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생각해 보면, 이전에 꽃을 피워주었을 때도 아이는 레이라에게 물었었다. ‘마법사’이냐고.
만일 그 물음에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마법사는 그런 것들이 가능한 사람들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레이라가 대단한 건, 마법사가 아님에도 그런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힘이 마법이 아니기에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마법인지 아닌지 평범한 사람들은 구분하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면 마법이라고 하면 그만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레이라는 곧장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산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섰다.
“잠깐, 레이라!”
혼자서 성큼성큼 나아가는 레이라를 아르제오는 재빨리 뒤따라 나섰다.
“뭘 하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금 빠른 걸음을 내디디는 레이라를 단숨에 따라잡은 아르제오가 물었다.
“그늘을 만들어 드리려고요.”
“뭐?”
아르제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꽃을 피우는 신기한 광경은 몇 번이나 보았다. 참 대단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무를 키워 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혼란스러운 아르제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라는 괜찮은 나무를 찾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당장 그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나무를 키워 낼 수 있다고?’
정말이지, 도대체 그녀는 얼마나 더 대단한 것인가.
‘진짜 뭐 하는 사람이지.’
그 대단한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아끼는 공녀.
발루아 제국의 황후 자리까지 올랐다가 억울한 누명으로 폐위된 사람.
분통이 터지지도 않는지 스스로 죄인이라고 잘도 말하는 사람.
죽음의 땅에 유배 보내졌음에도 전혀 주눅 들지도 않고, 오히려 유배지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
흔한 귀족 영애들과는 좀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저돌적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 저기 있네요. 아르제오, 저 나무라면 충분히 그늘을….”
뒤를 돌아보며 말을 잇던 레이라는 발을 헛디뎌 한순간 쭉 미끄러졌다.
꺅, 하고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는 그녀를 아르제오가 순식간에 낚아채 잡아당겼다.
털썩, 뒤로 넘어진 아르제오의 품에는 레이라가 안겨 있었다.
한 손은 가느다란 손목을, 다른 팔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정말이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고마워요….”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곧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픽 웃었다.
바닥에 넘어져 누운 상태로 마주한 그 얼굴은 조금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마도 이 눈매 때문에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조심해야지.”
“네, 조심할게요.”
안겨 있다시피 하는 이 상황에서도 차분히 대답하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대는 동요라는 걸 몰라?”
“알죠.”
“근데 이 상황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네. 조금은 당황스러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르제오도 당황하지 않았잖아요.”
“난 놀랐지. 그대가 다치는 줄 알고.”
“저도 놀랐어요.”
“지금 이 상태는 당황스럽지 않고?”
“…당황스러운 편이에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얼굴로 대답하니 아르제오는 픽 웃었다.
“그 얼굴로? 알아채는 이가 있는지 의문이야.”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레이라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더 심장이 크게 뛰었다가는 아르제오에게 심장 소리를 들킬 것만 같았다.
“저기에 있는 나뭇가지만 꺾어서 돌아가요.”
대충 옷을 턴 레이라가 저 앞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곧장 걸음을 떼려는 그녀를 아르제오가 재빨리 붙잡았다. 그리고 작은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언제 또 넘어질지 모르니까.”
그러면서 손을 잡은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가리켰던 나무에 다다라서도 아르제오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레이라는 손을 뻗어 나뭇가지의 끝자락을 살짝 부러뜨려 손에 들었다.
“그거면 충분한 거야?”
“네.”
고작 나뭇가지 끝자락. 그것만 가지고도 나무를 키워 내다니.
이대로 레이라가 리히덴 제국에 머물러 주면 좋을 텐데.
스스로 한 생각이 우스워 아르제오는 작게 웃었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인가.
‘고르자면 내가 공작령으로 가는 게 좋지.’
혼자 고개까지 끄덕이며 하는 생각을 레이라는 알 리가 없었지만.
“이제 돌아가요.”
레이라는 짤막한 나뭇가지를 손에 꼭 쥐고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돌아가는 길에도 아르제오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로지, 다시 넘어지면 어쩌냐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여기서부터는 길도 고르니까 괜찮아요.”
“안 돼. 그대는 생각하면 곧장 행동에 옮기는 경향이 있어. 붙잡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딱히 그러지는 않아요.”
“아니, 아니, 그런다니까? 물가에 애를 내놓은 기분이 아마 딱 이런 걸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르제오, 나이가 어떻게 되죠?”
“음?”
“자꾸 어린애 취급을 하니까요. 그러는 아르제오는 올해로 몇 살인가 싶어서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는 도르륵 눈을 굴렸다. 어쩐지 그녀가 선수를 쳐 버린 탓에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너무 불리한데?”
“뭐가 불리해요?”
“내가 먼저 나이를 밝히면, 몇 살이든 그대가 그보다 많다고 하면 어떡해?”
“안 그러면 되잖아요.”
“싫어, 왠지 말하기 싫어졌어.”
“사실 엄청 어리죠?”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 레이라를 보고 아르제오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 보여?”
씩 끌어 올린 입꼬리와 길게 늘어진 눈매가 어쩐지 얄미웠다.
“됐어요. 안 들어도 될 것 같네요.”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레이라는 곧 다시 마을 사람들이 돌을 나르던 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두 사람이 자리를 뜬 것에 개의치 않고 다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일하는 이들이 대폭 줄어들어서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촉박하니.
“휴식을 취할 나무 그늘은 어디쯤 만들면 좋을까요?”
돌아온 레이라가 묻는 말에 다시 일하던 마을 사람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즈음에 있으면 좋긴 할 텐데…. 만들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에 레이라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손, 안 놔줄 거예요?”
그늘을 만들 자리에 도착한 레이라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르제오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어, 잡은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놓아주었다.
레이라는 그대로 쭈그리고 앉더니 메마른 흙바닥에 나뭇가지를 꽂았다. 그리고 그 앞의 땅에 손을 얹었다.
아르제오는 마을 사람들을 등진 채로 레이라의 고운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벌써 여러 번 봤는데도, 그녀가 그 신비한 능력을 쓰는 모습은 봐도 또 보고 싶었다.
옅은 청록빛이 레이라의 손에서 땅으로 스며들자, 땅에 꽂았던 나뭇가지가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무럭무럭 자라난 작은 가지는, 곧 그 가지를 꺾었던 나무보다 더 크게 자라났다.
그리고 남자가 말했던 곳에 정말로 시원한 나무 그늘을 만들어 냈다.
“이, 이, 이게….”
그들은 저마다 들고 있던 돌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마법사이셨습니까…?”
그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중얼거렸던 중년 남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네.”
차분한 레이라의 대답에 아르제오는 조금 의외라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올곧은 성정이라 거짓말은 서툰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영지로 들어설 때도 꽤 연기를 잘했지.’
한껏 입꼬리를 끌어 올린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왜 웃어요?”
“그냥.”
의외로 융통성 있는 구석이 또 퍽 마음에 들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싱긋 웃으며 나무 그늘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마법사임은 부디 비밀로 해주세요. 그저 마음 놓고 휴식이라도 취하실 수 있었으면 해서 한 일이니까요.”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년 남자는 이내 사람 좋게 웃었다.
“마법사셨군요. 비밀로 해 달라시면 함구해야지요. 뭐라 감사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차례 정중히 고개를 숙인 남자는 터벅터벅 나무 그늘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시원하고 상쾌했다.
그 중년 남자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도 쭈뼛거리며 나무 그늘로 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물을 마시며 잠시 바람을 맞은 그들은 곧 긴장을 풀고 평소처럼 몇 마디 주고받으며 휴식을 취했다.
“폴은 어디로 갔는지 혹시 들으셨습니까?”
“아니. 이런 상황에 소식을 어떻게 전하겠어. 다들 어디로 갔으려나….”
“누군가 이곳을 떠났나요?”
늘 있는 신세 한탄에 가까운 그들의 대화에 레이라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대거 떠났지요. 솔직히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어허, 이 사람아. 말조심하게.”
중년 남자가 엄한 얼굴로 말하니 조금 긴장을 늦추고 떠들던 젊은 남자가 입을 닫았다.
레이라가 그들의 눈치를 살피니 이번엔 아르제오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에드라는 사람에게서 이곳을 상황을 대충 들었습니다.”
“에드? 에드를 만나셨습니까? 혹시 어디로 갔는지는 아십니까?”
익숙한 이름이었는지 중년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급히 물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릅니다.”
“그, 그렇습니까….”
조금 냉정하게 들리는 아르제오의 대답에 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레이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을 살폈다. 휴식을 취하고 있어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눈 밑은 퀭했고, 피부는 푸석푸석하며 입술도 다 갈라져 있었다. 그런 얼굴들로 잠시 앉아 바람을 쐬더니 곧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자, 일들 하자고.”
“벌써 다시 일하시려고요?”
“일이 많습니다.”
싱긋 웃은 남자는 곧 다시 일을 재개했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레이라의 염려 어린 말에도, 그들은 그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요. 지금 같은 상황으로는.”
“일손이 너무나 부족해서 이 이상 누군가 하나 빠졌다가는 모두가 과로로 쓰러질 겁니다.”
지금 당장도 누가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들이었다.
고작 마법사라고 속이며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좀 더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다시 일하기 시작한 그들을 지켜보며 레이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녀를 아르제오는 그늘로 밀어 넣고는 그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덤덤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테론의 영주도 멍청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