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병사들은 큰 의심 없이 세 사람을 영지 내로 들여보냈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그들은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섰고, 영지 내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타냐 지역에서 보았던 마을에 비하면.
다만 영지의 다른 곳들은 그나마 괜찮아 보였지만, 돌산 근처의 조각가 마을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그쪽으로 가니 경비가 더욱 삼엄했다.
하지만 일행이 영지에 들어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각품 거래를 하러 왔다고 하니 들여보내 주었다.
그곳도 안에서 나가는 이들을 더 꼼꼼히 살피는 눈치였다.
마을 내부는 고요했는데, 마을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물건을 파는 가게로 들어서니 누가 있기는 했다.
“어서 오세요.”
주인장은 싱긋 미소를 머금기는 했지만,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물건을 좀 보러왔습니다.”
“편히 둘러보시죠.”
가게 안에는 돌조각으로 만든 아기자기한 장식품들이 가득했다. 더 크기가 크거나 특정한 조각을 원하는 거라면 따로 주문 제작을 해야 한다고 했다.
어두운 곳에 두면 옅게 빛난다고 해서 어스름한 등으로도 쓰인다고 했다.
“예쁘네요.”
“마음에 들어?”
씩 입꼬리를 올리며 묻는 아르제오의 옆구리를 유진이 툭 쳤다.
“마음에 드십니까, 상단주님?”
말을 높이라는 뜻이었는지 유진이 대신 예의를 갖춰 물었다.
“아, 네. 마음에 들어요.”
“이쪽 물건들로 주문할까요.”
“글쎄요. 좀 더 둘러볼게요.”
유진의 딱딱한 태도에 레이라도 금세, 병사들을 속였을 때의 얼굴로 돌아갔다.
눈빛이 평소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못 봤던 것도 아닌데,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호오?”
아르제오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턱을 매만지며 그런 그녀를 응시했다. 과연 고위 귀족인 만큼, 그 기품과 분위기가 남달랐다.
의외로 연기가 가능하다는 점이 퍽 재미있었다.
레이라는 꼼꼼히 조각품들을 살펴보았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주인장이 슬쩍 다가섰다.
“마음에 드시는 조각이 있으십니까?”
“전 이곳의 조각품을 좋아합니다. 귀족 나리들께서도 아주 좋아하시지요. 매년 찾으실 정도로.”
눈매를 가늘게 휘며 웃는 그녀의 말에 주인장은 화색을 띠었다.
“그런가요? 열심히 만든 조각품들을 이리 찾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말은 진심처럼 보였다. 정말로 조각품들을 아끼고, 그 가치가 인정받는 것을 기뻐하는 듯이.
“직접 만드시나요?”
“아쉽게도 저는 소질이 없어서 판매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동생이 조각하고 있죠. 그 아이가 만드는 조각품들을 전 좋아합니다.”
이야기하며 주인장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좋은 곳이었구나.’
레이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서로를 위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좋은 곳이었다고.
그런 사람들을 영주가 괴롭게 만들다니,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쪽 카탈로그에 디자인들이 더 있습니다. 주문 제작도 가능하니까요.”
주인장이 건네는 카탈로그를 받아든 레이라는 꼼꼼히 내용물을 살폈다.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을 가져오면, 그대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다양한 디자인이 많았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것들이.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던 레이라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물었다.
“조각품을 만드는 과정도 혹시 볼 수 있나요?”
“네, 그럼요. 원하신다면 보실 수 있습니다.”
주인장은 이러한 요구가 익숙해 보였다. 조각품으로 먹고살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세 사람은 가게를 나서 조각가들이 모여 작업하는 곳으로 향했다. 주인장이 친히 사람을 불러 안내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사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영주가 난입하기 전까지 이곳이 얼마나 평화로웠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이 딱히 불행해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마을에 지나치게 사람이 없구나, 싶은 정도.
“이쪽입니다.”
“감사합니다. 편히 둘러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자리를 비켜달라는 유진의 눈치에 안내역을 맡은 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떴다.
레이라는 그가 자리를 뜨고 나서야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했어?”
“조금요.”
아무래도 평소의 모습과 다른 걸 연출해야 한다는 건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강단 있어 보이던데, 뭐.”
“그런 편이죠.”
은근슬쩍 되받아치는 모습에 아르제오는 픽 웃어 버렸다.
차분하게 주변을 먼저 둘러본 레이라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커다란 홀에 여러 조각가가 모여 조각하고 있었다.
널찍하게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집중하기에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방문객도 당연하다는 듯이 안내하니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조각하는 손길은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다만 그들의 표정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사이를 느긋하게 걸어 다닌 그들은 곧, 조각하는 홀을 벗어났다.
세 사람은 영지의 다른 곳들도 둘러보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오랜 가뭄으로 세금을 걷을 수 없어서 그들 마을에 영주가 부당한 세금을 요구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영지의 다른 곳들도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둘러 다니며 둘러본 영지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태라고 하기 어려웠다.
물을 귀히 여기긴 했고 생활이 빠듯해 보이긴 했지만, 절망에 빠진 느낌은 아니었다.
세금도 낼 수 없어서 조각가 마을에 모든 부담을 지울 정도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평화롭네요.”
“그러네. 아까 그 마을만 빼고.”
사람들은 대부분,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내고 있었다.
딱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고 불릴 이유는 없어 보였다. 나라에서 내팽개친 땅이라는 말도.
아르제오도 같은 생각인지 조금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영지의 모든 세금을 그 마을 하나에 지울 만큼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영주가 수작질했나 보네.’
굳이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아르제오에게는 불 보듯 훤했다.
영지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과한 세금을 부과했다.
조각가들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을 하나둘, 영지 밖으로 내쫓았다.
아마도 영지 밖으로 내보낸 건, 영지의 다른 곳들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게 그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
‘그래서 그 마을은 경비가 삼엄했군.’
턱을 매만진 아르제오가 홀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의 입장은 들어 볼 필요도 없어졌다. 이야기를 들려줬던 에드와 마을 사람들이 피해자일 뿐이었다.
“더 볼 필요도 없겠네.”
“그래요?”
“그래. 그만 돌아가자.”
성큼성큼 앞서 걷는 아르제오를 뒤따르며, 레이라는 다시 한번 뒤를 살폈다.
영지민들이 불행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특정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그 위에 지어진 행복은 금세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 * *
영지 내에 작은 숙소를 잡은 그들은 곧장 숙소로 돌아갔다.
잡는 숙소는 늘 그렇듯, 방 세 개가 이어진 로비가 딸린 곳이었다.
로비 소파에 털썩 앉은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지 내를 둘러보았고,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았다. 그래도 여전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웬 한숨?”
아르제오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레이라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냥요.”
하지만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듯 그는 턱을 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신경 쓰여?”
“뭐가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할 거라며. 뭘 하면 좋을 것 같아?”
“……”
아르제오의 물음에 레이라는 입을 꾹 닫았다.
이곳은 타냐 지역과 상황이 달랐다.
레이라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없었으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가뭄만의 문제가 아닌 듯 보였다.
시무룩한 레이라를 보니, 아르제오도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 장담한 것도 아니니 괜찮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닐 건 없잖아. 그대가 마음 쓰지 않아도 괜찮아.”
조금 냉정하게까지 들리는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는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물끄러미 직시했다.
“아르제오는 마음이 쓰이지 않아요?”
“쓰일 것 같아?”
“곧장 대답하지 않는 거 보니까 쓰이는 것 같네요.”
“아니야.”
“그럼 처음 대답할 때 그렇게 대답했겠죠. 은근슬쩍 대답을 피하려고 했으니 마음이 쓰이는 거죠.”
조목조목 따져 묻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싸늘히 시선을 돌렸다.
“마음이 쓰이면 뭐.”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눈빛이었지만, 결론은 그도 마음이 쓰인다는 거였다.
마음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타국 사람인 자신도 이리 마음이 좋지 않으니.
황자의 신분으로 자국민들이 고통받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는 있었다.
본인이 원해서 황자로 태어난 건 아닐 테니 모든 것을 짊어지기 싫을 수도.
하지만 아르제오는 정권 싸움에서 한걸음 물러나면서도, 제국민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었다.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선뜻 나설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게 어쩐지 안타까웠다.
자신에겐 움직일 마음도 그럴 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위치였다.
황자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귀족들에게 어떤 빌미를 주어 형제간에 황권 다툼이 형성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레이라는 형제간의 황권 다툼에는 비극적인 결말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곁에서 긴 시간 로이드를 보아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서로의 입장 때문에 형제끼리 가까이할 수도 없고, 가까워질 수도 없다.
아마 아르제오는 형제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마음이 쓰인다고 아무도 질책하지 않아요, 아르제오.”
차분한 레이라의 음성에 아르제오는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늘 제 행동을 제한했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껏 늘 그래 왔고.
“질책하진 않겠지만, 이용하려는 이들은 많아.”
레이라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가까워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요.”
“뭐가.”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렸던 아르제오가 서늘히 레이라를 응시했다.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그녀는 입을 뗐다.
“본인의 감정을 속일 필요는 없잖아요.”
“……”
“저는 리히덴의 귀족도 아니니까, 아르제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요.”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리히덴의 사람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