저기 흩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답했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들 대부분이 가족과 떨어지거나, 마을을 떠날 마음이 조금도 없는 이들이었으니.
다시 마을로 돌아갈 궁리를 하며 주변을 맴돌고 있을 거라고.
유진은 에드의 말대로 말을 타고 주변을 살핀 다음, 빠르게 영지로 복귀했다.
물론, 돌아온 조각가 마을은 병사들이 봉쇄하고 있었다.
“……”
봉쇄된 마을을 보며 유진은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간절히 바라는 눈치였지만, 안타깝게도 유진의 예상은 적중했다.
마을 외곽 쪽에서 짐을 다 챙겨 들고 기다리던 아르제오와 레이라를 발견했으니.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을 보니 유진은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왜 나와 계십니까?”
“바로 가려고.”
“아…. 예, 뭐. 보고할 정보는 이제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진은 마을을 봉쇄한 병사들을 힐끔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통제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요.”
“응. 황태자 전하께 이 사태를 보고할 거라고 했거든.”
“예? 누구한테요?”
“영주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아르제오의 대답에 유진은 이마를 짚었다.
“왜 또 그런 일이….”
아르제오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유진의 후드를 쭉 잡아당겼다.
“우리는 얼굴만 제대로 가리면 돼. 나머지는 레이라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예? 공녀님이 뭘….”
“네,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싱긋 웃는 얼굴이 아르제오와 퍽 닮은 것 같아 불길했다.
“뭘 어쩌시려고….”
“얌전히 보고 있어. 좋은 구경시켜줄 테니까.”
눈매를 휘며 입꼬리를 올리는 그 특유의 매혹적인 표정이, 유진은 더없이 불안했다.
일단은 시키는 대로 로브 후드를 써 얼굴을 꼼꼼하게 가리고, 짐을 챙겼다. 그러고는 레이라가 앞장서서 마을을 봉쇄한 병사들에게 향했다.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이 마을에서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영주님의 명입니다.”
“어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레이라의 뒤에 선 아르제오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당황한 유진이 뜯어말릴 새도 없이, 레이라가 병사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 마을을 벗어나는 것이 불만이라면, 영주를 이리로 불러오세요. 당장 오지 않으면 우린 이대로 이곳을 떠날 테니까요.”
병사들은 몰아붙이는 이들의 태도에 주춤거렸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병사들은 그들의 신분을 알 턱이 없고, 그들에게 있어서는 영주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망설이는 그들을 위해 두 사람이 준비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레이라는 제 품에서 황족임을 증명하는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이래도 영주의 명령이 우선인가요?”
“그, 그건….”
레이라가 당당히 꺼내든 목걸이를 발견하고 당황한 것은 비단 병사들 뿐이 아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이를 악문 유진이 아르제오의 귓가에 나지막이 절규했다.
“있어 봐봐, 재밌는 구경 시켜 줄게.”
“그 재밌는 구경 때문에 제가 제 명에 못 삽니다…!”
이마를 짚는 유진을 보면서 아르제오는 키득거리기만 했다.
“정 우리를 막아야겠다면, 지금 당장 영주를 불러오세요.”
뒤의 두 사람이 장난을 치든 말든, 레이라는 앞에 선 병사에게 요구했다.
병사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보더니 이내 한 명이 다급히 뛰어갔다.
* * *
차분히 그곳에서 기다리니, 병사와 함께 영주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아마도 목걸이의 존재를 알려 저리 헐레벌떡 뛰쳐나온 것이리라.
그리고 레이라를 발견한 영주는 감출 생각도 못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한낱 상인이라는 여자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황족의 목걸이를 언급한 이상, 진짜인지 확인해야 했다.
헐레벌떡 달려오는 영주를 보고 아르제오와 유진은 후드를 더욱 눌러썼다.
“오셨네요. 저흰 이만 이곳을 떠나려고 하는데, 병사들이 영주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막지 뭐예요.”
눈꼬리를 휘며 싱긋 웃은 레이라가 영주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께 보고할까 봐 못 나가게 하시는 거죠?”
“한낱 상인이, 정말 황태자 전하께 보고라도 할 수 있다는 건가?”
영주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자존심에 굽히고 들어갈 수 없었다.
깔보는 태도에 레이라는 덤덤히 대응했다.
“병사들의 보고를 들었을 텐데도 그런 태도로 나오시는 건, 황족을 업신여기는 건가요?”
“뭐?”
영주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레이라는 다시 한번 아르제오의 목걸이를 내보였다. 그걸 확인한 영주의 얼굴은 단번에 굳어졌다.
“어째서….”
그녀는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황족의 문장이 새겨진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 걸까.
의문투성이였지만, 일단 황족의 목걸이는 진짜였다.
“조각가 마을에서 손을 떼세요. 내쫓은 마을 사람들도 다시 불러들이고요.”
이어진 레이라의 말에 영주는 입술을 짓씹으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무리 황족이라도 영지 내의 일은 제 관할입니다. 함부로 관여하실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영주의 말에 동의하듯 유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지금 영주님이 하고 계신 건, 한 치 앞도 못 보는 어리석은 장사치의 행동이에요. 이곳의 조각품 질을 떨어트리는 일이고요.”
“그렇다고 해도, 제 영지 내의 일입니다. 그 목걸이를 어디서 얻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이네요.”
레이라가 영주의 말을 뚝 자르며 말했다. 그에 영주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특유의 차분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저는 그저 이곳의 조각품을 거래하는 상인으로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곳을 떠나고 나서도 계속 이러한 일이 반복되어, 조각품의 질이 떨어진다면.”
그녀는 손에 쥔 목걸이로 슬쩍 시선을 떨어트렸다. 겉면을 매만지니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때는 누가 움직여도 움직이겠죠. 황녀가 없는 리히덴 제국이니, 영주께서는 제가 가지고 있는 이 목걸이가 어느 황족의 것인지 가늠할 수 없으실 테고요.”
목걸이로 떨어트렸던 시선을 다시 영주에게로 옮긴 레이라는 싱긋 웃었다.
“전 계속 멋진 조각품들을 보고 싶거든요. 영주님의 방법으로는 조각가들을 갉아먹고 결국 조각품의 질을 떨어트릴 거예요. 그렇게 되면, 조각품의 가치는 떨어질 거고 값은 내려가겠죠. 조각품들을 찍어 내느라 건강을 해친 조각가들은 나가떨어지겠죠. 끝이 빤히 보이는데 계속 밀고 나가실 만큼 어리석진 않으시겠죠.”
“……”
레이라는 보란 듯이 목걸이를 제 목에 걸고는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아르제오와 함께 말에 올랐다.
“선택은 영주님께 맡기겠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제가 움직여야죠.”
선택을 맡기겠다고 하지만, 사실상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영주는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에 올라탄 레이라를 노려보았다. 그런 영주를 향해 그녀는 여유롭게 미소를 보였다.
“장사를 하려면 제대로 하셔야죠. 못된 마음은 결국 결과가 아쉬운 법이니까요.”
레이라 일행은 곧장 할 말을 잃은 영주를 두고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