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25)화 (25/122)

<25화>

“그렇게 자신을 몰아세우면, 아르제오는 언제 마음 편히 쉬겠어요.”

레이라는 순전히 아르제오가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만 하면, 언젠가 지쳐 버린다. 그렇게 한계에 몰리면 판단력이 흐려지기도 하고, 모든 걸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어 버리기 전에 다독여 주어야 했다.

“…어쩔 수 없잖아.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어.”

“저도, 오늘 둘러보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아요.”

“보면 알아.”

“저처럼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상대가 레이라여도, 아르제오는 제 솔직한 심정을 입에 담기 어려웠다.

그가 꾹 다문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레이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저도 모르게 옛날 일이 떠올라서였다. 황자라는 입장은 아마도 모두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 좀 쉬어야겠어요. 내일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요.”

“더 있을 셈이야?”

“더 있으려고 숙소를 잡은 거잖아요?”

“……”

“전 좀 더 이곳을 보고 싶어요.”

“서둘러 수도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 추격대도 오고 있는데.”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잖아요. 제가 말했던 갈림길에서 이곳은 멀지도 않고.”

그건 사실이었다. 고생하며 말을 달린 탓에 그들과 거리를 꽤 벌렸을 것이었다.

게다가 추격대는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포레스티아 공녀다.’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 이상 추격대가 정보를 얻기란 어려웠다.

반박하지 않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싱긋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는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곁을 지키던 유진은 곁눈질로 아르제오의 안색을 살폈다.

시린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머리를 젖혔다.

긴 한숨을 내쉬며 감았던 눈을 뜬 아르제오는 다시 평소의 분위기였다.

“은근히 할 말 없게 하네.”

반박하고자 한다면 반박할 수 있겠지만, 어쩐지 전의를 상실하는 기분이었다.

아르제오의 작은 중얼거림에 유진이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 더 둘러보고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빠르게 보고를 올리면 황태자가 이 사태를 처리할 터였다. 제국민을 살뜰히 돌보는 황태자.

아르제오는 형님이 그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기만 해야 했다.

그래야 그가 바란 대로 평화로울 수 있으니까.

“내일까지만 둘러볼 거야. 그 뒤엔 출발하자.”

“예, 전하.”

아르제오는 가벼이 제 머리를 헝클고는 손을 흔들며 방으로 들어섰다.

문을 등진 아르제오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대에 털썩 앉았다.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라만큼 신경 쓰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오히려 저보다 더 국민의 아픔을 마음에 담아 두는 듯했다.

‘포레스티아 공작령은 아주 살기 좋은 곳이겠네.’

다른 이들을 대하는 레이라의 태도에서 예상할 수 있었다. 평화롭고,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곳.

형님이 황제의 자리에 앉고, 자신 역시 자유로운 신분이 된다면, 그때는.

‘포레스티아 공작령에 터를 잡아볼까.’

지금 이렇게 빚을 지워 두고 있으니 그것도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며 아르제오는 저도 모르게 슬쩍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 * *

발루아 제국의 2황자, 노엘. 그는 온화하고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악행을 흘려 넘기는 법이 없었다.

노엘은 언제나 제국민의 편에 서서, 부패한 귀족이 있다면 기꺼이 맞서 싸웠다.

그런 그의 행보는 자연스럽게도 일부 귀족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었다. 노엘이 황제가 된다면, 발루아 제국은 성군을 맞아 더욱 옳은 길로 발전할 거라고.

그를 지지하는 귀족 중에도 물론, 그저 제 욕심을 채우고자 그 무리에 든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민심은 노엘을 지지하고 있었으니.

노엘이 빛을 발하면 발할수록, 사람들에게 사랑받을수록 로이드와의 관계는 점점 엇나갔다.

그 둘의 관계를 떠올리면, 지금 아르제오의 태도는 어찌 보면 평화를 유지하는 지혜로운 자세였다.

만일 노엘이 조금만 더 아르제오처럼 행동했다면, 그 두 사람의 관계도 조금은 평화로웠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레이라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그러고는 늘어진 부드러운 백금발을 오늘은 높이 올려 묶었다.

괴로워하는 제국민을 보며, 아르제오도 마음이 쓰였을 터였다. 그런데도 저리 자신을 억누르는 걸 보니, 그녀는 오히려 의욕이 샘솟았다.

그가 섣불리 나설 수 없으니 제가 더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을 나선 레이라는 아르제오를 발견하자마자 대뜸 말했다.

“아, 레이라….”

“전 조각가 마을 쪽을 좀 더 둘러보고 올게요.”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그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전날까지만 해도 시무룩해 보였던 레이라가 어째서인지 기운이 넘쳐 보였다.

고개를 떨어트리는 것보다는 보기 좋았지만, 무어라 꼬집기 어려운 감정이 들었다.

“어제보다 기분이 나아진 것 같네.”

“네. 오늘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지도 모르니까요.”

도대체 왜 저리도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 또한 괴로워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하지만 보통은 그들보다 자신을 우선시하지 않는가? 제 일을.

게다가 늘 느슨하게 묶거나 풀어서 늘어트린 머리만 봤는데, 저리 높이 묶고 나오니 또 다른 분위기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활기차고 생기 넘치는 느낌. 그런데 그게 또 예뻐서 곤란했다.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깨달은 아르제오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래, 가자, 가.”

그는 이미 포기한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줄 생각이었고.

아르제오는 유진에게 다른 일을 맡기고는 레이라와 둘이 숙소를 나섰다.

조각가 마을에서 쫓겨난 이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그 행방을 알아 오도록.

두 사람은 조각가 마을을 지나 레이라가 가리킨 대로, 돌산 쪽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면 다른 돌산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색달랐다. 겉면은 짙은 회색이었지만, 깎아 내면 하얀색이 드러났다.

그리고 깎아 낸 그 돌은, 특히나 어두운 곳에서 옅은 빛을 띠었다.

거대한 돌산으로 들어서니 돌을 캐는 이들이 다니는 길이 있었다.

안전을 위해 난간을 세워 둔 길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지친 얼굴로 움직이는 몇 사람이 보였다.

커다란 돌산에서 캔 돌을 옮기고 있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에는 극심한 피로가 드러났다.

실어 나르는 돌의 양에 비해서 일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적었다.

일하는 이들은 저마다 수척한 얼굴로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돌산을 오르는 두 사람을 발견한 이들 중 하나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누구시오?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소?”

“아, 돌산을 좀 둘러보던 중이었어요.”

“그렇습니까.”

그들은 레이라의 대답에 곧 두 사람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시 일했다.

새벽부터 움직여 캔 돌을 수레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시네요. 괜찮으신가요?”

“아, 예.”

레이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그들은 대충 대답하며 묵묵히 일을 진행했다.

덩그러니 선 그녀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일손이 부족했다.

영지로 오는 길에는 쫓겨난 이들이 많았는데 말이다.

돌을 캐는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이들을 쥐어짜 일을 시키는 걸로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들이 작업하는 걸 유심히 관찰한 레이라는 이내 팔을 걷어붙였다.

그녀의 힘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거기에 이 사태를 돈으로 해결할 만큼 부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꼭 그런 것들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었다.

“돌만 옮기는 거라면, 제가 좀 도울까요?”

청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싱긋 웃으며 레이라가 물었다. 그러고는 한쪽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 쪽으로 다가섰다.

지금 테론에서 이 마을 사람들을 쥐어짜 돈을 벌고 있다면.

돌을 캐는 인원을 줄여 그들을 쥐어짜고 조각가들을 쥐어짜 조각품을 찍어 내고 있다면.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돌을 나르는 정도였다. 조각품에 손을 댈 수는 없으니.

“아니, 아니지! 그대가 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돌무더기로 성큼 다가서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기겁하고 붙잡았다.

“안 되나요?”

“이 돌을 좀 봐. 그리고 그대 팔도 좀 보고. 돌을 나르는 것보다 그대의 팔이 부러지는 쪽이 먼저일 거야.”

“부러지지 않아요.”

“건장한 성인 남성도 쩔쩔매는 이것들을 그대가 어떻게 들어.”

곁눈질로 레이라를 힐끔거리던 마을 사람들도 아르제오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아가씨.”

계속해서 쌓인 피로 탓에 표정이 굳어졌던 이들도 하는 수 없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돌을 나르는 정도는 저도 할 수 있는데….”

어쩜 이다지도 이런 일에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지 모르겠다. 평생을 공작가의 공녀로 귀하게 살았을 텐데도 말이다.

정말이지 뭐라도 닥치는 대로 하려는 그녀를 보며 아르제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민을 책임지는 데에 앞장서야 할 황자인 자신보다, 그녀가 더 적극적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더 돕고 싶어 안달인지 모르겠다.

정말 레이라는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돕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가 반대하니 시무룩한 레이라를 보며 마을 사람들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저리 가녀린 몸으로 돕겠다는 사람을 보니 조금은 힘든 것이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고.

다만 여전히 머리 위로 쏟아지는 뙤약볕이 조금 버거울 뿐이었다.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년의 남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무 그늘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돌을 캐고 나르는 현장 근처는 햇볕을 피할 마땅한 그늘이 없었다.

산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나무 그늘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일하는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그리로 가기에는 거리가 애매했다.

일하는 이들이 대폭 줄어든 상황이라 제대로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바쁘니, 그런 건 불가능했다.

“나무 그늘이요?”

레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중년의 남자는 이마의 땀방울을 훔쳐내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해가 뜨거워서 낮에는 작업하는 게 고역이니까 말이오.”

그 대답에 레이라는 곧장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 일이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었다. 나무를 길러 내는 건 레이라가 ‘할 수 있는 일’에 속했다.

‘하지만….’

그 힘을 써서 눈에 띄면 또 추격대가 따라붙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만히 있기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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