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28)화 (28/122)

<28화>

“그럴 리 없다.”

영주는 아주 확신에 차서 말했다.

“어떻게 장담하시죠?”

“제도에서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으실 테니.”

“그럼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신경 쓰시는지 어떨지.”

제도에는 저와 같은 귀족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리히덴은 병들어 있었고, 귀족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주머니만 챙기기 바빴다.

그러니 이곳의 일이 전해진들, 공론화되어 대대적인 시위라도 벌어지지 않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데 왜 저리도 자신만만한 거냐.’

괜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신감이었다.

“그런 거,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황태자 전하께서는 제국민들을 살피고 계십니다.”

확신하는 말투였다. 눈빛도, 목소리도.

“황태자 전하의 눈과 귀가 되는 이들은 많습니다. 제국민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말이지요.”

마치 본인이 그렇기라도 하다고 말하는 듯한 투였다.

“본인이 그렇다고 말하는 건가?”

“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싱긋 웃는 표정은 확신에 넘쳤다. 그냥 넘기기 껄끄러워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제국민들을 세심히 살피고 계시는 건 장담할 수 있죠.”

영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레이라를 응시하다가 이내 등을 돌렸다.

“지금부터 이 마을 밖으로 개미 새끼 하나 못 나가게 해라.”

“예.”

병사에게 그리 명령한 영주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레이라를 슬쩍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곧 성큼성큼 멀어졌다.

신경질적인 걸음걸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아르제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쩔 거야?”

“저희한테는 비장의 패가 있잖아요.”

“그게 뭔데?”

레이라가 손가락을 곧게 뻗어 아르제오의 가슴 부근을 쿡 찔렀다.

“여기에 있는 거요.”

그녀는 황족임을 증명하는 펜던트를 말한 거지만, 그 행동은 어쩐지 도발적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아르제오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은근히 저돌적이라니까.”

“그런 걸로 해요.”

웃으며 대화하던 두 사람은 곧 영주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웃었냐는 듯이 표정을 굳힌 채로.

유진을 기다리면서, 영주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는 두 사람에게 여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저….”

아직도 훌쩍이는 아이의 손을 꼭 붙든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 * *

그녀는 조각가 중 하나인 메이린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돌 캐는 일을 하던 남편은 최근 어깨를 조금 다쳤는데, 그걸 빌미로 내쫓겼다고 했다.

“상인이라고 하셨죠?”

“네? 아, 네.”

확인하듯 재차 묻자 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린은 아르제오와 레이라를 작업 홀 옆의 작은 응접실로 안내했다.

“조각품 독점권을 얻어 어쩌실 생각이세요?”

“네?”

익숙한 몸짓으로 차를 내리며 메이린이 물었다.

테론 영주의 횡포에서 조각가 마을을 자유롭게 해 주려고?

‘…아니.’

그들 입장에서는 레이라도 영주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었고, 상인이라고 하니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조각가가 만족하는 조각품을, 타국과 거래하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메이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제 옆에 앉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까 말씀하신, 독점권을 넘기지 않으면 황궁에 고발하겠다는 얘기는요?”

이어진 질문에 레이라는 슬쩍 아르제오를 바라봤다.

“어차피 이 일은 황태자 전하께 보고될 거예요.”

레이라는 메이린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했다. 아르제오가 이 상황을 보았고, 그가 황태자에게 이 일을 알릴 테니.

“다만, 지금 여기서 제가 독점권을 주장하며 마을의 관리를 손에 쥔다면. 테론 영주의 손에서 여러분이 해방될 테니까요.”

하지만 황태자에게 전해질 거라는 말에도 메이린의 표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께…. 이 일이 알려진다고 뭐가 나아질까요?”

그 표정에서 느껴진 감정은 좌절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덤덤함이었다.

과연 이 일이, 황태자의 귀에 들어간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테론 영주가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왜?’

레이라의 머릿속에는 작은 의문이 피어났다.

아르제오를 시켜 제국민들의 생활을 살피고, 보고를 듣는다. 아르제오가 거짓된 보고를 올릴 리도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황태자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하는 걸까?

“움직이실 거다. 그리 보고할 테니.”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르제오가 덤덤히, 그러나 강조하듯 말했다.

“그런가요….”

하지만 메이린은 여전히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을 망설이는 듯했다. 그런 메이린을 보며 레이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란 말은 못 하겠네요.”

“괜찮습니다.”

약자가 핍박당하는 일은 빈번히 일어났다. 가진 자들은 제 배를 불리는 일에만 열중했고.

병들어 가는 리히덴 제국의 국민들은 이제 이런 일들이 조금 익숙한 듯도 보였다.

레이라는 살포시 주먹을 움켜쥐며 메이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전 최선을 다할 거예요.”

상황이 바뀔 거라는 장담은 못 한다. 그녀의 힘이 턱없이 부족했으니.

그러나 이런 것들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있음은 분명했다. 아르제오가 하는 일이 그랬다.

황태자가 그에게 그런 일을 명한 것.

아르제오가 실행하는 것에 정치적 이유가 있을지언정, 거기에 국민을 살피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레이라가 어째서 저리 또렷한 눈빛으로 말하는지 메이린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저기, 메이린. 잠시만….”

“아, 응. 지금 갈게.”

응접실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 한 여인의 부름에 메이린이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괜찮아요.”

메이린은 그냥 자리를 뜨려다, 제 옆에서 훌쩍이던 아이를 살폈다.

무릎을 세우고 끌어안아 얼굴을 콕 박고 있었다.

훌쩍임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으니, 그 상태로 잠이 든 것 같았다.

메이린은 금방 다시 돌아오겠다며 잠시 응접실을 벗어났다.

고요해진 응접실에, 레이라는 가만히 웅크린 아이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줄곧 얌전히 있던 아르제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레이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대, 정말로 조각품을 사들일 생각이야?”

“네.”

“발루아와 거래하게 하려고?”

“전 기왕이면, 발루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도 거래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일을 크게 벌이네. 정말 상단이라도 차릴 셈이야?”

“나쁘지 않죠. 죄인이라 불가능할 테지만요.”

“그대 같은 성정에, 하루아침에 상단을 말아먹을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작게 웃었다.

지나치게 상냥하고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니, 손해 보는 장사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스스로 못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 퍽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면 잘할 거예요.”

그리고 못 한다고 그냥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도.

“그래, 뭐…. 배우면 잘하겠지.”

그 상냥한 성정을 조금만 억누르면 말이다.

뒷말을 삼킨 아르제오는 싱긋 웃었다. 억눌러야 할 정도의 상냥한 성정이라는 생각이 우스워서.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상단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일단은 유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그대는 수도로 가는 것을 최우선 해.”

이건 어디까지나 리히덴 제국의 일이었다.

선을 긋는 듯한 아르제오의 태도에 레이라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서둘러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벌써 보름이 지나가고 있었고, 헤레이스라면 자신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터였다.

너무 간섭하지 않는 편이 좋은 걸까. 그래도 눈앞의 울고 있는 아이를 모른 체할 수는 없었지만.

“그저, 억지로 가족과 떨어지는 일은 없었으면 할 뿐이에요.”

웅크린 아이를 응시하며 레이라가 하는 말에 아르제오는 한숨을 삼켰다.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은 건가.’

하긴, 당연한 얘기였다. 그녀의 가족은 자신의 가족과는 달랐으니.

포레스티아령은 전해 들은 얘기만으로도 살기 좋은 곳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만큼 포레스티아 공작이 가족도, 영지민들도 잘 돌본다는 뜻이었다.

그런 평화로운 곳에서 계속 살아왔으니, 이런 나라에서 돌아가고 싶은 게 당연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 일을 알리면 상황을 수습해 주실까요?”

아이를 바라보던 레이라가 고개를 돌려 아르제오를 마주하며 물었다.

아르제오는 그녀의 똑바른 시선을 받아내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움직일 거야. 다만 보고를 한다면 우리의 위치도 알려지겠지.”

“서둘러야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황태자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갈까 봐 영주가 마을을 봉쇄했다.

보고를 하면 위치를 들킬 테니 빠르게 움직여야 잡히지 않을 터였다.

어떻게 해야 황태자에게 잡히지 않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줄곧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아이는 조금 당황스러운 질문을 툭, 던졌다.

“형이랑 누나가 마을을 빠져나가면, 황태자 전하가 우리를 구해 주러 오나요?”

아이의 천진한 물음에 아르제오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황태자를 움직이게 할 수는 있었다. 그 정도 패는 쥐고 있으니.

하지만 그 패는 다른 쪽도 움직이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아르제오는 나름의 중립을 지키며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평화를 최대한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레이라를 무사히 바래다주는 걸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네? 형이랑 누나가 마을을 나가서 황태자 전하께 알리면, 우릴 도와주러 오시나요?”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르제오 때문에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노력해 볼게.”

그렇게 대답하는 레이라는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자신 있게 해결해 주겠다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 답답했다.

“꼬마야, 가서 어머니께 우린 돌아갔다고 전해.”

줄곧 입을 닫고 있던 아르제오는 툭 내뱉듯 그렇게 말하더니 레이라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아마 누가 움직이긴 할 거야. 확실하게.”

아르제오는 아이를 향해 씩 입꼬리를 올리고는 레이라와 함께 응접실을 벗어났다.

“어디 가요?”

앞서 걷는 아르제오를 뒤따르며 레이라가 물었다.

“어차피 유진을 기다려야 하니, 영주의 반응을 기다리는 거 아니었어요?”

“생각이 바뀌었어.”

그는 벌써 마을을 둘러싼 병사들을 힐끔거리고는 레이라를 골목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골목 입구를 등졌다.

“그대 말대로, 비장의 패를 쓰자. 벌써 시간을 꽤 지체했어. 너무 끌면 그대가 곤란해질 거야.”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는 레이라도 동의했다. 헤레이스가 망가진 섬을 발견한다면, 분명 자신을 찾겠다고 할 터였다.

“대신, 이건 그대가 쓰자.”

“제가요?”

“응,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재미요?”

“아니지, 말이 잘못 나왔네. 그게 더 빠져나가기 좋을 테니까. 우리의 위치를 들키지 않고.”

씩 입꼬리를 올리는 아르제오를 레이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했다.

이런 상황에도 저런 농담을 할 생각을 한다니.

조금 불퉁한 레이라의 표정을 아르제오가 즐기는 듯이 마주했다. 그러고는 눈매를 곱게 휘며 제 목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기다란 손가락에 걸려 옷 안에 감춰져 있던 목걸이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그 펜던트를 확인한 레이라는 눈을 깜박이며 아르제오를 올려다보았다.

“그대 말대로, 비장의 패를 쓰면 일이 좀 더 쉽게 풀리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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