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23)화 (23/122)

<23화>

레이라의 말에 남자는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원래라면 내가 할 말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아르제오는 굳이 나서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레이라의 뒷모습을 눈에 담을 뿐.

정처 없이 허공을 헤매던 눈동자가 맑은 레이라의 눈을 마주했다. 남자는 이내 고개를 푹 떨어트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에드라고 합니다.”

테론은 기나긴 가뭄에 고통받고 있다고 에드는 말했다.

그는 테론의 한 부분을 차지한 돌산 근처에 사는 사람이었다. 돌을 조각하며 사는 마을의 사람이라고.

문제는 가뭄이 점점 길어지자, 영주가 돌산을 소유하려 들었다는 점이었다.

극심한 기근으로 영지 내의 세금이 줄자, 돌산 소유권을 핑계로 그들의 마을에 엄청난 세금을 요구했다.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요구였으니 당연하게도 세금을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빌미로 영주는 병사들을 보내, 조각가들을 제외한 이들을 차례차례 마을에서 내쫓고 있었다.

자신들은 그저 돌산에서 돌을 캐 나르는 일을 했으니 영주는 그들이 없어도 된다고 여긴 것이다.

조금이라도 인력을 줄이고, 조각가들을 쥐어짜 조각품을 만들어 수익을 내려는 속셈이었다.

“아내와 아이가 아직 마을에 있습니다. 아내는 조각가라서 붙잡혀 있는 처지입니다. 부디, 부디 도와주십시오…!”

얘기를 이어 나가며 에드는 눈에 눈물을 머금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이마를 대며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아르제오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제 일은 이러한 상황을 황태자에게 보고하는 것.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게 아니었다.

에드의 이야기를 들은 레이라가 고개를 돌려 아르제오를 돌아보았다.

“도와달라고 하네요.”

“그러네.”

고개를 끄덕이는 그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도울 건가요?”

“글쎄.”

심드렁한 아르제오의 대답에 레이라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곧 몸을 일으키고는 아르제오를 잡아끌어 에드와 거리를 벌렸다.

“도와주지 않을 건가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살펴보러 온 거잖아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레이라가 묻자, 아르제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말했잖아. 살펴보고, 형님께 보고하는 것까지가 내 일이야.”

“보고만 하는 걸로 아르제오는 만족하나요?”

똑바로 부딪혀 오는 레이라의 맑은 시선이, 이번에는 어쩐지 마주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만족, 불만족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나서면 누군가에게 빌미를 쥐여 주게 될지 모르니까.”

정권 싸움에 발을 들이지 않고, 지금처럼 평화롭게 살려면 그리 해야 했다.

그저 본 것을 보고하고, 움직이는 건 형님인 황태자였다.

그래야 국민에게 그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으며, 동시에 황위에 뜻이 없다는 걸 드러낼 수 있으니.

아르제오의 대답에 레이라는 발루아 제국의 황자를 떠올렸다. 로이드의 동생을.

그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서면 나설수록 민심이 황자에게 기울었고, 그 결과 귀족들이 파벌을 나누어 황권 다툼이 이루어졌다.

그걸 그냥 형제간의 싸움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건 레이라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피난민의 마을 같은 곳이 많냐는 그녀의 질문에 아르제오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때 그의 표정은 참담하고, 비통했다.

그라고 어찌 눈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제국민을 돕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입장에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레이라는 살짝 고개를 떨어트리며 제 치맛자락을 말아쥐었다.

그렇다고 눈앞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나는 힘이 없어.’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횡포를 부리는 영주를 설득하는 것도. 아마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할 터였다.

고개를 떨어트린 채 치맛자락을 움켜쥔 모습에 아르제오는 어쩐지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어째서 자신은 이런 처지여서, 그녀를 실망하게 하는 건가.

하지만 레이라는 딱히 그에게 실망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힘이 없는 자신을 한탄했을 뿐. 그리고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

잠시 그 상태로 있던 레이라가 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똑바로 아르제오를 올려다보는 청록색 눈동자는 맑기만 했다.

“그럼, 아르제오가 한 게 아니면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요?”

만일, 그가 황자로서 나선 게 아니라면.

“저는, 제가 가는 길에 도움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돕고 싶어요.”

먹을 것을 청하는 이에게 기꺼이 음식을 내어 주고 싶었다. 부조리하게 가족과 떨어지게 된 이를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라의 눈은 맑고 올곧아서, 마주하고 있으면 그 어떤 부탁에도 고개를 끄덕일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버릴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아르제오는 손끝을 움찔거렸다.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되돌아오는 대답에 레이라는 조금 표정이 풀어졌다.

“모든 걸 다 해결해 주는 건 못 해요. 그렇게 하지도 않을 거고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바람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을.

“그리고, 아르제오도 제대로 된 보고를 하려면 제대로 살펴봐야 하지 않아요?”

“그건 그래.”

“들은 얘기를 전달하기만 해서는, 영주의 입장도 들어 볼 수 없고요. 제대로 된 보고가 될 수 없어요.”

이 와중에 영주의 입장도 들어 봐야 한다는 주장이 퍽 재미있었다.

쓸데없이 공평하다고 해야 할까. 가진 자들이 그러지 못한 자들을 쥐고 흔드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하지만 도움을 주겠다는 말은 못 해. 장담할 수 없으니까.”

“저도 장담하진 않아요.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타냐 지역에서도, 카리아 도시에서도, 레이라는 무언가를 완전히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테니, 최선을 다해 달라고만 말했다.

꽃을 파는 소녀에게도, 꽃을 전부 사 주는 대신 시든 꽃을 피워 주었다. 그걸 파는 건 소녀의 몫이었다.

그런 부분들이 아르제오는 또 마음에 들었지만.

알겠다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확인한 레이라는 한껏 밝아진 얼굴로 다시 돌아섰다.

에드에게 다가선 그녀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얘기 들려줘서 고마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할게요.”

“그건…. 도와주신다는 말인가요?”

에드의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에 레이라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돕는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을지도 몰라요.”

거절의 의미를 지닌 듯한 행동과 이어진 말에 에드는 절망에 빠져 고개를 떨어트렸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돕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요.”

에드는 다시 고개를 들어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 있다면, 그건 에드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권력으로 일을 해결해 버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지금 그럴 힘이 없다고는 해도.

하지만 그래 버리면 이들은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도움을 청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당신이 가족과 함께 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면, 저도 그 옆에서 최선을 다해 볼게요.”

내팽개치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겠다는 말이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볼 테니, 너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움직이라는.

가만히 있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레이라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테론을 살펴볼 필요는 있어. 우리는 들어갈 거고. 그쪽은 어떻게 할지 잘 생각해 보고 움직여. 이대로 쫓겨날지, 말지.”

레이라의 뒤에 얌전히 있던 아르제오가 조금 냉정한 투로 말했다. 그러더니 레이라를 일으켜 세워 이끌었다.

아르제오의 말에 에드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세 사람이 멀어지는 대로 놔둔 채 바닥에 시선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레이라는 그가 너무 과한 절망에 빠져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조금 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말을 해줄 걸 그랬나 싶었다.

하지만 보호받기만 해서는, 그 울타리가 사라졌을 때 홀로 살아갈 수가 없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근데 저렇게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요?”

“신분을 밝히면 당당히 들어갈 수 있지.”

“제 신분을요?”

“내 신분이지 않을까? 그대 신분은 밝히면 안 되지.”

“아르제오 신분도 마찬가지잖아요.”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데, 병사들 쪽을 유심히 주시하던 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딱히 주변을 경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 같네.”

유진의 말에 아르제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서의 접근이 아니라, 내부에서 누군가가 도망칠 것을 막는 느낌이었다. 에드의 이야기를 들은 뒤라, 아마도 조각가의 도주를 막으려는 의도 같았다.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겠어.”

그렇게 말한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돌아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그 미소에서 어쩐지 불길함을 느꼈다.

“영지 상황이 좋지 않으면, 돈 많은 상인은 마다하지 않을 거야.”

“그럼 아르제오가 상인이라고 하고 들어가는 건가요?”

“아니.”

그는 레이라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저었다.

“레이라가.”

“제가요?”

“유진과 나는 될 수 있으면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게 좋아.”

아무리 대외적으로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는 해도, 아르제오는 리히덴 제국의 황자였다.

알아보는 이라도 있었다가는 이쪽이 난처했다.

“그대가 대상인이고, 우리가 호위인 게 더 재밌겠어.”

“네?”

“아, 말이 헛나왔네. 그게 더 효율적이겠다는 말이야.”

눈매를 곱게 접으며 싱긋 웃는 것이, 어쩜 저리도 장난꾸러기 같은지.

레이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르제오를 흘겨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재미를 추구하다니. 과연 정말 제정신인 걸까.

아르제오의 제안대로, 세 사람은 로브를 두르고 후드를 써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타고 당당히 영지로 향했다.

“멈추시오.”

병사가 앞을 막아서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앞선 유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테론의 조각품을 거래하러 왔다.”

병사는 유진의 말에 일행을 한차례 의심의 눈초리로 훑었다.

“상단주께서는 매년 이곳의 조각을 직접 보고 고르십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유진의 말에 레이라가 슬쩍 제 후드를 들어 얼굴을 내보였다.

고운 피부에 청록색 눈동자. 엘프라고 해도 믿을 미모였다.

병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레이라는 손끝이 떨리려는 것을 애써 감췄다.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는 아마도 이 제국에 없을 터였다.

포레스티아의 이름을 대고, 그 특별한 힘을 보이고 나서야 공녀인 것을 알아볼 테니까.

“아니면, 테론은 이제 더 이상 조각품을 팔지 않는 겁니까?”

나지막한 레이라의 목소리에 병사는 슬쩍 몸을 비켜섰다.

지금껏 함께 있으면서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유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고고하고,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분위기.

제 앞에 레이라를 태운 탓에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르제오는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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