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나직이 중얼거리는 아르제오를 힐끔거린 레이라는 다시 마을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가요.”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이야. 멍청할 정도로 욕심이 과하고.”
멍청할 정도의 욕심이라는 말에는 레이라도 동의했다.
영지민들의 희생 위에 채워진 영주의 주머니. 오로지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영주라면, 분명 그다지 똑똑하진 않을 것이다.
“저들을 저렇게 부리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좋지 않아. 결국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그러게요.”
사람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제 이익을 위해 저들을 몰아붙이다 결국 무너지면, 손해만 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않고 오직 눈앞의 이익만 보니, 멍청할 정도의 욕심이라는 거였다.
가만히 마을 사람들을 지켜보던 레이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그 말에 아르제오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 그늘을 만들어 줬잖아?”
“고작 그늘밖에 만들어 주지 못하잖아요. 보기에만 거창하지…. 대단하지 않아요.”
아르제오가 보기엔 충분히 대단했다. 고작 그늘을 만들겠다고 이렇게 거대한 나무를 길러 내니.
하지만 레이라는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뭘 어떻게 하고 싶은데?”
아르제오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이 상황을 해결해 주고 싶죠.”
“모든 걸 그대가 해결하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영주가 제 영지민에게 횡포를 부리는 거라면, 그들이 맞선다고 해도 일이 해결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저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가만히 앉아서 도움만 받는 자세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레이라는 턱을 매만지며 마을 사람들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다만 시선만 그리로 향해 있을 뿐,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그렇게 뒤바꾸기가 저로서는 역부족이네요.”
“왜?”
레이라가 되묻는 아르제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대는 포레스티아 공녀이고, 공작가가 매우 아끼잖아. 게다가 무려 황자인 내가 그대를 돕고 있는데, 뭐가 역부족이라는 거야?”
언제는 마음 쓰지 말라더니 지금은 왜 못하냐고 등을 떠밀고 있었다.
물론 아르제오는 그저 풀 죽은 레이라가 보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지만.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레이라는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요.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아요.”
한순간 청록색 눈동자가 물결치는 듯이 보였다.
짙은 미소를 머금은 레이라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만 가요.”
“어디로?”
목적지를 묻는 아르제오에게 레이라는 손을 내밀었다. 그가 무심코 그 손을 붙잡으니 그녀가 잡아당겨 그를 일으켜 세웠다.
레이라는 아르제오의 등을 떠밀며 조금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러요.”
* * *
“뭘 어쩌려고?”
“글쎄요.”
“나한테는 얘기를 해 줘야지.”
“그러네요. ‘무려 황자인’ 아르제오가 제 편이니까요.”
싱긋 웃는 레이라는 어쩐지 조금 전 그의 말을 놀리는 듯했다.
‘왜 그런 말을 했지.’
제가 말해 놓고도 아르제오는 그 말이 후회스러웠다.
본인이 말할 때는 몰랐는데, 그녀의 입으로 들으니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날 이렇게 놀려 먹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을 거야.”
“영광이네요.”
포기한 듯한 아르제오의 중얼거림에 레이라가 싱긋 웃었다.
어쩜 이렇게 한마디를 안 지냐고 생각하며 그는 이마를 짚었다.
그런 그에게 레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쨍그랑!
돌산을 내려와 조각가 마을로 들어서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무언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음과 아이의 울음소리.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란이 있던 방향으로 조급한 걸음을 뗐다.
웅성거림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레이라는 걸음을 늦췄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바닥에는 산산이 조각난 조각품이 있었다. 그 옆에서는 작은 아이가 울고 있었다.
제일 처음 레이라의 눈에 들어온 건 울고 있는 아이였다. 아이는 아빠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더는 이렇게 조각할 수 없습니다. 이런 조각품을 내놓을 수 없어요!”
“내놓지 않으면 세금은 어쩔 셈이지?”
병사 몇을 대동한, 척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이가 비웃으며 물었다.
주변의 수군거림으로 들어서는, 조각품을 깬 건 아이의 엄마인 조각가인 모양이었다.
“그런 부당한 세금, 낼 의무 없습니다!”
“그럼 이 영지를 떠나야겠군.”
여자는 분한 듯 이를 악물고 귀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렇겠군. 조각가 자리가 비면 남은 이들이 더 잠 못 자고 조각품을 만들어야겠어.”
주변에 모여든 이들을 훑으며 귀족이 말했다. 조각품을 깬 여인은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분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귀족은 주변에 몰려든 이들을 슬쩍 훑고는 이마를 짚었다.
“잊은 건 아니겠지? 당신들이 조각하고 버린 돌조각 때문에, 영지의 다른 곳에서 큰 피해를 봤어.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대로 조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은 무리입니다. 더는 이런 조각품을….”
여자는 제 머리를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자신이 즐겁게 만들지 않은 건 보는 사람도 즐겁지 않을 터였다.
이런 일그러진 마음으로 만들어 봤자,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조각품만 나올 뿐이었다.
“조각품을 평가하는 건 당신들이 아니다. 제품을 사는 사람들이지. 그들 마음에 들면 그만이고, 이쪽은 돈을 받고 팔면 그만이다. 잔말 말고 계속 만들어.”
“……”
주변을 둘러쌌던 이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작은 소란에 대한 외면이었다.
어차피 이 상황은 변하지 않을 테고, 자신들은 어쩔 도리도 없었다.
“…아빠…. 아빠가 보고 싶어요….”
옆에 선 아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여자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귀족은 걸음을 떼려다 말고 아이를 돌아보았다.
“네 아비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살고 싶다면 너도 네 어미에게 조각을 배우도록 해.”
서늘한 중년 귀족의 시선에 아이는 하얗게 질렸다.
그냥 지켜봐야 할까, 잠시 망설였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본래의 성정이 그런 것도 있지만, 기억에 남은 노엘의 모습에 어쩐지 등을 떠밀린 기분이었다.
그 노엘과 지금 아르제오의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제가 유배지로 떠날 때도 로이드보다 가슴 아파했었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남동생 같은 존재였다.
“테론의 영주이십니까?”
높게 묶은 백금발이 레이라의 등 뒤로 살랑였다. 떼는 걸음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귀족은 이 상황에 누군가 끼어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미간을 찌푸렸다.
천천히 돌아보는 귀족을 향해 레이라는 짙은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누구시오?”
눈썹을 치켜올린 귀족을 똑바로 직시하던 레이라는 살짝 고개를 떨어트리며 예를 갖췄다.
“조각품을 거래하러 온 상인입니다.”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그녀의 뒤에 선 아르제오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상인이었군요. 이런, 조금 전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상인이라는 말에 귀족은 곧장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괜찮은 물건이 많습니다.”
“네, 확실히 그렇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는 슬쩍 주변을 훑었다. 그러고는 자신에 찬 얼굴로 영주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마을의 조각품의 독점권을 살까 합니다.”
“예?”
영주는 제 귀를 의심하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 마을을 포함한 영지의 일부를 사고 싶지만, 그건 싫으시죠? 그러니까 이 마을 조각품의 거래 독점권을 사려고 해요.”
“가진 돈이 많은가 봅니다?”
귀족이 슬며시 비웃으며 레이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마도 상인이라고는 하나, 그녀를 뭣 모르는 햇병아리쯤으로 보는 듯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레이라의 대답에 아르제오가 살며시 레이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쩌려고 그래? 돈 없다며.”
그러자 레이라가 씩 웃으며 눈매를 휘었다. 한순간 매료될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녀는 아르제오에게 바짝 다가서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제 이름으로 달아 놔요.”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르제오는 한순간 가슴이 뛰었다.
당장 레이라의 뺨에 손을 댈 것 같아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당한 태도로 고개를 돌린 레이라는 다시 영주를 보며 말했다.
“조각품 독점권을 넘기시면, 이 마을은 제가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영주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빤히 보이는 표정에도 레이라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런 조건을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자세한 사항은 조용한 곳에서 대화로 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
영주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 쳤다. 주변을 둘러쌌던 이들은 수군거리며 자리를 뜨지 못했다.
“거절하겠소.”
당연한 얘기라는 듯 영주는 홱 등을 돌렸다.
그에 레이라는 주변에서 들으란 듯이 크게 말했다.
“전 갖고 싶은 건 꼭 갖습니다. 제 제안을 거부하신다면,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황궁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이를 눈치챈 영주는 입술을 짓씹으며 으르렁거리듯 경고했다.
“당신들 일 안 해?”
모두 흩어지라는 소리였다. 지켜보던 조각가들이 하나둘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조각을 깨트렸던 그 여자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아직도 훌쩍이는 아이의 손을 꼭 붙든 채로.
영주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곧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레이라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상인이 당신만 있는 줄 알아? 이 조각품을 사겠다는 상인들은 제국에 널렸어. 헛소리 말고 돌아가.”
위협적인 그 태도에 아르제오가 슬쩍 레이라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그런 그의 옆으로 고개를 쏙 내밀며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지금 이곳에서 당신이 벌이고 있는 일이 부당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죠? 그러니 황궁에 보고하는 것을 꺼리는 거고요.”
“내 영지에서 무슨 일을 하든 내 권한이다. 언제부터 황궁에서 이런 변방의 영지까지 신경을 썼다고….”
코웃음 치는 그 말에 아르제오는 표정을 굳혔다.
“신경 쓰고 계시다면요?”
“뭐?”
레이라의 반박에 영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리히덴 제국은 병들어 있었다. 부패한 귀족들이 활개를 쳤고, 제도 외의 변방 영지의 일에는 그다지 나서주지도 않았다. 테론의 영주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라 역시 그가 모르는 걸 알고 있었다. 바로 아르제오가 제국을 떠돌며 이러한 일들을 전부 황태자에게 보고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레이라는 자신에 차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런 변방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다 신경 쓰고 계신다면 어떡하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